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코스모스> 우주와 우주의 대면 본문
코스모스 -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사이언스북스 |
<코스모스>라는 긴 여행을 마쳤다. 단순히 과학적 지식서적을 넘어서는 책이라고는 알고 있었지만 이런 감동적인 웅변서일 줄은 몰랐다.
이 책에서는 과학이 밝혀낸 지식들을 단순히 나열하는 것이 아니라 그것을 발견하고 탐구했던 사람들에 대한 이야기와 함께 설명한다. 현재 우리가 알고 있는 우주는 인류의 역사를 거쳐 우리의 지적 수준에서 밝혀낸 우주의 모습일 뿐이기 때문이다. 인류라는 렌즈를 통한 탐구였기에 우주를 알아간다는 것은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는 일이었고 인류의 적나라한 모습과 직면하는 일이었다.
인류는 급격한 지적 성장을 이루는 듯하다가 후루룩 뒷걸음질을 쳤었고 애써 얻은 지식을 어이없게 사용하곤 했다. 인류의 이런 비틀거림을 보고 있자니 '지금 우리'는 어디쯤 와 있는 걸까 궁금해졌다.
핵무기의 위험도 경험했고 노예제를 폐지하고 인종차별, 남녀차별을 없애려 애쓰고 있으며 빈부격차, 환경오염에 위기를 느끼고 생명존중의 움직임을 일으키고 있다. 그런데 그렇게 나아가던 인류가 지금 잠시 주춤거리는 것 같다. 극우보수파들이 각 나라의 정치를 장악하는 모습을 보니 말이다. 칼 세이건이 40여년전, 각 나라를 대변하는 사람들만 있지, 지구를 대변하는 사람은 과연 있느냐며 울분을 토했던 그 시절에서 한 발자국도 나아가지 못했다. 오히려 그 시절의 희망마저 사라진 느낌마저 든다.
신인류의 진화된 뇌가 파충류의 뇌를 완전히 극복하기 위해서는 도대체 무엇이 필요한 걸까? 소행성 충돌같은 지구적 재앙이나 고도문명 우주인의 방문같은 극적인 이벤트가 필요한 걸까?
생각해보니 일상생활의 소소한 인간관계에서조차 파충류의 뇌가 풀가동되는 상황에서 우리가 할 수 있는 것은 거의 없는 것만 같다.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나 융의 <분석심리학>에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스스로를 온전히 돌보는 것이 사회운동이나 다를 바 없다고 한다면 <치유모임>에서 <코스모스>를 읽고 좌절감에 몸을 부르르 한 번 떠는 것이 '아무 일도 일어나지 않는 것'은 아닌 것이다.
인류의, 우주의 기나긴 역사와 시간으로 볼 때 한 인간의 생이란 미미하기 짝이 없다. 하지만 수소원자가 모여서 별을 만들었듯이 내 아이와 주변의 이웃들을 보듬어 안고 쓰다듬고 사랑한다 이야기하는 행동들이 인류의 감정제어 뇌가 더 탄탄히 진화하는데 밑거름이 될 수도 있지 않을까. 적어도 '나'라는 작은 우주는 달라질 수 있을 것이다. 나는 사랑을, 화합을, 포용을 선택할 수 있다. '나'라는 우주에서는 내가 내 삶의 창조주이므로.
고개를 들어 밤하늘의 별을 바라본다. 별도 나를 바라보는 것일지 모른다. 우주와 우주의 대면이다.
* 혹시 보급판과 양장본 사이에서 고민하는 사람이 있다면 (나처럼...) 양장본을 사라고 추천하고 싶다. 단순히 큰 판형의 문제가 아니라, 텍스트와 이미지를 함께 보는 편집 구성에서만 느껴지는 감동이 있다. 특히나 마지막 페이지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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