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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가 부르는 노래
지난 일요일에 청주에 내려갔다. 명절에 엄마가 내려오지 말라하셔서 그 다음 주에 점심이라도 한끼 같이 하러 내려갔던 것이다. 내려오기 전에 엄마는 나와 할 얘기가 있다 하셨는데, 혹시 심각한 병이 발견된 건 아닌지 이혼하려 하시는 건지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항상 말씀하셨던 것과 같은 주제의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지난 해 어버이날 인천 차이나타운에 가기로 해놓고 우리가 오지 말랬다는 것부터 시작됐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혹시라도 엄마가 무지 아프다는 얘기를 듣는 게 아닐까 긴장하던 마음이 탁 풀리면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너네가 우리를 오지말라고 했다.' '너네가 우리를 무시했다' 결혼하고 가정 꾸린 이후 10년 넘게 계속 되는 저 오해. 그 때 상황이 어떤 것이었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
무엇이든간에 갇혀있던 틀을 깨는 건 해방감을 준다. 깨진 그 틀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알고 있다면 더욱. 며칠 전 하이힐을 샀다. 나는 일년도 전부터 더 늦기 전에 하이힐을 신어보고 싶다는 생각이 하고 있었다. 내 안의 불덩이를 느끼던 그 때였던 것 같다. 하지만 인터넷에서 하이힐 리스트만 보고 결정하지 못한 채 1년이 훌쩍 지나갔다. 그런데 이번 생일에는 꼭 사야겠다 마음먹고 백화점을 돌다가 전격 결정하게 된 것이다. 모든 것에는 적절한 때가 있다는 말은 진실이다. 나는 '지금' 이 신발이 필요했다.나는 내가 중독되어 있던 틀이 어떤 것이었는지 어렴풋이 느끼기 시작했는데 내가 나의 여성성을 온전히 받아들이지 못하면서도 남자와 여자라는 이분법의 틀 안에서 나를 잘 포개어 놓고 있었다는 사실을 깨닫게 된 ..
1. 저글러스 드라마를 통해 본 나 12월 말부터 저글러스라는 로코 드라마에 빠졌었다. 이러한 감정적 몰입은 응팔이후 근 2년만의 일이었다. 그런데 이전과는 다른 느낌이 들었다. 일상을 장악하는 이 감정이 불편하게 느껴졌다. 드라마 내용은 그닥 새로운 것은 없었다. 어린시절의 트라우마로 인해 마음의 문을 닫은 차가운 남자상사를 따뜻하고 발랄한 여자비서가 보필하면서 치유해주고 결국 사랑에 이르게 된다는 내용이다. 이 드라마는 여자 비서, 남자 상사라는 구조 안에서 남녀 성역할 구분을 적나라하게 보여주면서도 묘하게 피해간다. 여자주인공을 놓고 벌이는 술내기에서 남자주인공이 "누구와 함께 일할지는 그 여자의 결정이지, 우리가 술자리에서 논할 사안이 아니다."라고 이야기하는가 하면 여주인공에게 치근덕거리는 남자..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 클라리사 에스테스 지음, 손영미 옮김/이루 은 여성들을 향한 '선동서적'이다. 이 책은 우리의 머리를 향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우리의 가슴을 향해서만 돌진한다. 삶에서 '지하세계'의 어둠을 한번이라도 경험한 여성이라면, 그리고 인류의 문명화이래로 멈춘 적이 없던 여성에 대한 억압을 온 몸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여성이라면 책이 건네는 메세지가 자신의 영혼을 쥐고 흔드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다른 여성주의 책들처럼 이 책이 전하는 메세지도 한가지이다. 주어진 삶이 아닌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라는 것. 여성의 영혼에는 이미 충분한 힘이 있으니 말이다. 저자는 억압되었던 여성 본래의 그 힘을 되찾는 방법을 이야기하면서 '여걸'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야성을 지닌 ..
학교 편집위의 요청으로 학교 소식지에 실릴 나의 한 해 이야기를 썼다. * 내 안의 여신을 찾아 헤맸던 2017년 나의 2017년을 숫자로 표현한다면, ‘10’이다. 결혼 10주년, 엄마 10년차, 전업주부 10년째. 결혼 후 얼마 안 있어 첫째 아이를 임신했고, 임신 후 심한 알러지 증상으로 바로 퇴사를 했으니 저 10년들은 또 하나의 10년으로 이어질 수 있겠다. ‘경력단절 10년’. 능력이나 가능성으로 평가받던 시기를 지나 아내와 엄마라는 ‘관계’ 안에서 나를 정의내리던 시간들. 결혼, 임신과 출산 그리고 육아라는 인생 챕터들을 누구나 그렇듯 때로는 힘겹게, 때로는 기쁘게 넘겨왔고 그 과정 속에서 마치 내가 사라져버리는 듯한 불안도 느꼈다. 하지만 그 10년을 후회하지도, 되돌리고 싶지도 않다. 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