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빨래하는 페미니즘> 페미니즘이 사라질 날을 꿈꾼다 본문
빨래하는 페미니즘 - 스테퍼니 스탈 지음, 고빛샘 옮김, 정희진 서문/민음사 |
* 드디어 나왔다. 포르노그래피!
1세대 페미니즘에서 육아와 가사노동은 여자들을 연대하게 만들어주는 주제였다. 페미니스트들은 여성들에게 의무로서 당연하다는 듯이 주어진 이 노동을 '선택'으로 바꾸고자 했다. 그 과정에서 앞서 이야기했던 '가사도우미 고용'으로 인해 여성들 사이에서의 새로운 계급화라는 문제가 생겨나고 있다.
페미니즘 운동 결과의 혜택이 일부에게만 한정되는 문제를 다 해결하기도 전에 2세대 페미니즘은 새로운 국면으로 들어서게 되는데 그 중심에 포르노그래피가 있었다.
"2세대 페미니즘은 포르노물이라는 단층선을 따라 자유적 페미니즘과 문화적 페미니즘으로 분열되었다."
나는 어릴 때부터 성차별적인 발언에 발끈하며 '성평등' 문제에 예민하게 굴었는데 성적인 문화에 대해서는 주류 페미니즘 운동권과 조금 다른 생각을 가지고 있었다. 여성들이 음담패설 같은 성적인 문화를 좀 더 여유롭게 즐기지 못하는 것은 여성들에게 씌워진 사회적 억압(여자들은 조신해야 한다는)때문이므로 여성들 스스로 이것을 깨고 나와야한다고 생각했다.
그런 부류를 '자유적 페미니즘'으로 분류하며 거기에서 더 나아가 남성들의 성적문화를 적극적으로 인정해주는 여성들을 '여성우월주의자들'로 부른다는 것을 이 책을 통해 알게 되었다. 마치 '그가 나의 이름을 불러주었을 때 꽃이 되었다'는 시처럼 페미니즘 안에서 나의 경험과 성향이 정의되는 말을 들으니 많은 것이 명확해지는 기분이었다.
물론 '자유적 페미니즘'의 경계를 어디까지 볼 것이냐하는 문제가 있긴하다. 나는 포르노물에 대해 반대하며 문화창작에 있어서도 일부의 쾌락을 위해 또 다른 일부를 성적으로 억압해서는 안된다고 생각한다.
그렇지만 포르노물의 제작 자체를 법적으로 막아야 하는가는 또 다른 문제이다.
* 예술이냐 외설이냐, 자유냐 규제냐
문화예술에 대한 사전심의는 일부 영역을 제외하고는 많이 사라진 편이다. 성인들에게 문화예술에 대한 무한한 창작과 향유를 보장하는 것은 표현의 자유를 통한 문화적 다양성을 위해서 필요하다.
하지만 문화예술은 현실을 반영하는 것을 넘어 현실에 악영향을 미치는 파워를 종종 드러낸다. 일례로 포르노물로 성행위를 배운 사람은 그 영상이 가지고 있는 '여성의 대상황'라는 가치관을 오롯히 흡수할 가능성이 높다. 극단적인 영상물들을 따라한 범죄가 왕왕 발생하는 것을 보면 더 극명해진다. 사실 그렇기에 문화예술에 나이 제한을 두고 등급을 매기는 것이리라.
우리는 이러한 위험을 떠안으면서라도 표현의 자유를 지킬 필요가 있다고 생각한다. 문화예술에 관한 '일부 규제'라는 것은 비록 일부라 하더라도 창작에 대한 위축을 가져오기 때문이다. 또한 극단적 표현물에 대한 역할에 대해서도 생각해 볼 수 있다.
우리가 인정하고 있지 않은 극단적이고 동물적인 그림자의 모습을 반영해주는 것이 사실 문화예술이 하고 있는 역할이라고 생각한다. 그것이 사회적인 욕망이든 본인 자신의 것이든 우리 모두는 뒤틀린 욕망들을 가지고 있다. 그것을 표현해주는 것이 포르노라면 포르노는 영원히 사라지지도 않을 것이요, 오히려 사회 안에서 일정 역할을 담당하고 있는 지도 모른다. 물론 그에 앞서 중요한 것은 공론화되고 있지 못한 욕망을 당당하게 공론화시켜서 건강하게 발전시키는 것일테다.
칼 융은 그림자에 대해 아래와 같이 언급하면서 우리 모두 그림자를 인정하고 이를 발산할 기회를 가지는 것이 중요하다고 했다. 그렇지 않으면 그림자는 점점 짙어져서 어느덧 우리자신까지 휘감게 된다는 것이다.
"그림자의 인식이 단지 내 안에도 그런 나쁜 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정도에 머무르는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림자의 인식은 그림자가 의식에 동화될 떄 살아있는 효과, 즉 성격의 변화가 생긴다.
그러면 그 열등한 인격을 어떻게 살린단 말인가. 모든 사람이 여기서 도덕적 갈등을 느낀다. 그림자를 살리는 일은 지금껏 생각해온 사회적 도덕관을 어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짓말, 게으름, 쾌락, 사치, 화...그러나 자기자신의 전체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러한 심리적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림자를 살려서 체험함으로써 비로소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 분화되고 발전되어 의식에서 쓸 수 있는 기능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림자가 무의식의 원형층과 연관되어 있을 떄 문제는 좀 다르다. 그것은 자아가 그 존재와 작용을 알고 의식에서 떼어놓아야 할 요소들이다. 그것은 집단적 무의식에 속해야지 의식에 속할 수 없다. 어떤 의미로 그것들은 인간 안에 있는 비인간적이며 또는 초인간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조건들이다."
여기서 반드시 집어야 할 부분은 융이 이야기한 그림자를 살리는 일은 범법행위까지를 포함한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그것은 개인의 도덕적 규범을 타인에게 피해를 주지 않는 선에서 넘는 것을 의미하고 있다.
예를 들어 성인 둘이 합의에 의해서 포르노그래피의 행위를 따라하며 만족을 얻는다면 그것은 규제의 대상일 수 없을 뿐더러 융의 입장에서는 그림자의 발산이기도 하다.
그러나 무의식의 원형층에 있는 괴물같은 그림자에 대해서는 의식에서 떼어놓아야 것이라고 했는데 문화예술적 면에서의 발산까지도 반대한 것인지는 명확하지가 않다.
* 표현의 자유 안에서 페미니즘의 방향은?
예술과 외설, 표현의 자유와 규제에 대해서는 정말 많은 질문들이 오고 갈 수 있다.
- 예술과 외설은 어떻게 경계지을 수 있을까?
- 외설이라고 하더라도 창작 과정에서 아무도 억압하지 않았다면 '표현의 자유'안에서 허용되어야 할까?
- 블로그와 같이, 공개되어 있지만 공식적으로는 개인적인 공간에 본인의 성적 판타지 또는 경험을 올리는 것은 문제일까?
- 아이돌 스타를 주인공으로 하는 동성애적 팬픽(아이돌이 주인공으로 나오는 로맨스물로 팬들이 창작해서 그들의 팬카페에 공유한다. 남성 아이돌 그룹 안에서 무뚝뚝하고 강한 캐릭터인 한 멤버와 부드러운 이미지의 또 다른 멤버 사이의 동성애적 로맨스로 창작되는 경우가 많다.)은 해당 연예인에 대한 순수한 팬심에 불과할까? 아니면 일종의 폭력일까? 아이돌 본인들은 이것을 어떻게 느낄까?
그리고 마지막으로 이런 질문을 해 볼 수 있겠다.
포르노그래피를 창착과 표현의 자유, 그리고 누군가에게 피해를 입히지 않는 선에서 누릴 수 있는 자유라는 면에서 볼 때, 페미니즘은 어떤 태도를 취해야 하나?
중요한 것은 어떤 종류의 문화예술이든 그것을 향유할 때 그리고 그 이후에 취하는 우리의 태도이다.
포르노그래피를 보고 거기서 표현하는 여성에 대해 일반화를 하거나 여성을 대상화하는 태도를 내면화한다면 그것은 큰 문제이다.
자기 욕망의 주인이 된다는 것은 그것이 사회에서 주입한 것이 아닌 진정 나에게서 비롯된 것인지 이고 또한 그 욕망을 잘 컨트롤한다는 의미도 포함한다. 왜곡된 성적 판타지를 가질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이 판타지에 불과할 뿐이라는 것과 그것을 함부로 파트너에게 강요해서는 안된다는 것을 알아야 한다는 것이다.
엘렌 식수는 언어 자체에 우리가 극복해야할 페미니즘적인 환경이 존재한다고 믿었고 여자들을 향해 "자기 자신을 글로 표현하는 것을 자기만의 운동으로 삼으라."며 우리에게 긍정적인 여성성을 스스로 찾으라고 요구했다. 또한 "쾌락과 현실이 공존하는 모순의 장에서 자기 자신을 위해 자신의 위치를 정하라!"고 호소했다.
글쓰기라는 행위는 내가 받아들인 것을 '나'라는 필터로 통과시키는 것을 의미한다. 비단 글쓰기가 아니더라도 우리는 모두 우리 주위에서 쏟아지는 문화와 정보들을 나 자신만의 필터로 통과시킬 필요가 있다. 현주언니는 '나의 삶에 대한 해석의 범위가 넓고 깊어지고, 내 삶을 해석하는 삶의 언어를 획득' 한 것으로 페미니즘 공부를 평가했다. 식수가 이야기한 바대로 '나만의 필터'가 추가되었다는 것이다.
페미니즘이 표현의 자유 안에서 취해야 할 방향은 이 필터에 대해 점검하도록 끊임없이 사람들을 각성시키는 것일게다.
* 나는 나에게 정당했나?
이 즈음에서 위에서 한 번 언급했던 '여성우월주의자'에 대해 생각해보자.
저자는 여성우월주의자에 대해서 이렇게 썼다.
'현명하고 멋진, 이른바 '여성우월주의자'들은 남자들과 어울려 스트립클럽에 가고 <플레이보이지>를 읽고 여자들을 대상화시키는 모든 통상적 의식에 참여한다. 그러나 남자들과 달리 이 '여성우월주의자들'은 감정사의 역할과 피감정사의 역할을 동시에 해내야 한다.'
'여성 우월주의자들은 자신이 외설적인 비디오나 빅토리아 시크릿 카탈로그에 나오는 여성스러운 여자들과 다르다는 점을 남자들에게 어필하면서 그런 여자들에게 감탄하는 남자들을 인정해주어 자신이 속 좁은 여자가 아님을 증명해 보여야 한다. 또한 위트와 공격성 아래에 다른 여자들 못지 않은 섹시한 에너지와 속옷을 숨기고 있음을 은연중에 드러내야 한다. 이 모든 까다로운 과업을 완수할 때에만 외설에 대한 열정을 추구할 수 있다. '
여성들을 대상화하는 의식에 직접 참여하는 정도까지는 아니었지만 나는 10대와 20대 때 여성우월주의자들의 저 '까다로운 작업'을 무의식적으로 계속 수행하고 있었다고 생각한다. 남자아이들에게 '친구'로서 편하게 대하고 다가가는 방법은 저것 이외에는 없는 것 같았다. 여자 쪽에도 남자 쪽에도 안전하게 평화롭게 속하고 싶은 욕심이 그렇게 행동하게 만든 것이다. 좋은 관계를 위해 나의 정체성과 가치관을 꾸겨넣어버린 셈이다.
누군가에게 맞서 자신의 가치관대로 행동한다는 것은 그 사람과의 마찰을 감수해야 하기 때문에 용기가 필요하다. 게다가 그 누군가가 권위를 가진 사람이라면 문제는 더 어려워진다.
저자는 자신을 성희롱하며 부당하게 대한 한 선생에게 어떻게 대응했는지 한 에피소드를 들려준다.
중학교 첫 생물학 시간에 이 선생은 저자와 다른 한 남학생을 앞으로 나오게 한 후 그 둘의 차이가 뭔지 얘기해보라고 학생들에게 묻는다. 그 때 저자의 친구는 매우 현명한 대답을 내 놓는다.
"그 친구의 이름은 스테퍼니입니다. 그리고 그 옆 친구의 이름은 피터입니다."
그리고 저자는 이렇게 이야기하며 자리에 돌아가앉는다.
"죄송합니다만 선생님께서 뭘 하시려 하는지 잘 모르겠습니다. 저는 빠지겠습니다."
선생이 의도한 바는 자명했다. 생물학 수업이었으니 겉으로 보여지는 두 사람의 성적 차이점에 대해 이야기하려고 했을 것이다. 수업 내용으로 그것은 이상한 것이 아니다. 그런데 실제 두 남녀 학생을 모두에게 보이며 이야기하려 했다면 문제는 달라진다.
최근 <파리에서의 마지막 탱고>라는 영화의 주연 여배우가 영화를 찍을 당시 성교장면에서 남자배우와 감독이 자신에게 이야기도 하지 않은 채 대본에 없는 장면을 추가해 무척 당황스러웠고 실제로 강간당하는 느낌이었다고 고백한 것이 다시금 화제가 되었었다. 실제 강간이 아니었다는 것은 문제가 아니다. 문제는 동의없이 찍은 그 장면으로 여배우는 수치심을 느꼈고 바로 이 점을 감독이 원했다는 사실이다. 실제로 감독은 인터뷰에서 "여배우가 연기가 아닌 실제 수치심을 느끼게 하고 싶었다."고 이야기했다. 감독은 배우에게 특히나 거장남자 감독이 신인 여자배우에게 휘두르는 권력이란 인간의 근본 감정까지 조절할 수 있다는 절대권과 같다.
지금 생각해보면 청소년기의 나는 그렇게 어른들의 권위에 저항심을 품었으면서도 실제로 저항행동을 한 적은 없다. 수능시험날 영어듣기평가에서 1번 문제가 심하게 들리지 않는 문제가 발생했었다. 내가 시험을 본 반의 아무도 이에 대해 의의를 제기하지 않았고 나도 결국 아무 얘기도 하지 않은 채 문제를 찍고 말았다. 그런데 나중에 들어보니 다른 반에서는 항의를 해서 다시 문제를 들은 경우도 있다고 했다. 나의 인생 전체가 걸려있다고 생각한 날이었음에도 불구하고(실제로는 아니지만. ^^;;) 나는 나의 피해에 대해 어떤 행동도 취하지 못했다. 나는 이 모습이 내가 얼마나 권위에 쉽게 복종하는 타입이었는지를 알려주는 사건이라고 생각한다.
심지어 내 몸에 대해서도 나는 정당한 권한을 행사하지 못할 때가 많았다. 초등학교 2학년 때 교통사고 후 회음부 수술 부위를 빨리 아물게 하기 위해 하루에 한두번 뜨거운 물에 회음부를 담궈야 했다. 어느 날 집에 손님들이 찾아왔고 그 중엔 나보다 몇 살 위의 언니와 오빠도 있었다. 그런데 엄마는 뜨거운 물에 앉을 시간이라며 손님들이 있는 거실에 내 대야를 내왔다. 나는 팬티를 벗었고 모두가 보는 앞에서 대야에 앉아 몇십분을 있었다. 물론 모두의 시선이 나에게 쏠렸음을 말할 것도 없었다. 그런데 손님들이 돌아간 후 엄마가 '웃으며' 나에게 말했다. "손님들 있어서 안한다고 할 줄 알았는데 그냥 하더라."
엄마는 나를 떠본 것이었다. 장난스럽게! 나에 대한 절대적인 권위를 가지고 있는 사람이 나의 몸에 대해 가진 내 의지를 시험했다. 이것은 아직까지도 내 머리 속에 너무나 충격적인 사건으로 남았있다. 나는 그 이후 내 몸을 어떻게 대해왔나. 내 몸은 진정 나의 것이었나?
그렇다면 생각해보게 된다. 나는 나 스스로를 얼마나 정당하게 대해 왔는가.
다른 사람에게 나를 정당하게 대하라고 이야기하기 앞서 스스로도 돌아볼 필요가 있다.
* 남성과 여성은 같지 않다!
남성과 동등한 권한을 여성에게 부여하고자 싸웠던 1세대 페미니즘에서는 남성과 여성은 같았고 다만 사회화될 뿐이라고 했다. 그런데 2세대 페미니즘에 들어서 페미니즘 안에서 남녀의 차이를 인정하고 이를 서로 존중하는 방향으로 나아가야 한다는 소리가 나오기 시작한다.
청소년기의 도덕성 연구를 위해 아래와 같은 실험이 이루어진다.
"형편이 어려운 하인즈라는 남자가 암에 걸려 죽어가는 아내를 위해 약를 훔쳐서라도 아내를 구할 것인지 고민 중이다. 하인즈는 과연 약을 훔쳐야 할까?"
남학생은 당연히 목숨이 돈보다 소중하니 훔쳐야한다고 했지만 여학생은 '아내는 남편이 감옥에 가는 걸 원치 않을 것'이라며 어딘가에서 돈을 빌리거나 외상을 부탁하는 다른 대안을 내놓았다. 관계가 단절되지 않고 유지되는 방향으로의 해결책을 내놓은 것이다.
연구자는 이 결과를 남학생보다 여학생이 도덕적으로 미성숙했다고 결론지었지만 길리건은 남학생은 세상을 '정의윤리적' 관점으로 바라보았꼬 여학생은 '관계윤리적' 관점에서 바라본 것이며 이 모두 인정받아야 한다고 했다.
사실 이 문제를 보았을 떄 나는 즉각적으로 '약을 훔쳐야지.'라는 정의윤리적 답변을 했다. ^^;;;;
그랬기에 다른 모임벗들이 "아내가 정작 치료를 원하지 않을 수도 있다. 평화롭게 임종을 맞고 싶을 수 있다" "훔치겠다는 것은 단지 자기 희생의 환타지에 빠지는 것." 등등의 다양한 이야기를 쏟아놓을 때 너무 신기해서 눈의 휘둥그레졌다. 그리고 그렇게 문제를 단순화할 수 없다는 것에 공감하게 되었다.
저자도 그랬지만 나 또한 딸을 낳고 나서 '성이 가져오는 본연의 차이'에 대해서 절감하게 되었다.
그렇게 키울 생각도 없었지만 어떤 양육의 시도를 할 새도 없이 딸은 예전의 아들과 다른 행동을 보였다.
신발장에서 내 구두를 찾아신고 인형을 등에 둘러없었으며 다 먹은 간식그릇을 오빠 것까지 포개서 가져오는가하면 먹을 것은 꼭 나누려고 했다.
언제나 예외는 있지만 경향성은 분명 존재하며 이에 대해 충분히 존중하면서 개별성을 인정하는 것이 필요하겠다.
* 당신은 유일하다
남녀 차이를 인정한 2세대 페미니즘을 넘어 3세대 페미니즘에서는 여성들 사이에서도 차이가 존재함을 이야기한다. '개별성'에 방점을 찍는 것이다. 개개인이 처한 상황과 기질을 인정하자는 점과 유전적으로도 어느 한쪽의 성으로 구별지워지지 않는 사람들이 존재한다는 점에 대해 고려하는 것은 좋으나 개인에게 일어나는 사건에 대해 사회적 힘을 배제함으로써 이제까지 페미니즘이 이루고자했던 모든 시도들을 무력화시켜 버렸다.
예를 들어 이전 세대의 페미니즘 진영에서 벌였던 '밤길되찾기 시위'같은 캠페인은 거짓강간문화의 상징이며 여자를 주체성이 부족하고 무력한 존재로 그리고 있다고 비판했다.
"많은 사람들이 포스트모더니즘이 정치를 방해한다고 여깁니다.포스트모더니즘이 정치적 활동을 유행에 뒤떨어진 것으로 만든다고 생각하는 거죠. 하지만 사실 포스트모더니즘 이론은 관용정신과 포괄적 정의를 가능케 함으로써 그 정의들 내에서 조작할 여지를 더 많이 주었습니다."
"지금으로서는 '여성'이라는 범주의 수행 가능성을 확장시키는 것을 목표로 삼는 게 어떨까 합니다. 우리는 여성이라는 역할을 새롭고 다른 방식으로 수행할 필요가 있는 것일 뿐인지도 모릅니다."
남성, 여성의 이분법적 구분을 넘어 여성의 염색체에 남성의 성기를 가진 사람, 반대의 사람, 동성애자, 양성애자, 성전환자 등등 세상은 나날이 복잡해져 가고 있다. 이러한 사회 안에서 포스트모더니스트들이 '성적인 구분을 바탕으로 한' 페미니즘 운동에 대해 회의적인 시각을 갖기 시작한 건 당연한 듯도 하다.
* 페미니즘을 넘어 휴머니즘으로
그렇다면 이러한 복잡성의 시대에 우리는 페미니즘 공부 이후 어떠한 삶을 추구해야 할까?
현주언니가 학생들과 함께 했던 자유학기제 수업에서 한 여학생은 '나의 바람'에 이러한 리스트를 적었다고 한다. "항상 친절하기, 힘들어도 참기" 비단 그 여학생이 여자이기 때문만은 아닐 것이다.
우리 사회에서 우리에게 강요하는 부분은 분명하다 '갈등을 일으키지 말 것. 얌전히 있을 것.'
내가 페미니즘을 공부하며 인상깊었던 것은 '관계정의'를 중요시하는 여성들이 그 관계를 뒤흔드는 것을 감수하고 자신의 목소리를 내기 시작한 그 지점이다. 결혼 후 사람들은 특히 여성들은 남편, 자식, 시댁 등 타인의 욕망과 자신의 욕망이 부딪히는 경험을 많이 하게 된다. 이 과정에서 내려진 결론이 억압인지 사랑과 책임인지 우리는 인지할 필요가 있다. 너와 내가 온전하게 서로를 바라보는 진정한 관계를 위해 우리는 앞으로도 자잘한 균열들을 경험해야 할 것이다.
포스트모너디스트들의 이야기도 맞다. 우리 모두는 스스로 개별적으로 존재하며 누구와도 같지 않고 그래서, 존엄하다. 내가 나의 욕구와 가치관을 올바로 깨닫고 그것을 스스로 인정하고 행동할 것. 그리고 다른 사람의 개별적 욕구와 가치관도 존중할 것. 그래서 결국 페미니즘이라는 용어가 사라지고 휴머니즘이라는 용어로 대체될 수 있는 날을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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