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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광할한 우주 속에 미미한 인간이 행하는 위대한 선택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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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코스모스> 광할한 우주 속에 미미한 인간이 행하는 위대한 선택들

고래의노래 2017. 1. 5. 15:07
코스모스 - 10점
칼 세이건 지음, 홍승수 옮김/사이언스북스



<치유의 글쓰기> 모임에 이 책을 추천했을 때 내가 말한 거창한 이유는 이것이었다.
"우리 스스로를 이해하기 위해, 몸, 마음, 사회를 살펴봤으니 이제 우주 한 번 봐야죠!"
말은 그렇게 했지만 사실 <코스모스>라는 책을 함께 읽어보고 싶어서 이리저리 짜맞춘 그럴 듯한 이유였다.
막연히 우주적 관점에서 우리를 살펴보는 걸 도와줄 책이라고 생각은 했지만 분명 그럴꺼라는 확신은 없었던 거다.

그런데 칼 세이건은 이 책의 머릿말에서 말한다.
"독자들은 이 책에서 우주적 관점에서 본 인간의 본질과 만나게 될 것이다."

세상에나...그리고 그의 말처럼, 막연했던 나의 기대처럼, <코스모스>는 나를 인간의 본질로 이끌었다. 심히 우주적으로!

자신이 누구인가를 알기 위해 인간은 자신을 근원을 탐구한다. 종교가, 철학이, 과학이 찾는 모든 가치가 여기에서 나온다. "나는 누구인가? 어디에서 왔는가?"
'자연, 우주와 우리는 하나다.'라는 환경보호 단체나 명상서적의 명제는 언뜻 공허해보이지만,
생명의 기원으로 거슬러올라가 단세포, 다세포가 탄생하고 그들이 결합하여 분열하는 기본 수준에서 모두 한뿌리라고 과학이 설명하기 시작하면 사람들은 자세를 고쳐 앉기 시작한다. 공허함이 명료해지기 시작하는 것이다.

과학은 인류의 수준에서 세상과 나 자신을 바라보는 시점을 바꾸어주는 가장 효과적인 장치이다.
당연하다고 생각했던 세상을 다르게 바라볼 수 있게 될 때 나는 짜릿한 전율을 느낀다.
<우주로부터의 귀환>이라는 책에서 저자는 우주를 경험했던 우주인들의 그 후의 이야기를 추적하는데, 비행기 조망으로 지구를 바라보기만 했던 우주인들과 지구의 전체 모습을 한 눈에 볼 수 있을 만큼 멀리 나갔었던 우주인들과 뚜렷한 차이가 있음을 발견했다. 지구의 전체 모습을 지구 밖에서 바라보았던 사람들의 삶은 그 전과 분명 달라져 있었다.


* 알면 달라진다.

화성탐사를 위해 발사되었던 바이킹 1호, 2호의 이야기들과 지금도 우주 저 너머를 항해하고 있는 보이저 1호, 2호의 이야기들을 읽으며 인류가 과학자들에게 빚진 것이 참 많다는 생각이 들었다. 바이킹들을 화성에 착륙시키기 위해 착륙지점을 계산하는 지난한 작업들과 보이저호들의 고장을 방지하기 위해 같은 기능을 하는 부품들을 여러 개 심으며 설계했다는 이야기, 그리고 보이저들이 가장 여러 곳을 제대로 관측하게 하기 위해 짰던 경로 계산에 대한 이야기들...이들이 이러한 노력 끝에 우리에게 알려준 우주의 이야기들은 우리가 스스로를 더 잘 알게 했다.

지구와 근접 천체의 충돌을 지속적으로 감시하고 연구하면서 우리는 엉뚱한 이유 때문에 핵전쟁에 휘말리지 않을 수 있고 금성을 보면서는 환경오염의 미래를 예측할 수 있다. 

보이저 1호가 태양계 경계를 넘으며 고개를 돌려 찍은 지구의 사진에 나는 전율했다.
지구라는<창백한 푸른 점> 우리가 '이 세상'이라고 부르는 지구는 까만 우주 공간에 떠 있는 보이지도 않을 만큼 작은 점이었다. 그 사진을 찍고 보이저는 다시 고개를 돌려 그야말로 망망대해 속으로 다시 나아갔겠지.
우리가 경험하지 못한, 상상조차 하지 못했던 우주의 거대함이 느껴지는 '실제 사진'이었다.

지구와 지구인이 자연에서 그리 대단한 존재가 아니라는 통찰은 과학적으로 무수히 많은 별들을 같은 시선으로 관찰할 수 있게 해주었을 뿐 아니라 사회적으로는 인종 차별의 철폐로까지 이어졌다.
그렇다면 인류는 긍정적으로 진화하고 있는 것일까?


* 어떤 길을 선택할 것인가?

진화는 자연도태와 자연선택에 의한 흐름이다.
보통 자연은 오랜 시간을 들여 서서히 어떤 선택을 한다. 하지만 인간이 자연을 대상화하기 시작하면서 그 흐름에 급격한 변화를 준 것들도 있는 것 같다.
일본의 사무라이 얼굴모양 등딱지를 가진 게가 '전설'을 등에 업고 인간에 의해 진화의 흐름에서 선택되어진 것처럼, 인간은 많은 생명들의 진화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새끼를 먹일 양보다 훨씬 더 많은 양의 우유를 만들게 된 젖소부터, 지지대가 없으면 서지도 못하는 방울토마토, 가지도 인간을 위한 용도로 급하게 진화된 생명들 아닐까?

현재 도시화와 자연파괴로 기로에 선 우리의 선택은 어떤 것이 될까?
도시화와 자연파괴는 진정 '악'일까? 우리의 시각에서 우리의 생명을 위협하기에 악한 것처럼 보이는 것일 뿐 우주적인 관점에서는 악할 것도 선할 것도 없다. 자연의 시각에서 그것은 그저 하나의 흐름이며 선택일 뿐이다.

과학사에 있어서도 '인간의 선택'이 작용했다. 물론 자연적인 선택도 있었다.
기원전 500년경 이오니아 인들이 이룬 지적 성장은 그들이 섬 중심의 세계는 다양성을 가져다 주었고 중앙권력이 없어 자유로운 탐구가 가능했다. 여러 신들의 대결에서 신을 가정하지 않고 세상을 알 수 있는 방법에 대해 깨닫기 시작했던 것이다. 
이 시기의 인물인 탈레스는 신들의 도움을 받지 않고 세상을 이해하려던 사람이었다. 정말 중요한 점은 문제해결을 위해 그가 택한 접근 방식에 있다. 세상을 신의 언어가 아닌 물리의 언어로 이해하려 했던 것이다. 이것은 당시 사고의 근본을 뒤흔드는 발상의 대전환이었다.

17세기 네델란드의 크리스티안 하위언스를 탄생시킨 환경적 요인도 있었다.
네델란드의 외교노선은 주변국들과 경쟁해 살아남기 위한 선택으로 철저히 평화적이었고 변화와 혁신에 관대했다. 로마 가콜릭에게 협박을 받고 있던 갈릴레오에게 교수직을 제안할 정도였으니 말이다. 해양강국이었기에 지성과 문화의 중심지였고 조선술의 발전이 기술의 발전으로 이어졌다.

이러한 와중에 몇몇 혁신가들은 과학사에 남을 '선택'을 했다.
케플러는 피타코라스학파의 생각에 배료되어 행성 운동의 조화를 연구하게 되었지만 그 생각 때문에 연구가 10년이상이나 지체되었다. 하지만 결국 원에 대한 집착을 버리고 행성의 운동이 타원궤도라는 수정을 하게 된다.  
하위언스는 과학이 자신의 종교이며 외계 행성에도 거주민이 있을거라 주장했지만 그 추론은 신이 아무 목적없이 행성을 만들어 놓을 리가 없다는 논리에서 나온 것이었다. 신에 대한 믿음이 변화에 대한 거부, 현실에 대한 안주대신 탐험으로 이끌기도 했던 것이다.

이에 반해 피타고라스는 관측과 실험을 배제하고, 과학을 대중과 격리시켰다.
비록 감각으로 인식하지 못하지만 피타고라스 학파는 완벽하고 신비한 세계의 존재를 확신했고 기독교도들은 이러한 생각을 쉽게 받아들였다. 
피타고라스와 플라톤은 과학을 소수 엘리트만의 전유물로 제한, 실험에 대한 혐오, 신비주의 용인, 노예 사회의 문제를 묵인함으로써 인간의 모험심에 좌절을 안겨주고 과학의 퇴보를 불러왔다.

2200년 전 인류는 이미 지구가 둥글다는 사실을 알 수 있었다. 그런데 근 700년 동안 눈감고 귀감은 이유는 뭘까? 인류 전체가 저 사실을 받아들일 의식의 수준에 이르지 못했기 때문은 아닐까.

"나는 개개인의 지적 성숙 과정에도 반복설이 성립된다고 믿는다. 우리는 자기도 모르는 사이에 우리의 조상들이 해 온 사고의 과정들을 되풀이하면서 하나의 개인으로 성장해 간다. 수십만년 전에도 인류는 현재의 우리만큼이나 영리했고 지금처럼 호기심이 많았으며 오늘날과 같이 사회적 노동와 성적 관계에 연연하며 살았을 것이다."

이론적 모형을 지속적으로 구축하고 파기하는 과정 속에서 우리는 인류의 진정한 용기를 실감하게 된다. 과학적 진리도 사회적 관습도 모두 이렇게 용기있는 위대한 선택에 의한 것이었다. 인류사의 흐름 중 21세기 초반을 살아가는 나는 어떤 선택들을 하고 있나? 다시 돌아보게 된다.



* 신과 우주

"미지의 원인으로 인한 현상에 접하게 될 때 사람들은 신이라는 단어를 흔히 사용한다...신은 인간이 경외심 가득한 마음으로 듣는 데 익숙해져 버린, 하나의 공허한 소리일 뿐이다." - 폴 하인리히 디트리히 홀바흐 남작 <자연계>

밤하늘은 어렸을 때부터 항상 나에게 경이의 대상이었다. 밤하늘을 올려다보고 있으면 끝을 알 수 없는 장엄함에 압도되어 나는 저절로 신이 떠오르고는 했다. 저렇게 넓은 우주 안에서 저 많은 별들이 하나의 법칙을 따라 폭발하고 부딪히고 유영을 하고 사라진다. "누가, 어떻게, 왜!"라는 질문이 터질 수 밖에 없는 알 수 없는 거대함.

인류의 역사를 관통하면서 종교와 과학은 서로 밀고 당기며 진리를 향해 함께 달려왔다. 홀바흐 남작의 말처럼 인간은 끝끝내 알아내지 못할 것 같은 것에 '신'이라는 이름을 붙이고 불안함을 달래고 있는지도 모른다. 인간이 모든 것을 이해하게 되는 그 때 신은 사라져버릴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지금, 아직, 신은 있다.

그래서 창조론과 진화론은 아직은 여전히 같이 가고 있다.
현주언니는 세상의 근원을 바라보는 접근방법이 2가지인 것이며 어느 쪽이 진리라고 할 수 없다고 하면서
그 당시 사람들의 상황과 염원을 담고 있는 설화와 신화가 모두 '거짓'이라고 할 수는 없다고 했다.

그러면서 '대담'에 나오는 이야기를 하나 해주었다.
70대 장기복역수가 신입수감자가 들어오면 자신의 삶에 대해 이야기해 주는데, 그 내용이 매번 달라졌다고 한다. 후회와 기쁨, 슬픔, 창피함 등 온갖 감정이 들어가 의식적, 무의식적으로 각색된 이야기라고 해서 그것이 거짓일까? 흔히들 이야기하는 '사실'은 아닐 수 있으나 그것이 진실이 아니라고는 할 수 없다는 것이다.

우리가 잡으려 하는 진리라는 것도 어쩌면 우리가 생각하는 차원과 다른 영역에서 존재하는 것일지도 모른다. '다차원의 진리'같이 말이다.

최근 2학년 학부모들과 함께 <존엄>이라는 책을 읽고 있다. 이 책은 국제 분쟁지역에서 갈등해결업무를 하고 있는 저자가 쓴 것으로, 사람들 사이에 일어나는 갈등이 결국 서로의 존엄에 대한 침해에서 비롯된다고 말하며 서로에 대한, 스스로에 대한 존엄을 잊지 말 것을 주장한다.
저자는 '존경을 체험하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면서 이렇게 이야기한다. 

"우리 자신보다 더 위대한 무언가가 있다는 느낌이 없다면, 우리는 감히 우리의 한계를 못 보게 된다."

미지의 우주가 있기에 우리는 지금 서로에게 기대어 살아가고 있는 게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