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서양미술사> 당신의 임무는 무엇인가요? 본문

삶이 글이 될 때/읽고 보다

<서양미술사> 당신의 임무는 무엇인가요?

고래의노래 2017. 9. 5. 13:57
서양미술사 - 10점
E.H.곰브리치 지음, 백승길 외 옮김/예경


* 책과 나와의 접점을 찾아서

 책을 읽을 때 책과 나와의 연결고리를 찾으면 독서가 즐겁다. 마치 누군가와 대화할 때 그 사람이 나와 같은 관심사를 가지고 있는 걸 알게 되면 대화의 밀도가 깊어지고 즐거워지는 것처럼 말이다. 흔히 이야기하는 '나만의 필터로 책을 해석해낸다.'는 것이 그러한 의미일 것이다. 그래서 같은 책도 언제, 어느 상황에서 읽느냐에 따라 다르게 받아들여진다. 지금의 나는 온통 '나 자신'에게 관심이 쏠려 있다. '나는 어떠한 사람이며, 그래서 어떻게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한 깊은 고민중이다. <서양미술사>가 이러한 내 고민과 어떤 접점을 가질 수 있을까. 이번 독서는 그 접점을 찾는 과정이었으며 책과의 대화 속에서 오르락내리락 요동쳤던 내 감정만큼이나 그 과정이 다이나믹했다.  

 <서양미술사>는 개인적으로 남다른 기대 속에서 읽기 시작했다. 오래토록 읽어보려고 호시탐탐 노리던 책이었다. 그림을 그린다는 것이 나에게 커다란 기쁨이었던 아주 어린 시절부터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을 종이 위에 옮길 수 있는 능력'에 감사했고 그것을 능숙하게 해내는 미술가들의 작품을 볼 때는 그들의 선 하나하나가 경이로워서 오랫동안 그 붓선을 눈으로 따라가며 마음속으로 그려보기도 했다. 그림으로 먹고 살꺼라 철떡같이 믿었던 시절을 지나 지금은 멀리 돌아와있지만, 여전히 그림을 그리는 것은 나를 충만하게 하는 작업이고, 미술관에서 멋진 그림을 감상하는 것은 내가 좋아하는 여가 활동이다.

 <서양미술사>는 곰브리치가 이야기했듯이 서양쪽의 미술역사를 개괄한다. 서문에서 그가 보여준 태도는 너무나도 정중한 것이어서 책에 대한 명성을 제하더라도 저자에 대한 믿음이 생겼다. 자신의 부족한 부분에 대해(동양미술, 자신이 직접 실물을 보지 않은 작품 등) 오픈하고 독자에게 그 부족함에 대한 이해를 구하면서도 전문적인 그의 지식과 주장은 전혀 나약해보이지 않았다. 그는 겸손하고 열려 있으나 한편, 단단하고 중심이 잡힌 사람인 것 같다. 아무리 좋은 정보라할지라도 전하는 사람에 따라 받아들이는 사람의 마음이 열릴 수도 닫힐 수도 있다. 그런 면에서 곰브리치는 칼 세이건 만큼이나 훌륭한 '전달자', 매개자'라는 생각이 든다.


* 미술인가, 미술가인가?

 이렇게 미술이라는 영역에 대한 애정과 그로 인해 개인적으로 가졌던 책에 대한 기대, 따스하고 친절한 저자의 문체에도 불구하고 책읽기가 중반으로 접어들 때 즈음 나는 잠시 혼란스러워졌다. 미술 양식의 변화과정이 나와 무슨 상관이지? 라는 허무함에 빠진 것이다. 미술사라고 했을 때 내가 '의식적으로' 기대했던 것은 우리가 미술 시간에 흔히 들어왔던 각종 양식과 사조에 대한 체계적인 순서에 대한 정보였는데 이 책이 그런 정보를 제공하고 있는데도 내가 혼란스러웠던 것은 책이 집중하고자 하는 것이 그것이 아니었기 때문이다. 그건 또한 그 당시에는 의식하고 있지 못했지만 나의 필터도 마찬가지였다. 

 그러다가 19세기 들어 미술이 구현해야 하는 진정한 아름다움이란 무엇인가에 대한 이상주의자들과 자연주의자들의 치열한 대립에 대한 설명을 읽으면서 곰브리치가 서문에 강조했었음에도 불구하고 내가 결국 이 책에서 보고 있던 것은 양식의 나열이었고 그 이상을 볼 생각을 하지 못했다는 걸 깨달았다. 곰브리치는 양식이라는 것이 차례차례 뒤이어 생겨난다고 생각하는 것은 잘못이며 미술에 있어서 끊임없이 이루어진 변화를 하나의 연속적인 진보로 보는 것은 위험하다고 이야기한다.

 이 책은 이렇게 시작한다.
 "미술이란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읽기 시작했을 때는 몰랐지만, 이 말은 이 책을 관통하는 주제였다.


* 서양미술사의 커다란 흐름

 이집트, 메소포타미아의 고대미술이 지금 시각에서 경직되어 보이고 어색해보이는 이유는 그들이 보이는대로 그리려 하지 않고 완전함을 그리려했기 때문이다. 인간의 생김새에 있어서 코가 오똑하다는 것, 손가락과 발가락이 다섯개씩이며 손과 발은 두 개씩이라는 것을 모두 완전하게 한 장면에 드러내보이는 것이 중요했다. 
 그러다가 그리스 로마 시대에 이르러 미술 안에 생명력을 불어넣기 시작했다. 그림 속 인물들은 보다 편안해보이기 시작했고 근육 하나하나가 마치 살아있는 듯 했다. 그러다 중세시대에 종교적인 주제가 그림의 가장 큰 소재가 되면서 완전함이 다시 중요해지게 되었고 이를 구현하기 위한 도식들이 이용되었다. 그림은 '화가의 작품'이라기보다는 '성스러움의 물적 재현'이었다. 그림은 다시금 경직되었고 질서가 중요시되었다.
 르네상스 시기는 우리가 아는 위대한 화가들, 미켈란젤로, 레오나르도 다빈치, 라파엘로가 활약했던 시기로 눈으로 본 것을 그리려 했던 시기이다. 마치 진짜로 눈 앞에 그 장면이 펼쳐지는 듯한 현실감과 이상적인 아름다움이 사람들을 압도했다.
 그러다 19세기에 들어와 르네상스 미술의 표현 도식에 반하는 움직임이 일어난다. 정형화된 아름다움을 표현하는 것을 넘어 진짜를 담아내고 싶어했고 이러한 노력이 인상파로 이어졌다.

 커다란 흐름으로 볼 때 서양미술가들은 자연에 대한 충실함과 이상적인 아름다움, 질서 사이에서 규형을 잡기 위해 끊임없이 시소를 탔고, 그려야하는 것을 그리는 시대를  지나 그리고 싶은 것을 그리게 되기까지 오랜 길을 걸어왔다.

 내가 보고 있는 것을 평면화면 위에 그대로 구현한다는 것은 그야말로 이상이다. 우리에게 두 눈이 있고 그래서 깊이감이 체현되기 때문에 한 초점으로 그림을 그린다는 것은 사실 눈 한쪽으로 본 세상을 그리는 것과 마찬가지이다. 세잔이 그렇게 물병과 사과를 그려대던 이유도 , 쇠라가 그렇게 점을 찍어댔던 이유도 우리가 흔히 알고 있는 고흐의 그림에 대한 열정과 다를 것이 없었다. 세잔은 정물화 속에서 자연을 눈에 보이는대로 그리되 화면에 질서를 부여하는 험난한 통합을 계속 실험했었으며 쇠라는 형태와 색채의 대립 속에서 나름대로의 해결책으로 순수한 점으로 돌아가보고자 했던 것이다.

 색에 집중하면 형태가 무너지고, 질서와 아름다움에 집중하면 자연스러움이 사라졌다. 
 그들은 진정성에 이르기 위해 캔버스 앞에서 끊임없이 투쟁하는 전사들이었다. 


* 미술가라는 임무 수행자

 곰브리치는 미술가를 이렇게 정의했다.
'형태와 색채가 제대로 될 때까지 조화시키는 놀라운 재능을 갖고 있으며 어중간한 해결방법에 만족하지 않고 모든 안이한 효과와 피상적 성공을 뛰어넘어 진정한 작품을 제작하는데 따르는 노고와 고뇌를 기꺼이 감내하는 사람들.'
 미술가들은 시대가, 또는 자신 안에서 요구되는 임무에 철저하게 자신들을 던졌다. 
 곰브리치는 책의 마지막 부분에 다시 한 번 이야기한다.
 "미술이란 것은 사실상 존재하지 않는다. 다만 미술가들이 있을 뿐이다."

 미술사는 양식의 나열이 아니다. 미술가들의 고뇌 속 임무 수행기이다.
어쩌면 대부분의 사람들에게는 이해받지 못할 열정이다. 도대체 그림이 순수하고 이상적이냐 아니냐 하는 것이 우리 삶과 무슨 관계가 있단 말인가. 그런데 그렇기 때문에 우리는 인간이지 않을까. 먹고 사는 문제 이외의, 너와 나의 관계 이외의 어떤 것에 집중하고 몰두하고 고뇌할 수 있다는 것이.
미술가가 '쓸데없는' 문제에 골몰할 수 있다면 그 시대는, 그 사회는 그야말로 '인간적'인 곳일 것이다.
(며칠 전 국공립 미술관 전시 작가들에게 월급 개념의 '전시보수'를 주는 것을 시범운영하고 법제화를 추진한다는 뉴스를 읽었다. 그들의 쓸데없어 보이는 고민을 실제적으로 끌어안으며 우리 사회는 '함께 사는 사회'로 나아간다. 그들의 고민이 쓸 데가 있는 것이다!)

 곰브리치는 현대미술에서는 시대가 미술가에게 준 임무가 오직 변화와 실험 그 자체인 것에 아쉬움을 나타낸다. 쉽게 이해되지 않는 현대미술의 기이함에 이미 익숙해져 버린 우리는 미술가들을 남과 다르게 튀어보고자, 자신만의 브랜드를 만들어내고자 혈안이 된 '개성 중독자'로 보고는 한다. 그래서 그 시각으로 역사 속 미술사들을 바라보고, 제대로 그들의 임무를 발견해내지 못하는 것이다.

 순수한 열정으로 손에 잡히지 않는 이상을 쫓던 미술가들의 도래를 기원하면서 곰브리치는 미술이 존재할 것인지 아닌지는 적지 않게 일반 대중의 태도에 달려있다고 이야기한다. 형태와 색채에 대한 미술가의 감각이 완벽한 작품 속에서 결정화되려면 단단한 핵을 필요로 하는데, 그 핵은 재능을 집중시킬 수 있는 뚜렷한 임무라는 것이다. 이제까지 사회가, 또는 미술전통이 미술가들에게 임무를 제시해왔다. 색채와 형태의 균형을 통해 자연스러움이라는 혼란과 아름다움이라는 질서를 융합하기 위해 미술가들은 화폭 위에서 싸워왔다. 가상현실 기술이 진정 '현실'이 된 지금, 평평한 캔버스 위에서 그들이 찾을 무언가가 아직 남아있는 것일까? 아니면 미술이라는 영역 자체가 변화의 단계에 있는 건 아닐까? 기술과 문화가 결합되는 이 시대에 미술가들의 임무는 무엇이 될까?


* 당신의 임무는 무엇인가요?

 내가 진짜로 무엇을 보고 있는지 인식하지 못하고 다른 기대를 안고 책을 읽기 시작해서, 책이 진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을 찾는데 오랜 시간이 걸렸다. 찾고보니 그것은 내가 보고 있는 것과 같은 지점이었다.
역사를 관통하며 미술가들은 '나는 누구이며, 무엇을 하며 살아야하는가'에 대해 뜨겁게 대답한 인류였다. 

 다시금 '지금의 나'에게 건네는 이 책의 이야기에 귀기울인다. 
 지금 이 생에서 나에게 맡겨진 임무는, 소명은 무엇일까.
 천사와 싸운 야곱처럼, 내 온 생을 바쳐 뒹굴 고귀한 무언가를 찾고 싶다. 마치 미술가들이 그랬던 것처럼.



*** 이 책은 보급판이 아니라 반드시 클래식 판형으로 사야한다. 클래식 판형에서만 글과 그림을 함께 볼 수 있기 때문! 이러한 편집 구성을 위해 수고한 편집자에 대해 곰브리치가 서문에 감사를 표시할 만큼, 그림과 글을 함께 본다는 것은 이 책에 있어 매우 중요한 문제이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