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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나는 상처족이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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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나는 상처족이다!

고래의노래 2018. 2. 1. 15:39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 - 10점
클라리사 에스테스 지음, 손영미 옮김/이루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은 여성들을 향한 '선동서적'이다. 이 책은 우리의 머리를 향해 이야기하지 않는다. 처음부터 끝까지 오로지 우리의 가슴을 향해서만 돌진한다. 삶에서 '지하세계'의 어둠을 한번이라도 경험한 여성이라면, 그리고 인류의 문명화이래로 멈춘 적이 없던 여성에 대한 억압을 온 몸으로 고통스러워하는 여성이라면 책이 건네는 메세지가 자신의 영혼을 쥐고 흔드는 느낌을 받을 것이다. 


 다른 여성주의 책들처럼 이 책이 전하는 메세지도 한가지이다. 주어진 삶이 아닌 스스로의 삶을 개척하라는 것. 여성의 영혼에는 이미 충분한 힘이 있으니 말이다. 저자는 억압되었던 여성 본래의 그 힘을 되찾는 방법을 이야기하면서 '여걸'이라는 개념을 제시한다. 야성을 지닌 여성의 영혼인 내면의 '여걸을 인지'하고 그에 따라 살아가라고 소리친다. 여걸에 대한 믿음을 되찾고 여걸과의 관계를 회복하기 위해서는 그 관계를 막고 있는 '심리천적을 인식'해야 한다. 그리고 그 천적을 처치한 에너지로 영혼에게로 한 걸음 더 나아간다. 

천적을 물리치기 위해서는 스스로의 직관과 본능을 믿고 또 그것을 믿어주는 사람들과 함께 해야한다. 그리고 나를 유혹하는 것이 아니라 내가 진짜로 원하는 것을 구별하여 중독에 빠지는 것을 경계하고 내가 원하는 일과 고독의 시간을 통해 창조적인 삶을 꾸려간다. 이런 창조의 시간들은 우리를 영혼의 고향으로 데려갈 것이며 직관을 키워줄 것이다. 우리는 감정이 전하는 영혼의 이야기를 들어야한다. 분노에너지를 용서를 통해 치유하고 비밀을 털어놓아야 한다. 삶에서의 상처와 그로 인한 지하세계의 경험은 결국 우리를 영혼의 길로 인도한다. 우리가 결국 깨달아야 하는 것은 삶/죽음/삶 주기이다. 


 여걸의 존재에 대해 저자가 제시하는 근거는 '이야기가 전하는 상징 원형들'이다. 오랫동안 구전되어온 옛이야기와 유명한 동화들 속에서 여성의 내면과 성장에 대한 상징들을 찾아 분석하고 그것을 통해 여성들에게 잃어버렸던 내면의 힘에 대해 이야기한다. 


 

1. 여걸을 인지하기


"내가 여성 본연의 본능적 자아를 여걸(wild woman)이라고 부르는 이유는 '길들여지지 않은', '여성'이라는 단어가 마치 동화처럼 여성의 깊은 내면의 문을 두드리기 때문이다."


 저자는 야성을 지닌 여성의 영혼, 영적 무의식, 직관, 통찰력을 '여걸'이라고 이름붙였다. 융심리학에서 이야기하는 '자기실현으로 향하게 하는 무의식 에너지'라고 할 수 있다. 없던 개념은 아니다. 하지만 무언가를 언어화한다는 것은 그것을 실재로 존재하게 하는 힘이 있다. 특히나 자신의 힘을 스스로 인지하지 못하고 있는 여성들에게 이것은 매우 필요한 작업이라는 생각이 든다. 여성들은 그 힘의 존재에 대해 선명하게 인지할 수 있어야 한다. 


 하지만 내면의 힘을 실제로 느끼게 하기 위해 그녀가 차용하고 있는 단어들이 처음에는 오히려 방해가 되기도 했다. 내 안에 이미 존재하고 있는 해당 단어에 대한 이미지가 책 속의 단어를 이해하는데 걸림돌이 된 것이다. '야성'은 나에게 본능대로 움직이며 펄떡이고 폭발하는 '야생마'의 이미지였다. 그런데 저자는 야성을 '통제할 수 없는 것'이 아니라 '자연스런 삶, 피조물이 본연의 건전한 한계를 지켜나갈 수 있는 생활방식'이며 어떤 어려운 상황에 처해있어도 본능적으로 그것을 견뎌내는 힘, 지구력, 인내심으로 정의내리고 있다. 


"우리는 잠깐씩이나마 야성을 경험할 때가 있는데 그 때마다 그 느낌을 지속적으로 느끼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가령 임신 중이거나 아기에게 젖을 먹일 때, 또는 아이를 기르는 동안 기적적인 자기 변신을 체험하기도 하고 , 또 누군가와 연애를 하는 동안 이 생명력 넘치는 야성을 경험한다...극도로 아름다운 광경을 볼 때도 야성을 경험할 수 있다...낙조를 볼 때나 해질 녂 어부들이 등불을 켜고 호수에서 올라오는 것을 볼 때, 내가 낳은 아이의 발가락이 옥수수알처럼 가지런한 것을 볼 때 야성이 내 안에서 파닥이는 걸 느꼈다."


 저자는 '야성으로 향하는 열망의 상태'나 '야성에서 멀어진 여성의 상태'를 매우 구체적이고 섬세하게 묘사한다. 바로 그 점이 이 책이 우리의 마음을 흔든다. 이것이 바로 '나의 이야기'라는 느낌이 들면서 저자의 눈과 내 눈이 마주치는 듯한 느낌을 받곤 했다. 야성이 우리의 근원적 힘이라고 하더라도 그것이 커다란 불덩이, 열정과 같은 힘찬 느낌이어서 자신의 것이 아니라고 느껴질 수도 있다. 그런데 '아이의 가지런한 발가락을 보았을 때 내 안에서 올라오는 그 무엇'이 야성이라고 할 때, '난 야성을 경험한 적이 없다.'고 이야기할 수 있는 사람이 누가 있겠는가? 야성은 우리가 진리의 뿌리에 다가갈 때 느끼는 충만감이다.


 나는 임신상태를 사랑했다. 내 안에 또다른 생명이 꿈틀댄다는 사실이 경이로웠고, 굽이치는 인류사의 일원이 되는 느낌이었으며 꽃, 벌레, 발하늘의 별까지  살아있는 모든 것들과 연결되어있는 기분이었다. 주변 사람들은 나에게 너무나 생기가 넘치고 예뻐졌다며 신기해했다. 지금 생각하니 그것은 야성의 충만함 딱 그것이었다. 


"춤을 추고 드럼을 치고 연극을 하고 시를 분석하고 기도를 하는 것 모두 목적은 심리적인 안정이다. 이 일은 뼈를 한데 모으는 작업에 해당한다. 

내 영혼의 목소리는 어떤 상태인가? 내 삶에서 매장된 뼈는 무엇인가? 나와 야성적 자아와의 관계를 어떠한가? 내가 자유롭게 달렸던 기억은 언제였던가? 어떻게하면 내 삶을 되살릴 수 있을까? 

영적인 굶주림과 특히 무언가 창조하고픈 욕망이 강하다면 그대는 야생의 여성일 가능성이 높다."


 막둥이를 보내고 나서 나는 내 안에 꿈틀거리는 불덩이를 느꼈다. 연기를 하면서 그것을 토해내고 싶었고, 소리지르며 노래하고 춤추고 싶었다. 그리고 자연 속에 오래 머물고 싶었다. 특히나 화산은 내 영혼을 끌어당겼다. 제주도 이주를 진지하게 고민해보기도 했다. 나는 스스로를 '용'이라고 모임에서 소개했다. 그렇게 명백하게 느껴졌다. 내 안의 불덩이가. 지금 돌이켜보니 그건 갑작스런 충만감의 단절로 인한 영혼의 허덕거림이었던 것 같다. 나는 내가 느꼈던 그 충만감으로 돌아가고 싶었다. 야성으로 말이다. 


"야성과 관계를 되찾은 여성들은 마음 속에 모든 것을 이해하고 예견, 예언하는 능력, 남의 말을 경청하는 능력이 생기고 정신적, 신체적으로 생기넘치는 삶을 살게 될 것이다. 그들은 목표를 구체적으로 세워 실천에 옮기고 중심을 벗어났다가도 곧 되돌아온다."


 이렇게 되고 싶지 않은 사람이 누가 있을까? 그렇다면 어떻게 해야 우리 안의 야성을 되찾을 수 있나? 우선 야성과의 관계를 막고 있는 심리의 천적을 깨달아야 한다.  



2. 심리의 천적


 저자는 여성의 잠재력을 함부로 깍아내리고 파괴하는 존재를 '심리의 천적'이라고 이름 붙였다. 여성의 내면에 '여걸'이라는 이름을 붙였던 것처럼 그 반대의 힘에 '심리의 천적'이라는 이름을 붙임으로서 여성이 무너뜨려야 할 부정적 에너지를 대상화한 것이다. 


 심리의 천적은 여신모임에서 우리가 명확히 끌어내고자 노력했던 '중독상태'이다. 가족 안에서 사회 안에서 당연하게 옳은 것이라고 주입된 행동, 사고방식에 의문을 제기하지 않은 채 끌려다닌다면 그것은 중독된 것이다. 특히나 여성은 여성이라는 범주 안에서 강요받는 틀이 과할 때가 많은데 이것을 인지해서 내 것과 그들의 것을 구별할 필요가 있다. 아름다운 외모에 대한 기준에서부터 강요되는 모성신화, 성에 대한 수치심, 스스로에 대한 열등감까지, 자연스럽게 일어나는 우리 안의 기준들이 정말 '자연스러운'것인지 생각해보아야 한다. 저자는 그 구별을 위해 올바른 질문을 제기하고 내 안의 직관을 믿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직관은 어떤 일의 진상을 이해하고 자신의 생각 가운데 핵심만으로 추려내는 감각, 내면의 지혜이다. 


"엄마가 딸에게 물려줄 수 있는 가장 귀한 유산은 자신의 직관에 대한 믿음이다."


 심리 안에 있는 천적을 처치해 그 에너지를 이용하여 앞으로 나아간다. 천적을 변형시켜서 새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은 가장 빛나는 창조작업일 것이다. 저자는 이 작업을 삶/죽음/삶 주기로 설명하며 이것이 우리가 깨달아야 할 가장 중요한 인생의 리듬이라고 말한다. 



3. 아니무스


 저자는 여성의 창의력을 깨우는 창조적인 삶에 대해서 매우 섬세하게 설명을 한다. 굳이 거창한 예술작업이 아니어도, 글을 읽고, 풀밭에 눕고 친구와 수다를 떠는 일상 생활의 순간순간 속에서 우리는 창의력을 다시 살릴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저자는 창의력을 '생각과 감정 가운데 진정으로 필요한 것들을 선택하고 반응하고 표현하는, 자신의 감정과 열정과 의미를 전달할 수 있는 능력'으로 정의하고 있다. 나는 여신모임에서 창의력을 '경험을 통해 삶을 새롭게 해석하고, 순간순간의 선택을 통해 삶을 내가 원하는대로 이끄는 능력'으로 정의했었다. 저자가 이야기한 '천적을 변형시켜서 새 것으로 만들어내는 것' 또한 이런 맥락일 것이다. 두 정의에서 모두 자기자신의 욕구와 한계를 완전히 이해하는 것을 창의력의 바탕으로 삼았다. 그건 곧 직관을 믿고 심리의 천적을 제거한 후 야성을 회복하면서 우리가 되찾게 되는 능력이다.


 그런데 저자는 이것을 삶에서 실현시키기 위해서는 아니무스라는 창조에너지가 필요하다고 말한다. 아니무스는 여성의 창의력을 구체적으로 표현하게 하는 영혼의 힘으로 내면의 생활과 감정을 외부세계와 연결시키는 실천력이다. 저자는 아니무스를 단련하려면 창조적인 생활을 위한 상황과 분위기를 적극적으로 만들고, 실패를 두려워말고 무엇이라도 시도하며 주변에 나를 격려할 사람들을 두고 창조적인 생활을 끈기있게 실천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일단 시작하라!"


 주변을 보면 생각과 계획은 많은데 기운이 없어서 아무 일도 시작하지 못하고 시작해도 마무리짓지 못하는 경우가 많다. 나 또한 그렇다. 내 경우에는 그것이 실패에 대한 두려움에서 주로 기인한다. 완벽하게 준비되지 않으면, 즉 성공이 보장되 보이지 않으면 시작조차 하지 않는 것이다. '여신모임'도 현주언니의 '냇물 망하기 전'이라는 뽐뿌질이 없었으면 시작하지 못했을 것이다. 작년말 3학년 반모임에서 했던 아기돼지 삼학년 연극도 마찬가지였다. 하고 싶은 마음은 많았는데 준비하기에는 이미 시간상 불가능하다고 생각했을 때 우혁이엄마로부터 '같이 해볼래?'라는 제안을 받아서 시작할 수 있었다. 준비하는 과정에서도 나는 얼마나 안절부절했었는지.. 완벽하지 못해서 망설이다가 시작한 일들은 결국 어떠한 방향이든 나에게 인생을 풍부하게 하는 하나의 경험을 남겨주었다. '나를 격려할 사람'을 곁에 두는 것은 이래서 중요하다! 미운오리새끼가 자신에게 맞는 무리를 찾아간 것처럼 말이다.


"끈기란 묘한 힘을 가지고 있어서 어떤 일을 계속하다보면 엄청난 에너지가 생긴다"


 아니무스의 단련을 이야기하면서 저자는 '끈기'가 주는 에너지를 강조했다. 야성을 정의내릴 때도 지구력과 인내심을 이야기한다. 발도르프에서도 리듬생활 속에서 무언가를 끈기있게 하면 중독상태에서 벗어나게 된다고 말한다. 


 요즈음 나는 10대 후반의 감성으로 돌아간 듯한 느낌이다. 드라마의 영향인지, 수련의 영향인지 아니면 여신모임과 이 책 때문인지 잘 모르겠다. 아니면 모두 다 일수도 있겠지. 그림을 그리며 살겠다고 한치도 의심하지 않았던 그 시절, 의심만 하지 않았지 사실 나는 어떤 행동도 하지 않았고 열정만 가득하고 순진하고 어렸다. 나는 저항하고 있다고 생각했지만 사실 아무런 저항도 하지 않고 있었다는 걸 지금은 안다. 그리고 그랬던 그 시절도 이해한다. 그림쟁이가 된다는 꿈이 사라져 버린 이후 나는 그림을 그릴 수 없었다. 백지만 봐도 떨리던 시절이 마치 거짓말이었던 것처럼 백지가 무서워졌다. 아마도 꿈이 나를 그림그리게 하는 원동력이었던 것 같다. 


 그런데 요즈음 다시 그림을 그리기 시작했다. 그림을 그릴 때 행복하다. 매년 반복하던 '하루 한 장 그림 그리기'라는 목표를 올해에는 꼭 실천해보려 한다. 그래서 인스타그램에 꾸준히 그림을 올리고 있다. 얼굴도 모르는 사람들의 '좋아요'가 나를 격려한다. 이제 무언가 되지 않아도 좋다. 나는 나를 위해 그림을 그린다.

기타도 운동도, 가늘더라도 길게 가보려한다. 나의 아니무스를 단련시켜서 창의력을 되살리고 내면의 영혼을 되살리기 위해!



4. 중독의 유혹을 물리치기


"우리를 유혹하는 것과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구분할 줄 알아야 한다. 가까이 있다는 이유만으로 뭔가를 선택할 수 있고, 꼭 필요하지 않은 것이라해도 오래 보고 있으면 점점 좋아질 수 있다." 


 우리가 물리쳐야 할 중독상태로서의 심리의 천적 외에 저자가 이야기하는 또 다른 중독상태가 있다. 저자가 들려준 <빨간구두> 이야기에서 가장 중요한 포인트는 입양되기 전에 소녀가 직접 빨간 구두를 만든다는 것이다. (사실 이 부분은 잘 알려진 이야기와는 조금 다르다. 일반적으로 알려진 이야기에서 빨간구두는 신발이 없는 소녀를 가여워한 어느 아주머니가 만들어준 것으로 나온다.) 자신의 본능과 영혼의 울림대로 짠 구두가 없어진 후 소녀는 자신에게 그와 비슷한 감정을 불러 일으키는 빨간구두에 미친듯이 매료된다. 


 저자는 이것을 '자아가 상실된 중독상태'라고 하며 중독과 야성은 긴밀한 관계라고 하였다. 잃어버린 삶을 되찾기 위해서는 심리적 지표가 필요한데, 자신의 상황을 극복하지 못하거나 진짜와 가짜를 구분하지 못하면 중독상태에 빠져든다는 것이다. 그러므로 우리는 우리를 유혹하는 것과 우리가 진정으로 원하는 것을 구분할 수 있어야 한다. 야성이 주는 충만함은 내가 온 우주가 되고 우주가 내가 되는 합일의 경험이면서 동시에 자아를 '잊는' 상태이다. 그것은 흡사 나를 '잃고' 감각적 쾌락의 대상을 그 자리에 대체시키는 것과 비슷해보인다. 그래서 야성과 중독은 다른 듯 같은 경험을 주는 것이다. 하지만 나를 잃어서는 안된다. 


 우리가 빠져드는 것이 옳은 방향에 있는 것일지라도 지나치게 되면 문제가 된다. <물개여인> 이야기에서 물개여인은 자유를 위한 춤을 너무 정신없이 추다가 영혼을 도둑맞는다. 우리가 영혼의 피부를 잃어버리는 것은 이렇듯 무수한 중독의 상태에 빠지기 때문이다. 그것은 원칙집착, 자처하는 희생, 사회적 야망, 완벽주의일 수도 있고, 물개여인처럼 영혼과 야성에 대한 탐닉일 수도 있을 것이다. 문제는 관계의 성격이 아니라 거기 들어가는 시간과 에너지로, 지나치게 빠지면 결국 영혼의 피부를 잃는다고 하였다. 그녀는 춤에 열중한 나머지 옆에서 일어나는 일에 주의를 기울이지 않았다. 그것은 <에스겔의 랍비> 이야기 중 자신이 목격한 천당에 집착하여 사이비교주가 되는 랍비와 같다. 집착은 그것이 무엇이든 우리를 파괴한다. 일상이라는 세속이 우리에게 필요한 이유이다.


"누구나 일생에 한번은 매우 중요한 것을 잃어버린 경험이 있다."


 물개여인이 물개가죽을 잃어버리지 않았으면 영원히 행복했을까? 저자는 영혼과 자아가 만나 '정신'이라는 아이를 출산한다고 이야기한다. 그녀는 야성에 집착된 상태였고 그래서 균형이 필요했다. 가죽을 훔치는 남자를 데려온 것은 어쩌면 여걸의 인도였는지도 모른다. 중요한 것은 그녀가 '정신'이라는 아이를 통해 자기자신에게 더 나아갔다는 것이다. 치명적으로 상처들이 결국 다시 우리 안에서 새 살로 돋아난다. 삶/죽음/삶의 리듬이다.



5. 자아


"여성이 처음 개별화되기 시작할 때 영혼은 자아와 충돌한다. 그러다가 세상 살아가는 법을 재우기 위해 영혼이 자아에 굴복하는 기능이 작동하기 시작한다."


 사람은 내가 바라보는 엄마가 나와 다른 사람이라는 걸 알게되는 순간부터, 즉 자아에 대해 인지하게 되는 순간부터 개별화가 시작된다. 야성의 우주적 일체감과 충만감은 분열되고 부서지며 외로움이라는 결핍된 감정 속에서 괴로워하게 되는 것이다. 그 외로움을 타인과의 관계에서 해결하려 자아는 스스로를 희생하거나 관계 대상에 집착하거나 요구되는 틀에 자신을 꾸역꾸역 맞추곤 한다. 


 나는 저자가  '자아'를 영혼의 반대편에서 부정적으로 묘사하는 듯한 시선이 불편했다. '우리 속의 여신들' 책에서 결국 '자아'가 내면의 조율자 역할을 해야한다는 것에 나는 크게 공감하고 있기 때문이다. 이 책의 저자가 가진 하나의 단점은 자주 업급되는 중요한 용어에 대해 친절한 정의를 내려주지 않는다는 것이다. 같은 단어가 때로 전혀 다른 맥락 속에서 사용될 때도 있다. '자아'라는 단어가 대표적이라고 하겠다. 


 저자는 여러 부분에서 자아를 '사회 속에서 드러내는 나의 페르조나'의 의미로서 사용하고 있는 것 같다. 자아가 아닌 영혼에 근거하여 살아야한다는 것은 외부의 시선이 아닌 내면의 에너지에 기반하여 살아야 한다는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에서 이야기한 내면의 목소리', 내면의 지혜) 뜻일 것이다. 자아가 지난 긍정적, 부정적 역할이 분명히 있다. 부정적인 역할은 위에서 이야기했듯이 외부의 시선과 틀에 자신을 맞추어 진정한 본성에 다가가기 어렵게 한다는 것이다. 하지만 영혼을 인지하고 우리 삶으로 끌어내는 과정에서 자아의 역할이 필요함도 저자는 인정하고 있다.  <빨간구두>이나 <물개여인>에서처럼 무언가 도를 지나쳐 중독되어 있을 때 자아는 이를 알아차릴 수 있는 윤리적 기준 및 자기보호책이 되어준다. 


 저자는 자아의 감정이 영혼에 전해지고 영혼은 꿈이나 신체증상 등으로 이에 반응하면서 자아와 영혼이 서로 영향을 주고 받으며 '정신'을 탄생시킨다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정신은 속세와 야성의 세계를 넘나들며 양쪽세계를 모두 이해하고 다스릴 수 있게 하는 힘이다. 또한 여걸을 '상식과 영혼이 모여 이루어진 존재'라고 이야기하는 걸 보면 자아와 영혼의 적절한 결합을 매우 중요시하는 것 같다. 


하지만 "결국 자아는 언젠가는 영혼의 지배를 받아야한다."며 둘 사이의 관계에서 확실히 영혼의 손을 들어준다. "세련된 행동양식을 배우는 사회화 과정을 부정하고 싶지는 않다. 다만 삶의 활력을 저하시키는 지나친 훈련은 경계해야 한다."는 이야기에서 나는 저자가 자아를 '외부의 힘으로부터 쉽게 변화하는 취약한 나'로 바라보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나는 '표면적 의식상태'로서 자아를 정의내리고 취약함보다는 결국 '생활 속에서의 결단을 내리는 주체'로 바라보고 있었다. 저자가 이야기하는 '정신'으로서의 기능을 할 수 있는 자아로 말이다.  어쩌면 모두 말장난일 수 있다. 결국 같은 이야기를 한다고 여겨지니 말이다. 하지만 나에게는 '정신'을 품을 수 있는 자아의 '가능성'에 집중하는 것이 나의 영혼을 불러오는데 더 도움이 될 것 같다. 그래야 내가 더 단단해지는 느낌이니까.



6. 영혼의 고향


"우리는 각자 자기에게 맞는 길을 통해 영혼의 고향으로 돌아간다. 고향으로 돌아가기 위해 우리는 창의력을 발현할 시간들을 가질 필요가 있다. 내가 좋아하는 일을 하고 고독을 즐겨야 한다. 

고독은 접어서 들고 다닐 수 있는 숲이다." 


 마지막 구절은 내가 이 책에서 가장 아름답다고 생각하는 구절 중 하나이다. 저자는 이 책의 곳곳에서 깜짝 놀랄 만큼 아름답고 시적인 표현들로 우리의 가슴을 요동치게 한다. 

 고독이 치유의 시간이라는 것을 어릴 때는 미처 알지 못했다. 나는 외동이었고 대학시절부터 혼자 살았다. 혼자만의 시간은 나에게 너무나도 충분하고도 넘쳤다. 하지만 아이를 낳고 그 아이에게 태양같은 존재인 '엄마'가 되면서 인간에게 혼자만의 시간이 얼마나 절실한 문제인지 깨닫게 되었다. 아무리 피곤해도 나는 아이가 참들면 깨어나 나만의 시간을 가졌다. 답답한 가슴이 그 때에야 가라앉고는 했다. 

 타인과의 구분으로 존재하는 자아는 그 구분때문에 외롭지만, 모든 것이 서로 연결되어있음을 깨달은 영혼은 고독을 즐긴다. 고독의 시간을 통해서 그 연결 에너지를 더 깊게 느낄 수 있기 때문이다. 


 저자는 '영혼의 고향'이라는 새로운 용어를 제시한다. 그리고 영혼의 고향을 '일상생활에서 맛보기 어려운 경이감, 선견지명, 안정, 평안함을 지속적으로 느끼는 상태'로 정의내린다. 사실 이것은 새로운 것 없이 이제까지 쭉 책에서 이야기해왔던 '야성의 상태'이다. 그런데 저자가 굳이 '영혼의 고향'이라는 용어를 다시 만든 이유는 야성이 우리의 근원이며 우리가 잊지 말아야할 내면에너지이지만, 그 상태에 계속 머물러서는 안되기 때문이다. 영혼의 고향에서 충분히 치유하고 힘을 받은 뒤에 우리는 일상으로 돌아와야 한다. 영혼의 고향에 계속 머무르려는 것은 중독 상태에 빠지는 것과 같다. 야성의 에너지를 채우고 여걸과 믿음의 관계를 유지하며 우리는 지상의 삶을 살아가야 한다. 



7. 분노와 용서


 융 심리학이 항상 강조하는 것처럼 우리의 감정은 지혜와 직관, 깨달음의 수단이며 무의식이 보내는 신호이다. 감정은 마치 내면의 거울과 같아서 우리가 어디에 상처받고 취약한지를 드러내준다. 

 저자는 특히나 분노의 감정에 대해 집중적으로 이야기한다. 분노는 정열에너지와 달라서 창조력을 오히려 고갈시키기 때문에 분노에너지는 해소할 필요가 있으며 그러기 위해서는 용서해야 한다고 말하고 있다.  이제까지 분노에 대해 일반적으로 들어왔던 것은 분노를 창조적으로 승화시키는 것에 대한 이야기들이었는데, 이 책에서는 분노를 오히려 창조력의 반대영역으로 보고 분노가 인다는 것은 정신적 여유가 필요하다는 신호로 해석한 것이 새로웠다.


"용서는 창조적인 행위이다. 용서의 방법이나 시기는 자신이 정한다. 왜 그가 그런 일을 해야만 했는지 이해하고 분노에서 벗어나기 위해 애쓰며 더 이상 뭔가를 기다리거나 원하지 않는다면 진정한 용서가 이루어진 것이다. 용서를 완결하면 우리는 분노보다 슬픔을, 그 일을 저지른 사람에 대해서는 동정심을 느낄 것이다."


 막둥이를 보내며 나는 과연 나 자신을 용서할 수 있을지 알 수 없었다. 내가 믿었던 나와 현실의 나 사이의 괴리감 속에서 자아가 분열될 듯한 괴로움에 빠졌었다. 그런데 그런 괴로움 속에서 비로소 다른 사람들에 대한 마음의 문이 열리기 시작했다. 말 못할 사정 쯤 하나씩 품고살 이 세상 모두에 대해 연민이 일었고, 내가 다른 사람을 완전히 이해한다는 것은 불가능한다는 것을 알게되자 오히려 그들을 품을 수 있을 것 같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나 그 마음의 문이 가족에게만은 잘 열리지 않았었다. 아마도 큰 시련을 겪은 후 그들에게 거는 기대가 있었기 때문일 것이다. 


  저자는 용서는 오래 걸릴 수 있고, 그 방법이나 시기 또한 스스로에게 달려있다고 이야기하며 용서에 대한 부담을 덜어주려하고 있지만, 용서는 아직도 나에게 힘든 과제이다. 내 마음 속에는 용서해야 할 사람이 있다. 사실 용서의 대상이 사람인지, 행위인지, 사건인지 구분조차 되지 않는다. 그 사람과의 뒤엉킨 관계의 실타래를 풀기위해 필요한게 용서라는 확신도 없다. 어쩌면 사랑이나 이해가 더 필요한 건지도 모른다. 아니면 조그만 관심과 호기심일지도.


 요즈음에 나는 내가 상처주었던 사람들을 떠올린다. 제 3자의 입장에서 들었으면 어이없어 하며 완전 욕했을 행동을 나는 별다른 죄책감없이 했었다. 지금 그들에게 직접 가서 얼굴보고 사과하지는 못하겠지만 그 때 그들이 받았을 상처에 용서를 구하며 기도하려한다. 

 내가 나를 용서한다는 것은 그 때의 나에게 면죄부를 주는 것이 아니라 그렇게 취약하고 삐뚫어졌던 내 모습을 인정하는 것이라고 생각한다. 내가 완전하지 못한 '인간'이라는 것을 겸허히 받아들이는 것 말이다. 막둥이를 보냈던 나와 무심하게 주변 사람에게 상처를 주었던 나약하고 못난 나를 받아들이며 다른 사람들에 대해 마음의 문이 열렸던 것처럼, 내 안의 그 사람의 '인간적인 상태'가 궁금해지고 그래서 품어지는 그 날을 기다린다. 



8. 사랑


"사랑은 인내라는 심리적 힘줄로 이루어진 확실한 연대임을 기억하라. 사랑은 또한 행과 불행으로 이어진 결합이며 남녀 모두에게 신의 존재를 깨닫게 하는 신비한 힘이다. 그러나 강인한 사랑을 이루기 이해서는 두 사람 사이에 제 3의 요소가 있어야 한다. 삶/죽음/삶의 여신이다."


 <해골연인> 이야기를 통해 저자는 사랑에 대하여 이야기한다. 처음에는 여성의 야성회복과 사랑이 무슨 상관인지 의아했다. 이제까지의 이야기들에서는 야성을 지닌 여걸과의 관계를 회복하는 것이 지극히 개인적인 차원의 노력이라는 생각이 들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저자는 사랑을 삶/죽음/삶 주기로 설명하며 진정한 사랑을 이루면 그 주기성을 이해하게 된다고 이야기한다. 


 사랑은 강렬하게 시작한다. 서로에게 미친듯이 빠져들며 둘만 있다면 이 세상이 완전한 것만 같은 충만감을 느낀다. 하지만 그 감정은 계속되지 않는다. 감정이 시들해지고 강렬한 끌림만큼이나 강했던 서로에 대한 기대와 환상도 무너진다. '죽음'의 주기가 시작된 것이다. 지하세계로의 경험이 우리에게 깨달음으로 가는 길을 알려준다면, 사랑은 분명히 그 지름길일 것이다. 저자는 '사랑은 항상 죽음으로의 하강'이라고 말한다. 불타올랐던 감정들이 죽고, 기대가 죽고 망상이 죽는다. 


 남편과의 오랜 연애 기간동안 만남과 헤어짐을 반복했기 때문에 사랑의 감정에 주기가 있다는 것을 알고 있었다. 하지만 우리가 진정 관계의 '죽음'을 경험한 것은 막둥이를 보내면서였다. 상처의 깊이만큼 서로에게 기대하는 것도 많았지만 상대를 보듬기에는 각자의 일상을 살아내기에도 버거운 상태였다. 그렇게 각자의 밑바닥을 확인하는 다툼이 이어지다가 언젠가 깨닫게 되었다. 그 사람이 노력하지 않은 적이 한번도 없다는 것을. 그런데도 내 기대에 맞춰지지 않는다고 끝없이 몰아세웠던 것을 말이다. 죽음으로부터 다시 삶이 떠올랐다.


"해골여인을 보면 정열은 밖에서 구하는 것이 아니라 삶/죽음/삶의 주기로부터 저절로 생기는 것임을 알 수 있다. 또한 두 남녀가 온갖 험한 일을 함께 겪고 극복해야만 사랑과 헌신이 생긴다는 사실도 깨닫게 된다. 

사랑은 자기 안의 모든 세포가 '도망쳐!'라고 소리칠 때조차 그 사람 옆에 머무는것을 의미한다."


 참으로 강렬한 문장이 아닐 수 없다. 사랑에도 야성적인 인내심이 필요하다. 하지만 모든 경우에 있어서는 아니다. 푸른수염에게서 막내딸이 도망쳤듯이 자기파괴적인 관계로부터는 반드시 도망쳐야 한다. 지금 그 외침이 삶으로 향하는 죽음의 길목에서 들려오는 기대와 망상의 외마디 비명인지, 아니면 내면의 직관이 외치는 생명의 소리인지는 오직 나만이 알 수 있을 것이다. 



9. 상처와 비밀


 저자는 본능을 지키고 야성을 회복하는 방법으로 '비밀'을 털어놓으라고 이야기한다. 여기서 이야기하는 비밀은 너무나 소중해서 혼자만 간직하고 싶은 추억이 아니라 스스로 수치심이라는 열쇠로 봉인하고 있던 비밀들이다. 내면이 상처와 연결되어 있는 비밀들 말이다. 

 며칠 전 한 여검사가 자신의 겪은 검찰 내 성폭력 경험을 털어놓았다. 그녀는 무려 8년 동안 그것을 비밀로 감추고 있었다. 그녀는 인터뷰 중에 "성폭력 피해자들에게 '결코 당신의 잘못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를 하고 싶어 나왔다."고 했다. 그러면서 그녀 자신도 그것을 깨닫는데 8년이나 걸렸다며 울음을 삼켰다. 8년동안 그 비밀을 가둬두었던 열쇠는 성적 수치심과 조직적 압력 그리고 그 자리에서 당당하지 못했던 스스로에 대한 단죄였을 것이다. 이제 그녀는 상처입은 스스로를 인정하면서 열쇠를 되찾아왔다. 그리고 당당히 그것을 열었다.


 나는 막둥이 이야기를 지인들에게 자주 털어놓았다. 그리고 그 당시의 감정과 생각들도 글로 끝없이 토해냈다. 그것은 살기위한 본능적인 행동이었다. 그 얽히고 섥힌 실타래들을 뽑아 풀어내지 않으면 심장이 터져버릴 것 같았으니까. 그런데 가끔 사람들에게 그 이야기를 할수록 그 이야기가 가진 심각한 무게감이 약해지는 듯해서 죄책감을 느끼기도 했다. 그런데 생각해보니 가벼워지라고 이야기하는 것이 맞다는 생각이 들었다. 혼자 감당하기엔 무거운 감정의 짐을 덜기위한 것이니.


"나는 여성들의 삶의 역정을 도표로 그려 자신의 자아가 죽은 시점을 십자가로 표시해보라고 하고 싶다. 휴식의 집자가를 그리는 행위는 반달곰의 주인공이 떠도는 원혼을 위해 기도하고 위로하는 행위와도 비슷하다. 무엇인가 죽은 시간과 장소를 나타내는 푯대일 뿐 아니라 그 원혼들에게 보내는 사랑의 편지이기도 한다. "


 털어놓아서 조금은 덜 아파지겠지만 평생을 계속 품고 살아야하는 아픔들도 있다. 비밀을 털어놓고 십자가로 표시하는 것은 그것이 나의 삶의 일부였음을 그것을 경험한 것이 나였고 그 경험을 통과하여 지금 내가 이렇게 존재하고 있음을 인정하는 것이다. 저자가 희생양이 되었던 경험들로 탈출망토를 만든다고 했을 때 왜 그것이 '망토'가 되는지, 왜 그것을 마지막에 없애는 의식을 하지 않는지 의아했다. 이 때까지만 해도 나는 상처는 품어야할 것이 아니라 버려야할 기억으로 생각하고 있었던 것 같다. 저자는 상처가 우리를 단단하게 지켜준다고 이야기한다. 그래서 희생의 기록은 '망토'가 되는 것이다.  

 순진하다는 말의 어원은 상처나 해를 입지 않았다는 뜻이라고 한다. 순진함의 상실은 성인이 되기 위한 의식이다. <손없는 아가씨>에서 아가씨는 더러워지면서 악마의 접근을 막고 야성적 본능을 회복한다. 상처는 우리를 순진함에서 벗어나게 해주고 단단한 새살을 돋게 한다. 상처라는 '죽음'이 야성을 살리는 것이다. 


"누가 그대의 국적이나 인종, 혈통을 묻거든 자랑스럽게 대답하라. '나는 상처족이다.'라고."



10. 삶/죽음/삶


 이 책을 통해 계속 강조되는 것은 삶/죽음/삶 주기이다. 

지하세계로 납치되었다가 성숙한 저승의 인도자로 되돌아온 페르세포네처럼, 사랑하는 사람을 잃고 불가능해보였던 도전과제들을 헤치고 여신이 된 프시케처럼, 죽음이후에는 다시 삶이 찾아온다는 것을 강조하며 여성들의 용기를 북돋고 있다. 인생의 여정에는 반드시 지하세계가 포함되어 있다. 그것은 사랑스러웠던 연인이 더 이상 사랑스럽게 보이지 않는 순간일 수도 있고 독박육아에 피폐해진 때일 수도 있다. 또는 나 자신을 잃고 무언가에 중독된 순간일 수도 있으며 비밀의 상처에 결박된 시기일 수도 있고 심리의 천적이 우리를 삼켜서 내면의 빛을 찾지 못해 허우적거리는 때일 수도 있다. 


"깨달음은 행위가 아니라 환상 아래 본질을 이해할 때 생긴다. 

우리가 일단 만물의 주기성을 깨닫고 나면 어떤 상황에서도 그 패턴이 되풀이되리라는 믿음이 생긴다"


 그것을 삶으로 되살리는 방법은 고독이라는 숲에서 그림을 그리고 산책을 하고 음악을 들으며 내면의 소리를 듣는 것이다. 많이 용서하고 더 많이 창조한다. 다시 야성과의 연결이 느껴질 수 있도록 말이다. 그리고 때로는 그 혼란스러움 속에서 그저 가만히 기다린다. 삶/죽음/삶의 주기에 대한 믿음을 갖고.

 우리가 지하세계에 있을 때 고요한 기다림을 유지한다는 것은 너무나 어려운 일이다. 죽음의 상태에서 우리는 야성과의 연결을 느낄 수 없고, 상실된 충만감 앞에서 어쩔 줄 몰라 허둥지둥거리게 된다. 그리고 때론 그 좌절감이 너무 커서 모든 것을 내려놓고 싶은 욕망에 사로잡힌다. 저자는 바로 이러한 때에 '야성적인 인내심'으로 이를 이겨내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야성의 여걸은 우리를 한순간도 놓은 적이 없다. 잠시 지금 안개가 낀 것 뿐이다. 이러한 인내심을 가능하게 하는 것은 역설적이게도 속세의 삶이다. 출근해야 하는 직장, 매일 치워야 하는 살림들, 먹이고 입혀야할 아이들이 우리가 지하세계에서 자칫 '깨달음 망상'의 중독에 빠지거나 모든 것을 놓은 자포자기의 상태로 가지 않도록 붙잡아준다. 자아와 영혼은 그렇게 우리의 균형을 잡아주는 것이다. 


"심리적 아이를 낳는다는 것은 여러 요소가 통합된 전인적 자아로 거듭남을 상징한다. 심리의 아이를 탄생시킨 여성은 삶에서 벌어지는 모든 일들이 자신의 일부임을 깨닫고 바람직하지 못하거나 두려운 요소 또한 자기 것으로 받아들이게 된다. 자기 내면의 모든 요소를 너그럽게 받아들이고 스스로의 성장과 발전에 이용하게 된다. 우리 내면에 새로운 자아가 탄생하려 할 때는 지금까지의 생활이 왠지 불만족 스럽게 느껴지고 마음 또한 어수선해진다. 이것은 영적인 굶주림이다."


 여신모임 때 인생그래프 그리기 작업을 모임벗들과 함께 한 적이 있다. 인생의 행, 불행을 인생시기에 따라 글프로 표시해보는 것이었다. 그런데 놀랍게도 우리 중 아무도 그 작업을 해내지 못했다. 불행했다 여겨졌던 일들이 지금 돌이켜보면 오히려 성장의 기회가 되었고 그 일이 있었기에 지금의 내가 존재한다는 것을 깨달았던 것이다. 우리는 삶에 던져진 사건들에서 성장의 과제를 찾아 의미를 발견한다. 그리고 삶에 일어났던 모든 일들이 바로 나 자신이라는 것을 인정하는 순간 우리는 저자가 이야기하는 '정신' 또는 '심리의 아이'가 탄생시키며 전인적 자아로 거듭나게 될 것이다. 

 


책을 덮으며..


 이 책의 번역자는 이 책이 여성해방을 개인적인 면으로 한정지은 데에 대해서 비판했다. 아직 사회적인 면에서 해결해야할 문제가 많은데 모든 문제를 너무 개인적 차원에서만 바라보았다는 것이다. 번역자의 생각도 아쉬워하는 마음도 이해되지 않는 건 아니지만, 저자가 이야기하는 바가 여성운동과 반하는 내용은 아니라는 생각이 든다. 


"단조로운 집단적 삶에서 벗어나 자기 나름의 생각과 삶을 개척하고 자신만의 독특한 재능을 계발하는 일이야말로 여성의 삶에서 가장 중요한 과제이다."


 저자는 사회 문제를 자기 일로 받아들여 진솔하고 열정적으로 처리하는 태도가 야성의 기능이라며 내면의 영혼을 따르는 여성들이 사회적인 문제도 잘 처리할 수 있다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정치의식이 높고 사회운동에 적극 참여하는 여성들이나 여권 운동가들은 괴한 꿈을 많이 꾼다고 말하면서 내면의 아니무스가 지친 이런 상태에서는 생각을 덜어내어 단순화시켜서 아니무스를 다시 단단하게 할 필요가 있다고 하였다. <미운오리새끼> 이야기로부터는 '자기자신에게 충실하고 자기가 속할 곳을 찾는 힘을 기른 여성은 사회와 문화의 의식 또한 효과적으로 변화시킬 수 있다.'는 해석을 끌어내기도 했다. 이런 이야기들을 읽어보면 저자는 여성운동이 필요하지 않다고 주장하는 것이 아니라는 걸 알 수 있다. 단지 내면이 단단한 사람은 쉽게 지치지 않으므로 사회운동을 더 잘 하기 위해서는 밖으로 향하던 시선을 때때로 내면으로 향하게 할 필요가 있음을 우선 강조하고 싶었던 것 같다. 


 그리고 마지막에는"여걸과 좀 더 가까이 살기 위해서는 지금보다 더 씩씩해야 한다. 좀 더 날카로운 직관으로 더 창조적인 생활을 하며 좀 더 많은 말과 생각을 만들어내야 한다. 그리고 여성들과 더욱 굳게 뭉치고 남성들에게도 친절해져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남성들에게도 친절해져야한다.'는 부분이 일부 페미니스트들에게는 거북한 구절일 수도 있겠다. 안 그래도 '프로불편러'로 낙인찍혀 까칠하다고 비난받는 상황에서 나긋나긋함이 강요되는 것처럼 보이기도 하니 말이다. 그러나 아마도 그것은 '야성과의 관계를 되찾은 여성들은 모든 것을 이해하고 다른 사람의 말을 경청하게 된다.'는 이야기랑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친절해지라는 것은 남성들이 그렇게 말하는 심리사회적 배경을 이해하고 그것을 바탕으로 대화하라는 말이라고 생각한다. 원칙적으로 옳은 말이지만, 소리치고 분개했던 나날들이 있었기에 대화의 자리가 만들어질 수 있는 거라는 점도 무시할 수는 없을 것이다. 


 이 책의 추천사에는 "여성들을 상처족이 아니라 늑대족이라고 하자!"라는 글이 나온다. 옮긴이의 비판과 추천사의 이 문장이 많은 페미니스트들이 이 책의 저자에게 바랐던 점, 그래서 서운했던 점을 드러낸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들은 좀 더 강하게 리드해주는 언니를 바랐던 것 같다. 여성들을 충동질하되, 내면으로의 충동질을 넘어 밖으로 뛰어나가는 대담한 선동을 원한 게 아니었을까. 하지만 나는 '상처족'이 늑대족보다 훨씬 강인한 느낌이 든다. '나는 이런이런 상처를 경험한 사람이다!'라는 인정은 스스로에 대한 사랑고백과 다를 바가 없다. 그것은 진정 강한 내면에서만 가능한 고백인 것이다. 늑대의 탈을 쓸 필요도 없이.


 책을 읽으면서 가장 희열을 느낄 때는 책으로부터 내 인생과 나 스스로를 이해하고 설명할 수 있는 언어를 발견했을 때이다. 여신모임 책을 읽으면서 이미 내 삶을 두루 살펴보고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모든 것들을 생각해볼 기회도 있었지만, 이 책을 읽으며 다시 한 번 '나의 지하세계'였던 막둥이를 보낸 경험이 내 삶에서 어떤 의미였는지 여러 각도에서 살펴보고 이해할 수 있었다. 그리고 가슴 안에서 느껴졌던 불덩이가 어떠한 것이었는지, 그것이 의미하는 바가 무엇이었는지도 명확해진 것 같다. 

그리고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항상 내 안에서 충돌했던 음담패설과 관련된 내 경험과 생각들이 이 책을 통해서 위로받는 기분이었다. 나는 여성이 음담패설을 즐기는 것은 일종의 여성주의운동이라고 생각했는데, 어떤 페미니즘 시각에서는 그러한 여성은 남성적 시선에 안전하게 편승하여 남성을 적으로 두지 않으려는 '여성우월주의자'라고 바라본다는 것을 알게되었고 내 과거 행위들을 다시 꼽씹어 보고 있던 차였다. 그럴 수도 있다. 내가 분개해야 할 부분에 민감하지 못했거나 미움받는 용기가 부족했을 수도 있다. 하지만 음담패설을 즐기는 게 여성들의 성적해방과도 연결된다는 내 생각이 완전 틀리다는 생각은 들지 않았다. 그래서 음담패설 외설은 경이로운 본성이고 외설적인 것이라도 우리를 치유해주면 그것은 신성한 것과 통한다는 저자의 말은 나에게 많은 위로가 되어주었다. 물론 여전히 음담패설 자체에 불편해하는 사람과의 자리나 음담패설의 내용이 누군가의 인격모독까지 가지 않게 하기 위한 적정 수준이 고민이긴 하지만 말이다. 


"여걸은 수천년동안 우리를 미행해왔다... 길을 가다 문든 이상한 느낌이 들면 뒤를 돌아보라. 네 발로 서 있는 아름다운 야성의 그림자가 보일 것이다."


 이 책이 '출산의 성스러운 피에서 풍기는 쇠냄새'나 '여걸', '늑대'같은 강한 용어들과 현 여성들의 무기력한 상태에 대한 적절한 묘사와 창의력에 대한 섬세한 표현 등으로 여성의 마음을 뒤흔들고 움직이는 것은 맞지만 명확히 정의되지 않는 모호한 용어로 읽는 내내 혼란스러웠던 것도 사실이다. 이제까지 '너무나 친절한 어머니' 저자의 글들을 받아먹어서였을까?  아니면 명확히 언어로 인지되지 않으면 내면으로 받아들이고 이해하지 못하는 나의 한계였을까? 어쨋든 덕분에 용어에 대해 하나하나 나의 말로 정의내려보며 이 책의 내용을 정리해볼 수 있었다. 그 밖에 모호하지만 분명했던 내면의 울림은 그대로 받아들여 보려 한다. 어쩌면 그것이 여걸이 나에게 원하는 것일 지도 모르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