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엄마와 딸, 그 관계 속에서 돌아보는 인생 본문
지난 일요일에 청주에 내려갔다. 명절에 엄마가 내려오지 말라하셔서 그 다음 주에 점심이라도 한끼 같이 하러 내려갔던 것이다. 내려오기 전에 엄마는 나와 할 얘기가 있다 하셨는데, 혹시 심각한 병이 발견된 건 아닌지 이혼하려 하시는 건지 여러가지 생각이 들었지만 결국 항상 말씀하셨던 것과 같은 주제의 이야기였다.
이야기는 지난 해 어버이날 인천 차이나타운에 가기로 해놓고 우리가 오지 말랬다는 것부터 시작됐다. 그 이야기를 듣자마자 혹시라도 엄마가 무지 아프다는 얘기를 듣는 게 아닐까 긴장하던 마음이 탁 풀리면서 분노가 치밀어올랐다.
'너네가 우리를 오지말라고 했다.' '너네가 우리를 무시했다'
결혼하고 가정 꾸린 이후 10년 넘게 계속 되는 저 오해. 그 때 상황이 어떤 것이었는지 제대로 기억조차 나지 않았다. 하지만 그렇게 약속을 해놓고 우리가 만나지 못했다면 분명 다른 이유가 있었을 것이다. 보통의 경우 엄마는 "아빠가 너무 바쁘다", "내가 너무 아프다."며 만남을 취소하는 경우가 많았고, 그럴 때마다 우린 그 분들의 상황을 배려해야 하니 알았다고 했다. 그런데 10년 넘게 엄마는 저 오해를 풀지 못하고 있었다. 만나지 못한 건 우리가 거부했기 때문이라는 거다. 당시의 상황을 설명해도 이미 고개를 도리도리한다. 당신이 오해할 수 있으므로 이야기를 들으러 나온 것이 아니기 때문이다. 자신이 믿는 바에 따라 비난하러 온 것이다.
그리고 이어진 이야기는 지난 추석 때 내가 와서 당신에게 말 한마디 안 했다는 것이었다. 이 이야기를 들으니 엄마의 오해와 상태가 어떤 것인지 파악이 되었다. 물론 난 말 한마디 안 했다고 생각하지 않는다. 오히려 엄마에게 더 다가가 보려고, '명절 때 이제 이런 거 나눠서 해야한다'며 설거지도 하면서 노력을 했었다. 일부러 엄마랑의 시간을 내려고 홍콩여행을 계획했었고 그래서 함께 3박 4일을 보냈던 일은 엄마의 머리 속에서 통합적으로 작용하지 않았다. 서운한 것만 보인다. 그리고 계속 서운하다. 그 반대의 일이 가끔 일어난다 하더라도.
이 정도 되니 알 것 같았다. 팩트는 중요하지 않다. 그것은 이미 통째로 왜곡되고 있다. 그렇다면 그 왜곡을 일으키는 뿌리가 무엇인지가 중요한 거였다.
* 엄마와 딸, 그 서글픈 관계
나는 엄마가 불편하다. 아마도 가족으로 안만났어도 서로 친해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둘의 기질이 다르다. 그런데다가 둘이 함께 했던 삶의 여정이 평탄치 않았다. 불행 속에서 더 단단해질 수도 있었겠지만, 우린 서로 그걸 각자 견뎌냈고 그것이 마음 속에 깊은 상처로 남았다. 대학교 때 서울로 올라오면서 엄마, 아빠로부터 해방되어 너무나 행복했다. 엄마가 하숙집에 자취방에 올라오는 것도 진저리치게 싫었다. 다른 엄마들은 오지도 않는데, 우리 엄마는 왜 이리 나에게 집착하는지 이해가 되지 않았다. 그리고 이후 계속 쏟아지던 전화기 너머로의 폭언들은 내가 감당하기엔 벅찬 것이었다. 엄마는 나에게, 바라보기만 해도 푸근해지는 '사랑'이 아니라 언제 나를 공격할지 몰라 긴장하게 되는 대상이었다.
이미 둘 사이의 삶의 서사는 서로를 이렇게 감정적으로 갈라놓았는데, 엄마는 '보통의 모녀 관계'를 원했다. 그것이 불가능한 일이라는 걸 머리로는 알지만 마음까지 어쩌지는 못하는 것이다. 자신의 부모나 친구, 남편 등 주변의 누군가로부터 그녀는 '내가 어떤 모습이건간에 나를 품어주는' 사랑을 경험한 적이 없는 것 같다. 하지만 인간이 스스로 바로 서는 자긍심을 갖지 위해 필요한 단 하나의 경험이 바로 저것이다. '존재 자체에 대한 긍정으로서의 사랑' 그래서 엄마는 절박한 심정으로 저 사랑을 갈망하고 있는 것 같다. 그리고 그 사랑을 받지 못했을 때 솟구치는 원망을 토로할 편안한 상대가 딸이었던 것이다. 엄마가 딸에게 '부모의 사랑'을 원하고 있었다. 하지만 이미 우리 관계는 악순환의 고리 속으로 들어갔고, 나는 내 자신의 상처를 헤집고 치유하는데도 힘든 상황이다. 불행하게도 그래서 난 그 사랑을 엄마에게 줄 수가 없다.
사랑에 대한 욕구는 있는데 그 대상으로 주시하고 있는 사람은 날 불편해하는게 뻔해 보이니, 서럽고 심지어 억울하다. 그러니 상황은 매우 자주 왜곡되어 머리 속에 저장된다. 자신의 이 억울한 감정이 어떤 논리적 이유를 찾아야하기 때문이다. 즉, 상황이 먼저가 아니라 감정이 먼저인 것이다.
* 존재에 대한 긍정으로서의 사랑
엄마에게 엄마 스스로는 본인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는지 물어보았다. '잘 하는 것도 아무것도 없고, 왜 살아가야 하는지, 왜 태어났는지 모르겠다'고 한다. 스스로를 괜찮은 사람으로 여기고 그 힘을 바탕으로 삶의 질곡들을 헤쳐나갈 수 있는 것인데, 인생은 엄마에게 휘몰아치는 파도만 경험하게 했을 뿐 따뜻한 기억을 남기지 못했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말이 '그런데 다른 사람들은 참 나를 좋아한다.'는 것이었다. 불행하게도 자긍심이 낮은 사람들이 그러듯이 엄마는 자신의 가치를 스스로가 아니라 다른 사람에게서 찾고 있었다.
엄마의 이야기를 듣다보니 이제까지 내가 지나왔던 고통의 시간들이 떠오르면서 나를 더 잘 이해할 수 있게 되었다. 나도 관계로부터 나의 가치를 인정받고자 그동안 바둥거렸었다. 엄마, 아빠에게서 받지 못했던 '존재자체에 대한 긍정으로서의 사랑'을 친구들에게서, 남편에게서 받고자 악을 썼다. 결국 그것이 '사람'에게서 받을 수 없는 감정이라는 것을 깨닫고 전지전능하다는 신에게 의지해보려 하기도 했다. 그런데 나의 경우 내가 그 사랑을 경험한 것은 아이들로부터였다. 아무리 소리치고 비난하고 쌀쌀맞게 굴어도 그저 엄마라서 나를 사랑해주는 아이들. '엄마 사랑해.' '엄마가 최고야.' '엄마가 죽으면 같이 죽을꺼야.' '엄마랑 결혼할꺼야.' 유아기의 아이들에게 부모는 신과 같은 존재이다. 그것이 자신의 생존과 관련된 본능에 의한 것이든 아니든.
며칠 전에는 같이 샤워를 하려고 옷을 벗고 둘째와 함께 욕실에 들어갔는데, 둘째가 나를 보고 활짝 웃으며 이야기했다. "엄마, 엄마는 벗었을 때가 제일 예뻐." 엄마도, 남편도 납작한 내 가슴을 조롱하기만 했었는데, 딸은 내 몸이 아름답다고 해주었다. 아이들은 날 치유해주러 내려온 천사가 아닐까...난 그런 생각마저 들었다. 존재만으로도 사랑받는 느낌이 어떤 것인지 그 때 난 알 것 같았다.
엄마가 원하는 것도 그러한 사랑일 것이다. 아마도 유아기의 나 또한 엄마에게 그런 사랑을 주었겠지만, 그 당시 엄마는 바깥의 폭풍에 맞서느라 작은 햇살을 느낄 여유가 없었으리라.
* 엄마를 위해 기도한다
나는 엄마에게 이 상황을 이해시키려 노력했다.
- 우리가 서로를 불편해하는 것은 사실이지만 이것은 어느 누구의 잘못도 아니고, 불행하게도 삶의 서사 속에서 이렇게 흘러왔다는 것.
- 엄마만큼 나의 상처도 깊으며 그래서 내가 지금 엄마가 바라는 만큼 채워주지 못하는 것이 안타깝다는 것.
- 과거의 삶을 겪어낸 그대로 인정하고 받아들이며 그것을 통과한 엄마를 자랑스럽게 여길 필요가 있다는 것.
- 그리고 미래를 선택할 수 있는 힘이 엄마에게 있다는 것을 기억하고 미래를 단정짓지 말 것.
- 이 모든 것을 엄마 스스로 하기에는 벅차니 전문가의 도움을 받는 것이 좋을 것 같다는 것.
그러면서 나는 혹시나 몰라 챙겨가지고 왔던 <여성의 자아찾기, 내안의 여신찾기> 기록집을 건넸다. 엄마가 저 책을 읽어볼지, 그 날 나와의 대화를 어느 정도까지 받아들이고 이해했는지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가고 난 뒤에 다시 그저 억울함만 남아있을지도. 대화 내내 엄마는 '할 말이 더 있었는데 하나도 떠오르지 않는다.'고 했으니 말이다.
다행히도 난 그 사이 많이 단단해져 있었다. 그 대화가 내 감정을 온통 헤집어놓지도 우울의 나락으로 떨어뜨리지도 않았다. 막둥이 일 이후로 나는 모든 사람에게 나름의 서사가 있으며 그것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면서 그 사람을 판단할 수 없다는 것을 깨달았다. 내가 알고 있는 엄마의 서사말고도 엄마의 행동과 감정, 판단 뒤에는 더 많은 이야기들이 숨어있을 것이다. 나도 엄마에게 서운한 것이 있지만, 엄마를 휘두는 그 서사가 있다는 것을 알기에 내 감정을 토로하기보다는 그저 받아들이고 넘어갔었다. 하지만 엄마는 그러지 못하고 있다. 그것은 지금 그녀가 무척 나약하고 스스로를 통제할 만큼의 에너지가 없다는 뜻이겠지. 지금은 그저 엄마가 편안해질 수 있기를 기도할 수 밖에. 내가 단단히 바로 서서 사랑을 퍼줄 수 있게 될 때까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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