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마음이 아니라 눈으로, 귀로, 온 몸으로... 본문
배경은 사람들이 북적이는 시내 한복판.
키 작은 나는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다가 엄마의 손을 찾아 더듬거리며 나아간다.
드이어 엄마 손을 잡았는데,
"아유, 귀찮아!"
엄마가 내 손을 냉정하게 뿌리친다. 놀랐고 슬펐지만 슬픔 속에 멍하니 남겨질 여유가 없었다.
내 감정에 솔직해질 그 찰라 속에 엄마가 저 군중 속으로 사라져 나는 고아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더 컸기 때문이다.
한, 6살이나 7살쯤 되었을까? 나에게는 이 순간이 내 생애에서 가장 '처절하게 거부당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가끔 나는 이 기억을 꺼내 엄마의 죄책감을 자극하고는 했다. 어떻게 자기 자식 손을 저렇게 '팩'하니 내팽게칠 수가 있었을까. 아무리 되돌아감아 재생을 해보아도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내가 기억못하는, 기억에서 잘라버린 지점에 엄마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내가 어마무지한 생떼를 부렸을 수도 있고 갈 길이 바쁘거나 약속에 늦었는데 이 곳 저 곳에 관심이 분산되어서 나를 잡아끌던 엄마가 화가 났을 수도 있다.
어쨋거나 저 상황은 지극히 '아이답게' 예측불가능한 행동을 했을 나와 그것을 대범하게 넘길 수 없었던 민감한 상황의 엄마가 만들어낸 조합일 것이다. 물론 백점짜리 엄마의 대응은 아니었지만 저 냉정함은 내가 엄마에게 쏟아부었을 온갖 짜증과 버릇없는 행동들을 백번 품었을 엄마가 저지른 한 번의 실수였으리라.
부모가 되어서야 자신의 부모를 이해하게 된다는 건 헛된 말이 아니다. 그 동안 나는 저 당시 엄마가 어떤 상황이었을지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잠들기 전에 나의 팔꿈치를 찾는 윤우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쳐 보고 나서야, 훌쩍훌쩍 우는 윤우를 차가운 눈으로 팔짱끼고 바라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 때의 엄마가 생각났다.
문제는 이것이다. 항상 깨달음은 늦고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충격적 장면'만이 연속 재생된다. 앞 뒤로 상황을 돌려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오로지 보이는 것은 '나의 상처'뿐이다. 그리고 스스로 그 상처를 어루만지기 전에는 오직 상처가 덧나도록 헤집을 뿐인거다. 중요한 건 어쨋든 그것이 '상처'라는 것.
요즈음 윤우가 나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거다.
"엄마, 화났어?"
며칠 전에도 묻길래 "아니, 화 안났는데." 했더니
"화 날려고 해?"
라고 한다. 저 때는 푸핫 웃음이 나왔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너무 슬펐다. 윤우에게 엄마의 마음 상태라는 건 '화났음 또는 화날려고 함' 이렇게 두 가지로만 정의되는 것일까.
또 이런 말도 했다.
"윤우는 엄마가 화낼 때만 울어. 아빠가 화내면 (소매로 눈을 훔치며) 이렇게 하기만 해."
- 엄마가 화낼 때 더 무서워?
"응, 엄마가 눈이 더 뾰족해지잖아."
- 그건 아빠 눈이 그냥 쳐져서 그런 거거든! -ㅁ-+
이번 대화도 푸하하 웃음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병원을 갔다 돌아와보니 윤우가 화이트보드에 이런 그림을 그려 놓았다.
사건인즉슨, 낮잠을 자고 일어나 한껏 뿌루퉁해진 윤우가 보드북에 그림을 그리려다가 예전 그림이 지워지지 않은 채로 있자 나보고 지우라며 온갖 짜증을 냈었다. 직접 지우라고 했는데 더 난리를 부려서 결국 벅벅 지워주었는데, 이번에는 옆에서 같이 그림을 그리라고 하길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안고 '짜증쟁이 윤우' 얼굴을 그렸던 거다.
위 그림은 내가 그렸던 그 '짜증쟁이 윤우'를 따라그린 건데, 위 아래 그림이 똑같은 걸로 봐서 '짜증쟁이 윤우'를 두 명 그린 게 아닐까 생각되지만 화백이 직접 '아래 것은 화내는 엄마'라고 설명을 해주니 반박할 수는 없게 되었다. -_-;
새해 들어 아이에게 버럭대지 않고 속으로 불덩이를 삼키거나 몰래 혼잣말로 윤우욕을 하거나 하는데(;;;) 윤우에게 엄마의 대표적 이미지가 '미소 엄마'로 되려면 아직 한참은 멀었나 보다. 엄마의 입장에서야 내 아이니까 당연히 사랑으로 보살피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이가 강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게도 오로지 표현의 문제이다.
밤잠을 재우려고 윤우와 함께 침대에 누웠는데 윤우가 내 품에 파고 들며 얘기한다.
"엄마, 꼭 안아줘.
부러질만큼, 터질만큼, 사라질만큼..."
엄마한테 사랑받는 걸 확인받는 걸 넘어 자기가 사라져버려도 좋을 만큼 엄마와 한 몸이고 싶은 아이. 가끔 아이들은 일부러 뻔히 아는 말썽을 피우며 엄마들을 시험하고는 한다. "이래도 저를 사랑하세요?"라고.
엄마들의 마음은 항상 진심이기에 중요한 것은 진심이 아니라 표현이다. 한순간의 냉정함과 분노의 칼날에 배여 윤우의 마음에 나와 같은 상처가 생기지 않게, 나같이 오랫동안 상처를 끌어안고 헤집어 보지 않게 어떤 상황에서도 따뜻함을 유지하는 것. 물고 빨고 안고 사랑을 이야기해 주는 것. 마음이 아니라 눈으로, 귀로, 온 몸으로 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그날 밤 나는 윤우를 힘껏, 아주 힘껏 안아 주었다.
키 작은 나는 사람들에게 이리저리 치이다가 엄마의 손을 찾아 더듬거리며 나아간다.
드이어 엄마 손을 잡았는데,
"아유, 귀찮아!"
엄마가 내 손을 냉정하게 뿌리친다. 놀랐고 슬펐지만 슬픔 속에 멍하니 남겨질 여유가 없었다.
내 감정에 솔직해질 그 찰라 속에 엄마가 저 군중 속으로 사라져 나는 고아가 되어버릴지도 모른다는 공포가 더 컸기 때문이다.
한, 6살이나 7살쯤 되었을까? 나에게는 이 순간이 내 생애에서 가장 '처절하게 거부당한' 기억으로 남아있다. 가끔 나는 이 기억을 꺼내 엄마의 죄책감을 자극하고는 했다. 어떻게 자기 자식 손을 저렇게 '팩'하니 내팽게칠 수가 있었을까. 아무리 되돌아감아 재생을 해보아도 엄마를 이해할 수가 없었다.
그런데 이제 곰곰히 생각해보게 된다.
그 전에 무슨 일이 있었던 게 아닐까? 내가 기억못하는, 기억에서 잘라버린 지점에 엄마가 그럴 수 밖에 없었던 이유가 있었을 수도 있다. 내가 어마무지한 생떼를 부렸을 수도 있고 갈 길이 바쁘거나 약속에 늦었는데 이 곳 저 곳에 관심이 분산되어서 나를 잡아끌던 엄마가 화가 났을 수도 있다.
어쨋거나 저 상황은 지극히 '아이답게' 예측불가능한 행동을 했을 나와 그것을 대범하게 넘길 수 없었던 민감한 상황의 엄마가 만들어낸 조합일 것이다. 물론 백점짜리 엄마의 대응은 아니었지만 저 냉정함은 내가 엄마에게 쏟아부었을 온갖 짜증과 버릇없는 행동들을 백번 품었을 엄마가 저지른 한 번의 실수였으리라.
부모가 되어서야 자신의 부모를 이해하게 된다는 건 헛된 말이 아니다. 그 동안 나는 저 당시 엄마가 어떤 상황이었을지 조금도 생각해 본 적이 없다. 잠들기 전에 나의 팔꿈치를 찾는 윤우의 손을 매몰차게 뿌리쳐 보고 나서야, 훌쩍훌쩍 우는 윤우를 차가운 눈으로 팔짱끼고 바라보고 나서야 비로소 그 때의 엄마가 생각났다.
문제는 이것이다. 항상 깨달음은 늦고 어른이 되기 전까지는 '충격적 장면'만이 연속 재생된다. 앞 뒤로 상황을 돌려볼 마음의 여유가 없다. 오로지 보이는 것은 '나의 상처'뿐이다. 그리고 스스로 그 상처를 어루만지기 전에는 오직 상처가 덧나도록 헤집을 뿐인거다. 중요한 건 어쨋든 그것이 '상처'라는 것.
요즈음 윤우가 나에게 가장 많이 하는 말은 이거다.
"엄마, 화났어?"
며칠 전에도 묻길래 "아니, 화 안났는데." 했더니
"화 날려고 해?"
라고 한다. 저 때는 푸핫 웃음이 나왔는데, 곰곰히 생각해보니 너무 슬펐다. 윤우에게 엄마의 마음 상태라는 건 '화났음 또는 화날려고 함' 이렇게 두 가지로만 정의되는 것일까.
또 이런 말도 했다.
"윤우는 엄마가 화낼 때만 울어. 아빠가 화내면 (소매로 눈을 훔치며) 이렇게 하기만 해."
- 엄마가 화낼 때 더 무서워?
"응, 엄마가 눈이 더 뾰족해지잖아."
- 그건 아빠 눈이 그냥 쳐져서 그런 거거든! -ㅁ-+
이번 대화도 푸하하 웃음으로 마무리 되었지만, 병원을 갔다 돌아와보니 윤우가 화이트보드에 이런 그림을 그려 놓았다.
"엄마, (오른쪽 그림들을 가리키며) 사탕들이야, 하트사탕이랑 빙글빙글 사탕도 있어!"
- 우와~ 진짜네. 맛있겠다. (왼쪽 그림을 손으로 짚으며) 이건 뭘 그린거야?
"응, 그건 엄마 눈이 뽀족해진거야~ 위에 건 윤우가 '이거 지워~'하면서 짜증내는거고 밑에 거는 엄마가 화난 거야."
사건인즉슨, 낮잠을 자고 일어나 한껏 뿌루퉁해진 윤우가 보드북에 그림을 그리려다가 예전 그림이 지워지지 않은 채로 있자 나보고 지우라며 온갖 짜증을 냈었다. 직접 지우라고 했는데 더 난리를 부려서 결국 벅벅 지워주었는데, 이번에는 옆에서 같이 그림을 그리라고 하길래 부글부글 끓어오르는 마음을 안고 '짜증쟁이 윤우' 얼굴을 그렸던 거다.
위 그림은 내가 그렸던 그 '짜증쟁이 윤우'를 따라그린 건데, 위 아래 그림이 똑같은 걸로 봐서 '짜증쟁이 윤우'를 두 명 그린 게 아닐까 생각되지만 화백이 직접 '아래 것은 화내는 엄마'라고 설명을 해주니 반박할 수는 없게 되었다. -_-;
새해 들어 아이에게 버럭대지 않고 속으로 불덩이를 삼키거나 몰래 혼잣말로 윤우욕을 하거나 하는데(;;;) 윤우에게 엄마의 대표적 이미지가 '미소 엄마'로 되려면 아직 한참은 멀었나 보다. 엄마의 입장에서야 내 아이니까 당연히 사랑으로 보살피고 있다고 생각하지만 아이가 강하게 받아들이는 것은 당연하게도 오로지 표현의 문제이다.
밤잠을 재우려고 윤우와 함께 침대에 누웠는데 윤우가 내 품에 파고 들며 얘기한다.
"엄마, 꼭 안아줘.
부러질만큼, 터질만큼, 사라질만큼..."
엄마한테 사랑받는 걸 확인받는 걸 넘어 자기가 사라져버려도 좋을 만큼 엄마와 한 몸이고 싶은 아이. 가끔 아이들은 일부러 뻔히 아는 말썽을 피우며 엄마들을 시험하고는 한다. "이래도 저를 사랑하세요?"라고.
엄마들의 마음은 항상 진심이기에 중요한 것은 진심이 아니라 표현이다. 한순간의 냉정함과 분노의 칼날에 배여 윤우의 마음에 나와 같은 상처가 생기지 않게, 나같이 오랫동안 상처를 끌어안고 헤집어 보지 않게 어떤 상황에서도 따뜻함을 유지하는 것. 물고 빨고 안고 사랑을 이야기해 주는 것. 마음이 아니라 눈으로, 귀로, 온 몸으로 엄마의 사랑을 느낄 수 있게...
그날 밤 나는 윤우를 힘껏, 아주 힘껏 안아 주었다.
'엄마로 사는 이야기 > 아이들이 자란다' 카테고리의 다른 글
40개월 남자아이 훈육하기 - 훈육의 비법을 찾아서 (4) | 2012.02.13 |
---|---|
공감이 아니라 맞장구~ 액션까지 있어야 진짜다! (2) | 2012.01.22 |
윤우의 방콕놀이 - 밀가루편 (2) | 2012.01.06 |
우리 둘의 사랑 이야기 (6) | 2011.12.04 |
미운 37개월 - 윤우의 성장 (6) | 2011.11.16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