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이기적 유전자> 핑크빛 이기주의자들 본문
이기적 유전자 - 리처드 도킨스 지음, 홍영남.이상임 옮김/을유문화사 |
<코스모스>를 읽으며 내가 충격을 받았던 부분 중 하나는 '진화'의 방향성에는 어떠한 가치도 없다는 사실이었다. 말하자면 긍정적인 방향, 부정적인 방향이라는 것은 인류가 과거를 곱아보고 현재를 돌아보면서 부여하는 가치이지, 진화 자체에 그러한 방향성은 없다는 것이다. 기린의 목이 길어진 것이 좋은 것인가? 호랑이 몸에 줄무늬가 생기고 코끼리 코가 길어진 것이 도대체 어떤 관점에서 과거보다 더 나은 변화란 말인가?
예를 들어 현재 문제가 되고 있는 환경오염이라는 것도 인간의 입장에서 보았을 때 '문제'인 것이지, 지구의 입장에서는 유구한 세월동안 겪어왔던 격한 변화의 일부분일 뿐인 것이다. 환경오염이 심각해져서 인류가 멸망하더라도 지구는 그러거나 말거나 변함없이 태양주위를 돌 것이며, 그 변화를 뚫고 또 어떤 생명은 살아남을 것이다. 그 생명은 우리가 지금 바꿔야 한다고 이야기하는 미세먼지 가득한 하늘과 꾸덕한 오수를 기꺼이 자신의 환경으로 채택한 종들일 것이며 그들에게 환경오염이란 없고 그 자체의 환경만이 존재할 따름이다.
진화라는 것도 우리는 뇌용량이 커지고 감정제어가 가능한 대뇌피질이 생겨나면서 무언가 좋은 방향으로 변화되어 온 것처럼 이야기하지만, 그것이 도대체 누구에게 좋은 것이란 말인가? 진화는 변화인 뿐, 발전이 아니라는 생각을 하다보니 세상을 보는 관점이 확 달라지는 것 같았다. 진화는 단지 자연선택에 의한 살아남기, 그 이상도 그 이하도 아닌 것이다. 리처드 도킨슨은 단 한마디로 이것을 압축했다. "진화는 미래를 보지 못한다."
그리고 자연스럽게 질문이 하나 떠올랐다. 다시금 인간의 입장으로 돌아가서, 지금 우리가 바라는 것은 모든 생명이 평등하게 존중되고 서로의 존엄을 인정하고 협력하는 공동체 사회를 꾸리는 것이다. 자연선택이라는 냉정한 시장 속에서 인류의 진화는 과연 저 방향대로 흐를 수 있을까? 만약 자연스럽게 흐르는 방향이 저 방향이 아니라면 인간이 의도적으로, 의식적으로 저 방향을 바꿀 수는 있는걸까?
* 유전자의 이기주의에 대한 도킨슨의 변론
리처드 도킨슨은 우리가 오랫동안 '개체'의 본능으로 여겨왔던 살아남기 위한 몸부림을 '유전자' 단위로 끌어내린다. 저자의 이 가설은 수많은 공격을 받았다. 우리의 몸이 능동성이 결여된 유전자의 운반자일 뿐이라는데 사람들은 충격을 받았고 우리가 가치있게 생각하는 이타적 행동들이 '나부터 살자'는 이기주의적 입장에서 촉발되었다는 것을 받아들이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게다가 이 가설은 유전자가 아직 연구중이기 때문에 몇몇 논리적 증거에도 불구하고 가설의 입장에 있는 상태였고, '만약~ 이렇게 생각한다면 모든 형상이 딱 들어맞는다.'라는 논리만으로는 사람들의 충격을 깨기가 힘들었기 때문이다.
저자는 이러한 반발에 꽤나 민감하게 대응하면서 이론은 그 자체로 어떠한 가치를 가진 것이 아니며 도덕성의 문제는 여기서 고려할 사항이 아님을, 그래서 자신도 이타주의는 우리가 함께 아이들에게 가르쳐야 할 것음을 강조한다.
저자의 주장은 꽤나 명확하다.
- 모든 생명은 유전자 복제라는 숙명을 위해 작동한다. 생김새와 행동, 전략에 이르기까지 개체의 모든 삶을 아우른다.
- 신체라는 것은 '자기복제'라는 유전자의 이기적인 목적을 향한 운반자에 불과하다.
- 그 이기적인 행위는 이타적으로 보여지는 행위 안에도 깊이 내재되어 있으며 본질적으로 모든 행위는 유전자의 이기성에 기반한다.
- 유전자의 이기성은 하나의 공동체라고 여겨지는 암수간, 세대간, 개체간에도 경쟁상황을 일으킨다.
- 혈연에게 호의적으로 대하는 이유 또한 유전자의 복제, 전달 목적에서 벗어나지 않으며 유전자를 공유하는 확률을 나타내는 근연도 값으로 이를 단순화해 설명할 수 있다. 유전자 복제의 가능성이 높은 방향으로 배려가 흐른다.
위와 같은 주장을 읽고 있자니 아래와 같은 질문이 떠올랐다.
- 자신보다 생식능력이 떨어지는 부모를 공양하는 까마귀의 행동은 어떻게 설명할 수 있을까?
- 유전자의 복제를 포기하고 돌고래와 고래들이 해변가로 몰려와 자살하는 듯한 행동은 왜 일어날까?
- 자신의 유전자와 전혀 연결되어 있지 않은 배려동물과 화분을 키우는 이유는 무엇일까?
한 번 생각해봄직한 문제다.
* 관계에 대한 유전자적인 해석
누가 더 쉽게 유전자 복제에 성공할 것인가를 두고 벌어지는 암수의 경쟁과 그에 대한 해석은 사회 속에서 우리가 겪는 갈등상황과 오버랩되면서 읽는 내내 흥미진진했다. "암컷이란 착취당하는 성이며, 착취의 근본적인 진화적 근거는 난자가 정자보다 크다는 데 있다." 라는 부분을 읽었을 때는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언급된 생식의 사회화를 주장했던 급진적 페미니스트들의 주장이 떠오르기도 했다.
가족계획에 대해서도 저자는 색다른 주장을 한다.
"어떤 암컷이 기근이 예측되는 확실한 증거에 접했을 때 스스로 자기의 출생률을 감소시키는 것은 그 암컷 자신의 이기적 이익을 위해서다. 살아남는 새끼의 수를 보전하기 위함."
"개개의 부모동물은 가족계획을 실행하는데, 이것은 공공의 이익을 위해서라기보다는 오히려 자기 자손의 출생률을 최적화하기 위해서이다."
한국의 낮은 출생율에 대해 여러 분석들이 난무하지만, 저자의 주장을 근거로 해석했을 때 우리는 한국사회가 환경적으로 대단히 열약한 곳이며 그러므로 이 땅에서 출생률이 감소하는 것은 진화적으로 당연하다고 하겠다.
암수간의 경쟁에 대한 장에서 저자가 마지막에 질문으로 남겨놓은 부분이 있는데, '왜 인간만 여성이 치장을 하는가?'하는 것이었다. 동물의 세계에서 화려한 쪽은 수컷이고 선택하는 쪽은 암컷이다. 그런데 인간만이 암컷이 치장을 한다. 이것은 무슨 이유때문일까? 모임벗들과 이야기를 나누는데 인간 세계에서는 자식을 양육할 수 있는 '자본'을 남성만이 점유하던 시기가 있었고 그 시기를 거치며 여성들이 선택받기 위해 치장을 하기 시작한 게 아니겠느냐는 해석이 나왔다. 동물 세계에서처럼 아니면 원시 수렵채집 시대처럼 자원이 모두에게 공평하지 않은 상황이라는 것이 그러한 변화를 가져왔을 수 있겠다 싶다.
배우자 선택조건에 대해 진화적 해석 부분을 읽을 때는 끌리는 이성에게서 자신의 아니마, 아니무스 상을 발견하고자 하는 것이라는 융의 이론이 떠오르면서 흥미로웠다. 자연이, 게다가 복잡하기 그지없는 인간사가 단 하나의 이론으로 설명 가능할리 만무하니 여러 지식의 선구자들이 내어놓은 해석들을 이러저리 들춰보며 대입해보는 재미가 있었다.
* 따뜻한 마음과 관대함이 승리한다!
개체의 형상, 행동 등 개체가 발현하는 모든 것들이 유전자의 복제를 위한 충실한 업무라는 이야기를 내내 들으면서 무력감을 느낄즈음(아마도 이 책을 읽고 우울해져서 울었다는 여고생은 여기까지만 읽은 게 아닐까) 밈과 죄수의 딜레마 게임 이야기가 나오면서 다시 생기를 찾게 되었다.
저자는 아래와 같이 주장한다.
- 상대방이라는 환경을 대하는 전략 중 진화적으로 가장 안정한 전략을 ESS(Evolutionary Stable Strategy)라고 하는데 컴퓨터 시뮬레이션과 논리전개를 통해 알아본 ESS는 '보복자'로, 먼저 호의를 배푼 후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태도를 바꾸는 전략이었다.
- 인간은 가장 복잡한 개체로, 유전자와는 또 다른, 문화라는 새로운 복제자를 만들어냈으며 이를 밈(meme)으로 칭하기로 하자.
- 인간은 두뇌의 비약적 발전으로 유전자의 흐름에 반할 수 있는 유일한 종이다.
유전자가 보다 수월한 복제를 위해 채택한 진화과정 중 하나가 '뇌'를 만들어낸 것이었다. 이것은 미래를 예측하여 현 상황에 대한 판단을 할 수 있도록 하였고 뇌의 역할이 다른 종에 비해 비대해진 인류에게 이것은 유전자에 대항하는 '무기'가 되었다. 인류가 뇌를 통해 만들어낸 독특한 생활양식인 문화가 유전자처럼 자기복제 과정을 거치며 이 문화복제자를 저자는 유전자와 대립되는 단어로 '밈'이라 이름붙였다. 설화와 신화처럼 오랜시간동안 구정되어 전해진 이야기들을 그러한 밈으로 볼 수 있을 것이다.
한 개체가 경쟁구도 속에 있는 또 다른 개체에 대해 반응하는 프로그래밍된 행동방침을 '전략'이라고 하고 진화적으로 안정한 전략을 ESS(Evolutionary Stable Strategy)라고 한다. ESS라는 것은 다른 전략이 침범해도 그룹 안에서 해당 전략을 선택하는 비율이 변하지 않음을 의미한다. 즉 해당 전략으로 살아가는 개체수가 최대수를 유지한다는 것이다.
인간을 대상으로 했을 때 인간사회에서는 어떤 ESS가 도출될 수 있을까? 그리고 현재 우리 사회의 ESS란 어떤 것일까?
학자들은 죄수의 딜레마 게임을 기반으로 해서 협력과 배신의 전략이 어떻게 ESS에 이르는지 연구를 진행했다.
상대방에게 호의적으로 협력할 것인가 배신할 것인가의 선택에 있어서 컴퓨터 시뮬레이션 결과 ESS로 결정된 것은 '이에는 이, 눈에는 눈'(Tit for Tat : 줄여서 TFT)이었다. 즉, 먼저 호의적으로 다가가되 상대방의 반응에 따라 상대방이 배신을 하면 나도 배신하고 상대방이 호의적으로 반응하면 나도 다시 호의적으로 나오는 전략이 안정적인 전략이 되었다는 것이다. 즉, 승리하는 전략은 첫 호의라는 '좋은 마음씨'와 '배신에 대한 빠른 처벌과 망각'이라는 '관대함'이었다.
다만 조건이 있었다. 이 시뮬레이션은 1천세대를 경과한 후에야 그룹 안에서의 전략 비율이 변하지 않으면서 안정상태에 도달하게 된 것이다. 즉, 아주 긴 시간이 필요하다. 또 상호신뢰를 위한 '예측가능성'과 '의식'도 중요하다. 예측가능성은 '배신하면 처벌을 받게 되리라는 것을 아는 것'이고 의식은 그러한 점에 대해 끊임없이 상기시켜주는 표현들이다. 책에서 예로 든 것은 2차대전 당시 서로 '팽팽한 평화'를 유지하는 영국군과 독일군 사이에서 행해졌던 '의식적인 표적사격'이었다. 마지막 조건은 전략이 행해지는 상황이 '비영합 게임' 즉 논제로섬 게임이어야 한다는 것이다. 네가 이기면 반드시 내가 지고, 네가 차지하면 반드시 나는 아무것도 가질 수 없는 흑백결과만이 도출되는 영합게임이 아닌, 모두가 이기고, 또는 모두가 패배하고, 아무도 갖지 못하는 등 비영합 게임의 상황에서 TFT가 ESS가 된다는 것이다. 영합 게임과 비영합 게임이라는 것은 사실 인식의 문제일 때가 많다. 상황을 영합게임으로 몰아가는 제 3자를 알아채지 못하고 대부분 바로 너와 나의 대치 상황을 쉽게 받아들인다는 것이다. 바로 눈 앞에 어떤 갈등상황이 발생했을 때 양 쪽의 근본 니즈를 살펴보면 중간의 합의점을 발견할 수 있다. 요즈음 드는 '회복적 서클' 강의 내용이 떠오르기도 했다.
* 핑크빛 이기주의자들
이 챕터에서 저자는 처음이자 마지막으로 희망적인 메세지를 전한다.
"지구에서는 우리 인간만이 유일하게 이기적인 자기 복제자의 폭정에 반역할 수 있다. 우리의 의식적인 선견지명, 즉 상상력을 통해 장래의 일을 모의 실험하는 능력이 맹목적인 자기 복제자들의 이기성으로 인한 최악의 상황에서 우리를 구해 줄 것이다."
저자는 복지국가란 지금까지 동물계에 나타난 이타적 시스템 중 아마도 가장 위대하며 또한 극히 부자연스러운 실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사회적 전략을 세워야하고 그것이 시스템을 만드는 작업이라고 한다면 정치는 우리가 유전자를 미래까지 전할 수 있느냐 마느냐를 가늠하는 역할을 할 것이다. 그렇다면 어떠한 정치를 해야하며 어떤 정치인이 우리에게 필요한가. 최근의 조기 대선 상황과 맞물려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대연정'이라는 단어로 이슈를 몰고온 후보도 있었고, '적폐청산'을 구호로 내건 후보도 있었다.
저자는 "대부분의 국회의원들은 법조인 출신으로 영합 게임의 심성을 가지고 있다."고 이야기했다.
정치인은 여러 생각들을 조율하고 타협하는 사람들이며 행정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갈등을 '비영합 게임'으로 전환하여 승승의 통합을 만들 수 있어야 한다. 입법적인 부분에 있어서는 적절한 '예측가능성'을 사회에 부여하기 위하여 적절한 법과 시스템을 만드는 것이 필요하다. 그리고 그 법을 모두에게 평등하게 적용하여 누구나 규칙을 어기면 처벌된다는 '의식'을 벗의 잣대로 행할 필요도 있겠다.
이 책에서는 또 하나 중요한 점을 지적하는데, 한 사회가 '배신'의 칼날쪽에서 시작되었다면 TFT가 그 칼날을 타고 넘을 수 있는가 하는 점이다. 저자는 TFT는 오랜 기간을 기다린다면 결국 칼날을 넘기에 충분한 개체수를 확보할 것이며 결국 그 집단 전체가 TFT 세상이 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충분한 개체수를 확보하기 전의 상황은 한 지역 안에서 TFT가 소규모의 지역 집단을 이루다가 점점 개체수가 늘어가는 것을 예로 드는데, 이는 요즈음 전국적으로 번지고 있는 지역공동체의 의미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였다. 지역 기반 마을운동, 작은 서점, 대안교육 등 점성 조직으로 발현되고 있는 대안생활문화 운동들의 역할이 이런 것이 아닐까. 언젠가는 칼날을 넘나들게 하는 힘. 내가 속한 대안교육 공동체에서 바깥의 상황에 너무나 무심한 듯 보여 실망하고 있었는데 현주언니의 말처럼 어쩌면 존재 자체만으로도 영향을 미치는 면이 있을 수도 있겠다 싶었다.
내가 이 책을 열기 전 품었던 질문에 대한 답이 책을 덮을 때쯤 떠올랐다.
유전자는 자기복제라는 소명을 위해 이기적으로 내달리지만 긴 마라톤 뒤 그 달리기가 호흡을 가다듬는 순간 유전자는 그 이기성을 기반으로 함께 협력하며 살아가게 될 것이다. 그리고 마라톤 중간에라도 인간이라는 특별한 종은 뇌의 힘으로 미래를 상상하면서 유전자의 가이드를 무시하고 상대방의 손을 잡을 것이다.
인간 세상의 이기주의는 핑크빛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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