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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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로 사는 이야기/아이들이 자란다

추운 겨울날, 윤우의 방콕 놀이

고래의노래 2012. 3. 10. 08:10
겨울이 끝나간다. 가을 끝에 맺은 뼈아픈 다짐과 함께 시작했던 겨울.
유난히 추웠지만 눈은 적어서 방콕생활이 예상보다 길었던 겨울이었다.

항상 철저하게 준비만 하다가 지쳐서 정작 행동은 뜻뜨미지근해지는 나는 겨울이 시작되기 전 엄마표 미술놀이책을 한권 독파하고 놀이 커리큘럼을 짠 후, 미술놀이 재료 사이트(www.momart.co.kr)에서 기본재료로 불려지는 것들을 대거 구매했었다. 폼폼(폭신한 구슬공), 모루(털달린 철사), 무빙아이(인형눈) 등 유아교육 분야의 또 다른 신세계 용어를 익히게 됐다. ^^;;

결과적으로 말하면 다부진 각오로 구매한 미술재료들은 본연의 역할을 제대로 발휘하지 못했다. 
만 3세가 조금 넘는 아이에게 의도대로 자르고 붙이고 그리는 일은 버거웠다. 윤우가 한 건 '재료탐색' 딱 거기까지였다. 
같은 물건을 놓고 각자 다른 꿈을 꾸었던 동상이몽의 겨울 현장을 기록해 본다. 
 

1. 색깔 폼폼과 점토 주사위 놀이


사진 속의 동글동글 구슬들이 폼폼이다. 러블리 샤방샤방 옷에 장식으로 달려있는 걸 가끔 본 적이 있는데 이게 유아미술 분야에서는 기본재료 중 하나였다. 알록달록한 색깔에 크기도 다양하고 다칠 염려없이 폭신한데다가 이리저리 흩뿌려도 자기들끼리 살짝 붙는 성질이 있기 때문에 청소도 쉽다.
내가 생각한 폼폼의 본래 역할은 종이 크리스마스 트리 장식이었다. 초록색 종이 트리에 빨간색 반짝이 폼폼을 요기저기 붙이면 얼마나 예쁘겠는가! 그런데 윤우가 처음 한 일은 집안 바닥에 폼폼 뿌리기!!!!! ;;; 조그만 구슬공들이 집안 곳곳으로 흩어지는 걸 경악스럽게 바라보다가 겨우 정신을 잡고 "우리 색깔별로 폼폼 모아볼까? ^^;;;"하며 아이를 구슬려 일단 정리는 성공했다.


그런데 10초도 지나지 않아 다시 곰돌이 머리에 폼폼비를 뿌리기 시작..ㅠ.ㅜ 속으로 울면서 모아놓으면 다시 장난감 자동차로 휙~하고 지나가면서 다 흐트러뜨린다. 이렇게 폼폼은 우리집에서 장식재료가 아닌 뿌리기 재료로 겨울내내 쓰여졌다.
점토 주사기는 안에 점토를 넣고 누르면 모양별로 길게 뽑아져 나오는 건데, 점토의 찰기에 따라 다르겠지만 아이의 힘으로 누르기에는 무리다. 게다가 가늘게 국수가닥처럼 뽑아져 나오는 걸 제일 좋아하는데 저게 제일 힘들다. ;;; 점토와 주사기로 혼자 꼼지락거리며 혼자 노는 아이를 상상했지만 언제나 들리는 말은 "엄마, 이것 좀 해줘!". 점토 나오는 구멍 좀 크게 만들어서 아이도 쉽게 할 수 있었으면 좋겠다.


2. 화이트보드 놀이


보드마카로 그림그리는 걸 정말 좋아해서 이걸 붙잡고는 몇십분이나 혼자 놀곤 했다. 벽면 한 쪽에 마련해준 자석화이트보드에서도 곧잘 놀았다. 커다란 그림을 그리기도 하고 숫자, 한글, 영어 자석을 붙이면서 놀기도 했다.
윤우가 제일 좋아하는 그리기 재료는 '보드마카'이다. 휘발성 냄새가 너무 지독해서 화이트 보드에 그렸다가 지울 수 있는 화이트보드용 크레용(크레욜라에서 나온 것이 있다. 이름은 Dry-Erase Crayons)을 사주기도 했지만 보드마카를 대신할 수는 없었다. 심지어 스케치북에까지 보드마카로 그림을 그리길 원하는데 아마도 뚱뚱해서 잡기도 쉽고 힘을 거의 주지 않아도 쉽게 그림을 그릴 수 있기 때문인 것 같다. 그래서 대체품으로 뚱뚱한 수성 싸인펜을 사주고 싶은데 영 파는 곳이 없다. ㅠ.ㅜ

자석 화이트보드는 직접 만들어 붙여 주는 것이 시중에 판대되는 것보다 자리를 덜 차지할 뿐더러 비용도 훨씬 적게 들어간다. 크게 공들이지 않아도 만들 수 있을 뿐더러 '벽에 낙서하기'라는 아이들의 욕구를 충족시켜주는 효과도 있다. ^^

* 화이트자석보드 만들기
재료는 화이트보드 시트지, 함석판 딱 두 개. 여기서 중요한 건 함석판이다. 간혹 고무자석판을 덧대는 경우도 봤는데 고무자석판은 '자석판에 붙이는 용도'이지 그 자체로 자석판이 될 만큼 힘이 크지 않다. 고무에 철가루를 섞어놓은 것이기 때문이다. 함석판이라고 하는 얇은 철판을 뒤에 대고 그 위를 화이트 시트지로 덮어주면 완성! (함석판은 너무 얇지 않으면서도 가위로 잘릴 만큼의 두께를 골라야 한다.) 엄마표 어쩌구 저쩌구 만들어주는 건 나에겐 노력 대비 결과가 너무 미미하니 그 시간에 차라리 놀아주자!(-ㅂ-/)는 생각을 가진 나도 몇 분만에 척! 하고 만들 수가 있었다. 화이트자석보드만큼은 엄마표를 강추!!


3. 설탕 그림 그리기


까만 종이에 물풀로 그림을 그리고 설탕을 뿌린 후 털어내는 놀이. 밀가루로 해도 상관은 없겠지만 설탕이 훨씬 정리가 쉽고, 마침 집에 오래된 묵은 백설탕이 있어서 사용했다.
윤우 힘으로는 풀을 짜면서 그림을 그릴 수가 없었다. 그래서 윤우의 그림은 그저 떡진 덩어리 설탕 뿐. -0- 내 예상이랑 자꾸 빗나가는 미술놀이.


4. 눈 스티커 놀이


구매했던 미술재료 중 윤우가 가장 좋아했던 아이템. 재미있는 걸로 따지면 흔들면 눈알이 돌아가는 무빙아이가 났지만 아이와 즉흥적으로 놀기에는 눈스티커가 훨씬 좋았다. 무빙아이의 뒷면은 글루건이나 딱풀로 일일이 붙여줘야 하는데 이 과정이 번거로와서 무빙아이보다 눈스티커를 즐겨 쓰게 되었다.
윤우는 온갖 인형은 물론 자동차, 그림책 속 동물과 사람까지, 눈이 있는 것이라면 모두 찾아 싹 바꿔놓았다. 재밌고 웃기긴 하지만 가끔 섬뜻하게 보일 때도 있다. ^^;;;


아빠 눈까지 바꿔버렸다. ㅎㅎㅎ


5. 스티커북과 놀이북


결혼하기 전에 나는 아이를 빨리 낳고 싶다는 생각을 하기도 했었는데 그 생각의 뒷편에서 상상했던 것이 아이와 이런 놀이북을 하는 장면이었다. 같은 의미끼리 연결하고 색칠하고 숫자와 글자를 맞추는 놀이책이 어찌나 재미있어 보이던지. 아이와 함께 다정히 앉아 문제를 맞춰보는 내 모습을 상상하면 웃음이 흘러나왔다.

그런데 현실은 전혀 딴판이었다. 시중에 연령별로 할 수 있는 놀이북이 많이 나와있지만 아이 연령에 맞춰 산 놀이북은 때로 윤우에게 너무 버거웠다. 윤우는 가끔 한시간도 넘게 집중했지만 때로는 십분을 넘기지 못했다.
더욱 문제가 되는 건 내 태도였다. 수학책, 한글책같이 학습이 들어있는 놀이북의 경우 윤우에게 내용을 알려주다가 답답해서 언성이 점점 높아졌다. ;;;; 금방 정신을 차리고 마음을 가라앉히고자 노력하긴 했지만 아무리 알려줘도 도돌이표인 아이를 보면서 부드러운 말투와 웃는 표정을 유지하기가 어찌나 어렵던지. 부모가 아이를 가르치는 게 왜 어려운지 알 것 같았다.

결국 수학, 한글같은 학습이 들어간 놀이북은 다시는 사지 않기로 결심했다. 아무데나 마음대로 꾸미는 창의력 스티커북이나 주제별로 나와있는 (요리, 공룡, 자동차 등) 스티커, 색칠북을 사주는 게 나에게도 윤우에게도 좋을 것 같다.


6. 블록 놀이


블록으로 형태를 만드는 시대가 왔다. 첫번째 사진은 엄마 코끼리와 아기 코끼리, 두번째 것은 엄마 기린과 아기 기린. 나름 동물의 특징을 잘 반영해서 만들었다.  
꼭 엄마와 아기 두 개를 짝지어서 만든다. 애니메이션이나 그림책에서 주인공들만 나오면 '엄마는 없나봐...'라며 의아해 한다. 이 시기의 아이들에게 엄마, 아빠가 얼마나 중요한 존재인지 알 수 가 있었다.  



7. 햇빛 반사 놀이


하도 심심해하길래 어느 날 거울을 꺼내와서 햇빛을 천장에 반사시켜 보여주었다. ;;;;; 윤우가 아기였을 때 반사된 햇빛을 이리저리 움직이며 보여주면 좋아하던 모습이 생각났다.


8. 아이패드 그림


아이패드에 그린 그림들. 이제 윤우 세대 아이들에게 '터치 화면'은 기본이 되어 버렸다.

윤우가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하는 일이 두 가지가 있다. 하나는 텔레비전으로 만화영화를 30분 보는 것이고 다른 하나는 아이패드(큰 아빠 붕붕 : 왜 이름이 이렇게 바뀌었는지 지금은 기억도 나지 않는다..)로 노는 것이다. 특히나 아이패드는 아빠가 출근하기 전까지만 사용가능한 아이템이기 때문에 아침에 일어나자 마자 하는 경우가 많다.
원래는 아이폰을 쥐어 주었었는데 점점 식당에서까지 허용하게 되었고 결국 영유아검진 결과 윤우의 눈이 또래보다 안 좋다는 이야기를 들으면서 아이폰은 금지하게 되었다. 대신 아이폰보다 큰 화면인 아이패드를 허용하니 딱 아침시간만 하게 되어서 좋다. 아빠가 출근하면 못하는 건 당연하고 어디든 가지고 다니는 것이 아니니 외부 장소에서 아이패드를 할 일도 없다.



9. 욕실 목욕 놀이


 

욕실에서 엄마는 너그러워진다. 아무리 어질러 놓아도 물로 한 번 싸악~ 뿌리기만 하면 모두 정리가 되니 말이다. 추워서 베란다에서 놀 수 없는 겨울에는 비누방울 놀이도 욕실에서, 분무기 놀이도 욕실에서 했다. 하지만 욕실 놀이 중 당연 으뜸은 물감놀이다. 온 욕실 벽과 욕실 물은 물론이고 자기 몸까지 캔버스가 되는 물감의 도가니탕!!! 저렇게 빨간 물감으로 욕실벽에 무언가 글자라고 쓸 때마다 공포영화에 흔히 나오는 '희생자의 마지막 피의 메세지'가 떠오른다. ㅎㅎ

<우리는 벌거숭이 화가>라는 그림책이 있다. <파도야 놀자>로 유명한 이수지씨가 그림을 그리고 내가 극찬했던 <그림보고 놀자!>시리즈를 지은 문승연씨(http://whalesong.tistory.com/420)가 글을 쓴 책이다. 이 책을 보고 나면 아이들이 꼭 따라한다며 엄마들 사이에서는 아이에게 보여주기에 두려운 책으로 유명한데, 도서관에서 빌려서 보여주니 여지없이 욕실에서 자기 몸에 색칠을 하기 시작했다.
얼굴까지 온통 까만색. 무슨 코만도니..ㅋㅋ 어찌나 까맣게 칠했는지 중요한 부위를 따로 가리지 않아도 안 보일 지경이다.


10. 미술놀이


올해 겨울 윤우가 밀가루 놀이만큼이나 많이 한 놀이가 물감놀이이다. 위 사진처럼 청경채 줄기 단면으로 장미꽃 모양 찍기를 하기도 하고 <까만 크레파스> 책에 나온 것처럼 크레파스 그림 위에 물감을 덧칠해서 반짝반짝 밤하늘과 비밀글씨를 만들어 보기도 했다.
하지만 붓으로 그림을 그리는 것보다 윤우는 물감통에 물감을 엄청 많이 짠 다음 그것을 스케치북에 온통 쏟고 자동차로 그 위를 달리는 것을 좋아했다. 당연히 물감양은 퍽퍽 줄어들었다. ㅠ.ㅜ


얼마전에는 문방구에서 아크릴 물감 튜브를 보더니 사가겠다고 하길래 우리집에도 있다고 했더니 당장 내놓으란다.
언젠가 아크릴화를 그리겠다며 무려 8년 전에 사놓았던 신한 아크릴물감 세트를 내주었다.
그냥 물감이랑 뭐가 다르냐고 하길래 수채물감보다 찐득하고 말라도 안 지워지기 때문에 옷에도 그릴 수 있다고 하니 당연히 옷에 그리겠단다. ^^;;; 헌 옷 위에 몇 번 찍찍 붓칠을 하더니 튜브짜는 재미에 빠져 그림은 안그리고 계속 물감을 짜대기만 했다.
내 아크릴 물감..ㅠ.ㅜ 8년동안이나 빛을 못보더니 너의 소명이 이것이었구나. ;;;;


엄마도 그리라는 권유에 아이와 함께 앉아 한 면씩 나누어 그림을 그렸다.
오랫만에 붓과 펜을 잡고 그림을 그리다보니 작은 전율이 느껴졌다. 이제까지 왜 나는 아이를 내 삶 속에 초대할 생각을 하지 못하고 아이에게 맞추려고만 한걸까. 나를 접고 상대에게만 맞추려다보니 자연히 즐거움없이 끌려다니는 모양새였다. 이런 억지참여를 윤우도 느끼고 있었을 것이다.
하지만 내가 먼저 스케치북을 꺼내 그림을 그렸다면, 그래서 윤우가 "나도! 나도~!"라며 끼어들었다면 어땠을까. 그렇게 순간순간의 생을 즐겁게 보내는 모습을 보여주었다면 더 좋았을 텐데.

집에 있는 아크릴 물감을 꺼내주자 윤우가 "엄마, 집에 왜 아크릴 물감이 있어?" 라고 물었다.
"어...엄마가 그리려고 사 놨었지."
"엄마가?????" (물음표 백만개 표정이다.)
"응...엄마도 그림 그리는 거... 좋아해..."
이렇게 대답하는데 어찌나 민망하던지... 이제까지 한번도 즐겁게 그림을 그리는 모습을 보여준 적이 없으니 말이다. 행동없는 삶의 공허함이 내 머리를 울렸다.


이제 봄이 온다. 우리의 마음은 항상 2월의 달력의 찢으며 미리 봄을 시작하지만 삼월의 눈과 바람은 겨울의 끝자락을 쉽게 놓지 않을 것이다. 그래서 삼월은 머리와 몸이 항상 삐그덕 거리는 달이다. 달력의 숫자는 봄을 가리키지만 문을 열고 나가면 찬 바람에 옷을 덧입게 되니 말이다. 
나도 마음과 몸이 엇나갔던 내 인생의 삼월을 지나 춤추고 노래하듯 인생을 살아야겠다. 그리고 그 현장에 아이를 초대하겠다. 내가 춤추고 노래하다 보면 윤우도 덩달아 리듬을 타겠지. 이게 꽃피는 봄에 시작할 '엄마표 놀이'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