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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로 사는 이야기/아이들이 자란다

수다쟁이 소년의 말, 말, 말...

고래의노래 2012. 2. 20. 03:36

아이와 말을 나눈다는 건 에너지 소모가 크다. 아이의 말을 이해하는 것도, 아이에게 내 말을 이해시키는 것도 쉽지가 않다. 이해와 지각의 수준이 다르기 때문에 철저하게 상대방에게 맞추어야 한다. '나'를 놓고 '너'를 받아들이는 연습이 반복된다. 부모가 되야 어른이 된다는 말은 이 때문일 것이다.

요즈음은 하루하루가 그 '연습'의 나날들이다.
이 시기의 아이들이 누구나 그렇겠지만 윤우도 쉴 새없이 계속해서 말을 쏟아내고 대답을 요구한다. 제일 힘든 건 같은 말을 반복하며 반응을 요구하는 것. 한 번 꽂히면 같은 말을 기본 5번 반복한다. 그것도 완결형의 평서문이 아니라 항상 의문문이다. "타이니가 화가 나서 이렇게 발을 굴렀데?" 이런 질문 아닌 질문을 연속으로 5번 반복하고 계속 나의 대답을 요구한다고 생각해보시라. -_-;;; 과묵한 엄마는 참 고달프지만, 얘기하고 싶어도 눈 앞에서 방문을 닫아버릴 그 날을 생각하며 행복하다고 최면중.

- 뜬금포
잘 놀다가 갑자기 그림책에 나오는 구절을 읇조린다. 나야 맨날 같이 보던 그림책이니 단번에 알아듣지만 처음 보는 어른들에게는 그저 어리둥절할 따름. 게다가 중얼중얼 이야기하다가 뜬금없이 "포동이가 그렇게 다 먹어치웠데?"같이 확인 질문이 들어가면 더 난감해하신다.

- 역할놀이
드디어 역할놀이에 입문했다. 동물인형들을 가지고 상황극을 벌이는데 자주 하는 상황극은 몇가지로 정해져 있다.

1) 누구누구 생일이니 내가 케익을 사오겠다, 아이스크림을 사오겠다, 초코렛을 사오겠다...등등 단 것들의 사재기.
2) 어떤 동물이 혼자 있는데 다른 동물들이 계속 와서 자리가 비좁아 지고 있다. 그래도 모여서 놀자며 세를 불리더니 다 모이면 상황극 중단.
3) 저기 버스, 기차가 간다. 가서 타자. 그런데 버스(기차)가 절벽으로 떨어지려고 한다. 어어어어어~~~!!!!거리다 끝.

말을 주고 받는 것이 아니라 나에게 대사를 정해주고 말하라고 한다. 자신이 상황에 참여하는 경우는 드물고 나에게 1인 다역을 시키면서 자신을 대본을 던지며(!) 연출만 하는 것이다. 내가 즉흥적으로 애드립을 치면 당황하고, 이렇게 해보라며 시키면 부끄러워하며(아니 왜?!) 비실비실 웃고 말을 못한다. ;; 내가 처음 인형으로 이야기해 주었을 때 얇고 높은 톤으로 이야기해주어서 그런지 상황극에서는 항상 하이톤을 구사하는데 듣기가 거북하다..ㅠ.ㅜ 잘 안들리기도 하고.

- 무슨 소리 낼 것 같애?
요즈음 하는 질문의 80%가 저것이다.
"가니가 라니가 빨리 달리는 거 보면 무슨 소리 낼 것 같애?"
"4륜구동차가 기찻길보면 무슨 소리 낼 것 같애?"
"돌고래가 이 책보면 무슨 소리 낼 것 같애?"
특별한 상황에 대한 거라면 모를까 너무나도 일상적인 장면에서 무슨 이야기를 할 것 같냐니 나는 그저 질문 속 문장을 감탄사 몇 마디와 함께 다시 한 번 반복할 뿐이다.
"와~ 진짜 빠르다." (-ㅂ-)
"와~ 기찻길이다." (-ㅂ-;;)
"와~ 책이다." (-ㅂ-;;;;)
정 할 말이 생각나지 않으면 마이크를 윤우에게 넘긴다. "윤우 생각에는 무슨 소리 낼 것 같은데?" 그러면 몇 번 대답하다가 대뜸 내 계략을 알아챘다는 듯이 다시 조른다. "엄마가 얘기해!!!"

이런 윤우가 조용해질 때가 있다. 버스와 지하철을 탈 때 그리고 그네를 탈 때이다.


버스를 타면 이렇게 창 밖을 하염없이 내다보곤 한다. 저 조그만 머리 속에서 지금 무슨 생각들이 피어오르고 있는 걸까.
이럴 때면 '내 속으로 낳았지만 자식 속은 모른다'라는 말이 떠오르곤 한다.

놀이터의 놀이기구 중에 윤우는 그네를 가장 좋아한다. 높이 올라가도록 계속 밀어주는 걸 좋아하는데 그네 밀어주는데 있어서는 난 최고의 엄마. 다른 아이들이 내가 밀어주는 거 보고 다들 자기 엄마에게 "저렇게 밀어줘!" 라고 한다. 훗훗 -ㅂ-v
그네에 타면 꽤 오랫동안 윤우는 아무 말도 하지 않고 그저 그네와 함께 흔들린다. 십분정도 이렇게 조용하게 그네만 밀다보면 혹시 뭔가 잘못된건가 싶어 고개를 틀어 윤우를 보게 된다. 그러면 만족스러운 미소를 지으며 흔들리던 윤우는 팩 돌아 성을 낸다. "멈추지 마! 밀어, 계속 밀어!!!" -0-


아이들은 계단식 성장을 한다. 하루아침에 떼부림의 레벨이 달라지기도 하고 말하는 수준이 변하기도 한다.

윤우의 말도 갑자기 논리적으로 변했다. "~~때문에" "~~이니까"라며 적절한 이유를 달아서 이야기하는 경우가 많아졌다. 우리에게도 물론 이러한 논리를 요구한다. 자신의 입장과 요구를 정당한 이유를 들어 설명하고 우리를 설득하려고 하기도 한다. 아주 어릴때부터 아이니까 어물쩡 넘어가며 이야기해 주지는 않았다. 알아듣지 못해도 정확하게 앞뒤 상황을 말해주려고 했다. 하지만 그 때는 일방적인 '이야기'였는데 이제는 '대화'가 된다. 왜 그런지 왜 그래서는 안되는지 말을 하면 이해한다. 물론 이해한 것을 행동하는 것은 철저하게 다른 이야기하는 게 항상 문제지만...;;

자기의 기분을 말로 풀어 설명하는 일도 잦아졌다.
"나 기분이 안 좋아." "속상해." "화가 났어!" "슬프잖아." "이제 기분이 좋아졌어." "신난다!" "기뻐" 라고 말한다.
그리고 거기에 덧붙여 감정을 다른 이야기로 돌려서 말하기 시작했다.
"엄마가 화내면 나 엄마한테 물을 뿌릴꺼야."
"자꾸 그러면 나 여기서 나가 버릴꺼야."
"엄마가 그러면 나 엄마를 때릴꺼야."
이런 식으로 조건상황에 따른 협박(!)을 하는 것이다. 처음에 저 말을 들었을 때는 많이 놀라고 당황했다. "엄마한테 그런 말 하는 거 아니야!"라며 눈을 부릅뜨며 훈계를 했다. 내가 자꾸 "그러면 간식 안 줄꺼야." "~~하면 이거 치울꺼야."라는 식으로 조건협박을 일삼아서 윤우가 따라하는 건가 싶어 반성도 됐다.

그러다가 <부모와 아이사이> 라는 육아서에서 본 내용에 생각났다.(리뷰 : http://whalesong.tistory.com/361) 아이가 느끼는 감정을 우리가 막을 수는 없으며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에 대해서 훈계하면 아이들은 있는 그대로 감정을 드러내는 일은 나쁜 것이라고 배우게 된다는 것이다. 즉 감정에 대해서가 아니라 감정을 드러내는 파괴적인 행동에 대해서만 제지하는 것이 적절하다는 내용이었다.
이유야 어쨋든간에 윤우는 엄마가 화를 내서 마음이 상했고 이를 저렇게 표현한 것이다. 실제로는 하지도 않을 상상 속의 일일 뿐이었다. 중요한 것은 윤우가 감정을 솔직하게 드러냈다는 점이고 이를 대범하고 유연하게 받아들이는 자세가 필요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 뒤로는 윤우가 저렇게 이야기하면 "아이쿠, 윤우가 화가 났나보네."라며 넘기고 있다.


말주변이 늘수록 예쁜 말도 늘어간다.

어제 미용실에서 머리를 자르고 펌을 했다. 내가 가져간 건 발랄한 구혜선 사진이었는데 미용사분은 왜 이런 머리를 구현하기 어려운지 길게 설명하시며 내 기대치를 한참 낮추시더니 양배추 머리를 만들어주셨다. ;; 머리가 얹혀진 얼굴의 나이값에 따라 동네 아줌마 스타일로 판가름날 수도 있는 아주 위험한 스타일이었다. 이번만큼은 내가 요구하는 것에 대해서 꽤 자세히 설명했기 때문에 후회는 없다. 다만 구혜선과 내 얼굴이 주는 효과의 차이를 절감했을 뿐이다. ㅠ.ㅜ

손으로 머리 모양을 이리저리 자연스럽게 다듬어보면서 집 현관문을 열었다. 남편은 날 보더니 "구혜서~~언?"이러며 비실비실 터지는 웃음을 참지 못한다. -ㅅ-;; 그런데 윤우가 날 보더니 "엄마, 머리 예쁘게 잘랐네!!" 이러는거다. 
오오~~~ 나를 어둠의 구렁텅이에서 구하는 광명의 목소리! 남편이 비웃어도 상관없다. 아들이 인정하지 않는가!!!


욕 한마디로 마음 속 분노와 억울함이 뻥 뚫리기도 한다. 부정적인 감정이 나와 남을 해치기 전에 말로 풀 수 있다면 욕도 그리 나쁘지 않다. 마음에 없는 삐뚫어진 말로 서로를 상처내고 헤집는 것이 진짜 문제이다. 
윤우가 고운 입에 걸맞는 예쁜 말만 하며 살기를 바라지만 그보다 더 소원하는 건 말의 힘을 깨닫는 것이다. 스스로의 감정을 말로 표현하면서 얻는 카타르시스, 생각을 상대에게 전달하며 얻는 공감과 이해의 위로, 자신과의 약속을 소리내어 말했을 때 생기는 구속의 힘까지... 말로 자신을 표현하고 상대방을 보듬는 방법을 알아갔으면 좋겠다. 내가 윤우에게 보여줘야 할 모습도 이런 것임을 잊지 말자.

윤우의 말 한마디에 내 마음은 이리저리 휘둘린다. 짜증의 폭풍 속으로 휘말렸다가 짜릿한 희열을 느끼기도 한다. 앞으로도 나는 윤우의 말에 얼마나 많이 울고 웃게 될까. 그 많은 말과 말의 역사를 지나 결국 말 한 마디 없는 침묵 속에서도 서로의 존재만으로 따뜻한 관계가 되어 있다면 더 바랄 것이 없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