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7년 주기로 돌아보는 전기 작업과 그림책 만들기 본문
10월부터 사통이네 책마당에서 진행되었던 <삶읽기와 그림책 만들기> 모임에 참여했다. 발도르프에서 이야기하는 7년 주기에 맞추어 자신의 인생을 돌아보고, 풀어내고 싶은 이야기를 그림책으로 만들어보는 모임이다. 7년마다 사람이 신체적, 영적으로 변곡점을 맞게 된다는 이야기는 일견 신비주의적으로 보이지만 성장 발달의 굵직한 단계들을 돌아보면 대강 맞아들어가는 면이 있다. 내 인생을 살펴봐도 28살에 결혼하고, 35살에 막둥이를 보냈으니 우연처럼 맞아떨어지는 부분이 있다. 인생을 바라보고 해석하는 여러 방법들 중 발도르프의 7년 주기 전기작업을 해보고 싶다고 생각했는데 마침 기회가 생겨서 참여하게 된 것이다.
첫 시간에는 같은 반 엄마들이 너무 많아서 과연 솔직한 이야기가 가능할까 걱정이 되었다. 나는 나의 이야기를 하는 것이 그닥 힘들지는 않지만 본인들의 이야기를 하는 것을 떠나서 내 이야기를 듣는 것조차 불편할 수 있는 관계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만약 그런 분위기가 된다면 나 또한 내 이야기를 맘 편히 꺼내놓지는 못할테니. 그리고 선생님께서 명쾌하고 분명하게 이끌어주시는 스타일이 아니셨다. 사람들이 대부분 위축되어 있고 모임지기마저 이를 이끌어낼 수 있는 힘이 없는 상황이라면 지지부진하게 모임이 흘러갈 수도 있다. 이렇게까지 생각이 미치자 기대와 다른 이 모든 상황들이(아직 일어나지도 않은 내가 만든 상황) 짜증나기 시작했다.
두번째 모임을 갈까말까 망설이다가 계속 참여해보기로 했다. 이제까지 내가 살며 깨달은 것은 불편한 상황 속에서도 배움이 일어난다는 것이었다. 내 감정은 내 배움이나 깨달음과는 별개이다. 마침 두번째 모임 전에 나는 나의 고향을 다녀오게 되었다. 친정 부모님과 친구들을 만난 후에 집에 돌아가려다가 아이들에게 "엄마 어렸을 때 살던 동네 가보자!"고 했다. 35년된 오래된 주공아파트는 아직도 그 모습 그대로 있었다. 이제 재개발이 결정되었는지 많이 이주해서 실제로 거주하는 분들은 많이 없는 듯 했다. 생기가 빠진 그 지역을 보는 게 슬프지는 않았다. 다만 그 시절의 내 나이인 나의 아이들이 그 공간에서 뛰어노는 모습을 보니, 과거의 나도 불러내어 함께 놀게 해주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집으로 돌아와 그 동네에서 찍은 사진을 보면서 마치 그 시절의 나에게 이야기하듯 가만히 혼잣말을 해보았다. "무섭지? 다 지나갈꺼야..미래의 네가 널 응원해.."라고 속삭이는데 하염없이 눈물이 나왔다.
두번째 모임에서 이 이야기를 나누는데도 또 눈물이 나왔다. 그 이후 모임에서 나는 몇몇 분들의 이야기에 격하게 감정이 올라와 흐느끼곤 했는데 어떤 이야기에 그랬는지 곰곰히 생각해보니 '인정받지 못했던 어린 시절의 감정'에 대한 것, '낮게 다가와준 믿음직한 어른'에 대한 이야기 그리고 '내 가치를 내 스스로 하찮게 여겼던 순간'의 이야기들이었다. 나는 어린 시절 경험했던 존재가 뿌리째 흔들리는 두려움과 공포에 대해 믿음직한 어른이 받아주고 인정해주길 원했던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곧 내가 가치로운 존재라는 증명과도 같았으므로. 이 경험과 깨달음을 통해 나는 많은 사람이 모여 함께 이야기한다는 것의 힘을 다시 한 번 느끼게 되었다. 이번에는 '이야기'보다 '듣기'를 통해서.
내가 어른으로 변신하는 요술소녀 캐릭터들에 그렇게 무섭게 몰입하면서 마법의 힘을 얻기를 간절히 바랬던 것도 결국 나의 '어린' 상황을 벗어나고 싶은 마음을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들었다. 나는 '어른'이라는 개념에 집중해보기로 했다. 또 그림 작업에 대한 영감을 떠올릴 수 있을까 싶어서 좋은 어른에 대한 드라마라는 '나의 아저씨'를 찾아서 보기 시작했다.
그리고 옛 동네에서 현재의 내가 과거의 나를 만나 그런 믿음직한 어른이 되어주는 이야기로 그림책 작업을 하기로 마음먹었다. 스토리보드 작업을 하고 러프 스케치를 해보는데 이야기가 구체적이니 만큼 그림도 구체적으로 그려졌다. 그런데 뭔가 자꾸 걸리는 느낌이 들었다. 스토리가 분명하고 엔딩도 확실하여 후련할 법도 한데 오히려 뭔가가 풀리지 않는 기분이 드는 것이다. 왜 이러한 감정이 드는지 알 수 없었는데 다른 모임벗의 그림책 작업물을 보니 무언가 실마리가 잡혔다. 습식 수채화로 할머니에 대한 이야기를 그린 그림책이었는데 명확한 사건 전개가 있는 스토리가 아니라 몇몇 에피소드가 화면 가득한 색들과 함께 펼쳐지는데 보고 있기만 해도 감동이 밀려왔다. 마음을 울리는 것들은 스토리라기 보다 표현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머리가 아닌 가슴으로의 작업이 필요했던 것이다.
또한 나와 비슷한 결의 어린 시절에 대해 다른 모임벗은 전혀 다른 감정으로 반응하고 있었고 그 분도 오로지 색을 통해서만 특정 대상과 감정에 대해 표현하고 계셨다. 어린 시절을 바라보는 시선에 있어서 그 모임벗들과 나는 분명히 차이가 있었다. 그 분들은 그 시절 강렬했던 인물에 대한 '이해'에 집중한 반면 나는 특정 인물을 바라보는 틀은 이미 정해놓고 그 관계로부터의 '나'에 집중하고 있었던 것. 머리로는 이해해도 가슴으로는 받아들이지 못했고 상대에 대한 이해보다 나에 대한 연민의 단계에서 헤어나오지 못한 것 같다. 그것이 아직 나의 단계인 것이다.
물론 그 분들이 집중한 '대상'은 그 분들께 직접적으로 상처을 입히거나 부정적인 영향을 준 사람이라기 보다 오히려 매우 따뜻하고 포근하고 하지만 어느 순간은 이해할 수 없었던 사람이었다. 내가 강렬한 감정으로 바라보는 대상과는 다르긴 하다. 하지만 다른 모임벗의 그림작업은 내가 나의 어린시절 상처를 치유하려고 했던 방식을 새롭게 바라볼 수 있게 해주었다. 그것은 오랫동안 매우 고정적인 시선 안에 갇혀있었다. 나는 나를 좀 더 들여다보아야겠다고 생각했다. 어린 시절에 대해 강렬한 두려움과 공포 뿐 아니라 그 시절 내가 느꼈던 다양한 감정들을 살펴보는 건 어떨까? 그리고 이 감정들을 스토리 상의 어떤 캐릭터가 아니라 그림책 작업 이나 화면 자체 안에서 인정해주는 작업을 해보면 어떨까. 어린시절의 좋았던 기억을 꺼내 인정하는 것 자체가 나에게는 숙제인 것 같다. '불행한 어린 시절'이라는 틀에게 깨어나 나를 있는 그대로 보기.
이렇게 여러 변곡점들을 통과한 전기작업으로의 그림책 작업은 아직도 진행중이다. 2019년 첫 마무리 활동으로 그림책이 완성되도록 해봐야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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