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빨래하는 페미니즘> 결혼과 육아 그리고 나 본문
빨래하는 페미니즘 - 스테퍼니 스탈 지음, 고빛샘 옮김, 정희진 서문/민음사 |
<빨래하는 페미니즘>에서 저자는 '결혼과 출산을 계기로 자신의 삶을 잃어간다'는 케케묵은 이야기를 결국 직접 삶으로 경험해내다가 출구를 찾기위해 페미니즘과 다시 만나게 된다.
결혼, 특히나 출산과 육아가 여성의 삶에 미치는 영향이란..더 말해 뭐할까.
그래서 이번에는 모임벗들에게 물어보고 싶었다. 그들의 삶에서 결혼과 출산, 육아는 어떤 성격의 과정이었고 삶을 어떻게 변화시켰으며 지금 이 자리에서 나의 삶은 어떤지를.
어렸을 때 나는 거대한 포부를 가지고 있었다. 내가 죽기 전에 이 세상 모든 사람에게 내 이름을 알리겠다는.
구체적인 행동은 없으면서 내 분야에서 최고가 되겠다는 열망만 활활 타오르던 시절이었다. 당연히 그 시절에는 결혼, 출산, 육아로 인한 경력단절이란 생각조차 하지 않았으며 집에서 육아를 하더라도 프리랜서로 경력을 이어가는 환상적인 시나리오를 꿈꿨다.
하지만 어른이 되고 현실과 이상이 점점 서로 좁혀지면서 나의 능력에 대한 거대한 기대치는 사라지게 되었다. 업무에 대한 열정이 없는 상태에서 임신 후 피부트러블까지 심해지자 자연스럽게 퇴사를 하게 되었다. 게다가 조부모가 아닌 이상 생판 모르는 남에게 아이를 맡긴다는 건 나에게는 어려운 일이었다. 남편이 평소에 걱정할 정도로 나는 사람들의 선의를 믿는 편이지만 아이와 관련된 경우는 아니었다. 결국 나는 전업주부, 전업맘이 되었다.
지금 나는 다시 회사로 돌아갈 수도 없고 돌아가고 싶은 마음도 없다. 하지만 뭔가 의미있는 일을 하고 싶고 만약에 가능하다면 그 일이 수입과 연결되면 더 좋겠다는 생각은 한다. 가사와 육아가 체질에 맞는 건 아니지만 지금의 상황에 대체로 만족하는 편이다. 내가 가지고 있는 막연한 불안감, 지금 무언가 준비해놓지 않으면 아이들이 모두 나를 떠나갔을 때 빈둥지 증후군을 겪으며 좌절하는 건 아닐까 하는 불안감은 곰곰히 생각해보면 내 내면에서 올라온 것이 아니라 주변에서 주어진 것이다.
다른 벗들의 이야기도 들었다. 워킹맘인 경우, 아예 사회생활에서 단절된 경우, 예정된 복직을 기다리는 경우, 막연하지만 다시 예전의 일을 다시 하게 되길 기다리는 경우 등 여러 케이스가 있었다. 나처럼 출산과 육아가 오히려 퇴직의 기회였던 경우도 있고, 출산과 육아로 인해 경력이 단절된 것에 실망하고 남편에 대해 상대적 박탈감을 느끼는 경우도 있었다.
한 사람이 이야기를 시작하면 한 여성의 삶이 비단처럼 촤르르 펼쳐지는 듯 했다.
불현듯 나는 느꼈다. 인생은 각자 이렇게 아름답구나. 고민, 슬픔, 갈등 그 가운데 작은 기쁨들이 덕지덕지 붙은 우리네 인생은 참 아름답고 빛나고 있었다.
이제까지의 모임에서 서로의 인생에 대한 이야기, 깊은 내면의 이야기를 하지 않은 것은 아니었지만 나는 그 이야기들을 우리가 책 내용을 더 잘 이해하기 위한 촉매제로 생각해왔던 것 같다. 지식과 사상을 이해하기 위한 예제처럼 말이다. 그런데 지금 우리 인생 그 자체가 참 곱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면서 갑자기 예전 기억이 하나 떠올랐다.
대학교 때 나는 남자후배 두 명이 하는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그 때 한창 유행하던 영화를 같이 보러 갈 사람이 없다고 서로 투덜대고 있는 거였다. 나는 "둘이 같이 보러가면 되잖아!"라고 얘기했는데 돌아온 답은 "어떻게 남자 둘이 영화를 봐요!"였다.
그 때 나는 깨달았다. 가부장제의 억압 속에 갇힌 건 비단 여자들뿐이 아니라는 걸. 오히려 여성들은 드러나는 억압과 차별에 맞서고 대들면서 치열하게 극복하려고 꿈틀대지만 남성들은 당연하게 주어지는 권리과 편안함 속에서 안주하며 스스로를 옥죄고 있다는 것을 말이다.
나는 내가 여성이라는 것이 축복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성찰하는 인간'으로서 살아갈 수 있는 축복.
자궁이 여성의 신체인 이상 여성은 출산과 육아, 우리에게 매달리는 꼬물이들에게서 떨어질 수가 없다.
나의 삶이 휘발되어 사라진듯한 삶의 공백기는 누군가에게는 모성의 충만함으로 채워질 수도 있지만 많은 이들에게는 공허한 시기이다.
장미빛 해석일 수 있지만 나는 여성의 이 취약점이 오히려 기회일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분석심리학 3부작>에서도 나온 바 있지만 인생의 커다란 변곡점을 거치면서 사람은 자기자신을 스스로 돌아보는 기회를 갖게 된다. 극한 상황 속에서 내 안의 그림자를 대면하게 되기도 하고 자신이 지켜온 가치관이 흔들리는 경험을 하기도 한다.
사회적 약자인 건 여성인 것, 그리고 출산과 육아를 경험하는 것은 우리가 현재에 안주하지 않고 끊임없이 미래를 고민하게 만드는 축복인 것이다.
예전에 육아 잡지에서 경력 단절로 일컬어지는 육아의 시기를 이력서에 '커리어 경력' 상으로 기재해본 글을 읽은 적이 있었다.
"이 기간 동안 저는 '고집 센 상대와의 협상법, 언어 표현 이면의 진심을 읽어내는 기술, 상대에게 맞추어 제 욕구를 설명하는 방법' 등을 익혔습니다."
굳이 꾸역꾸역 능력치로 환산하여 이야기하지 않더라도 내 인생이 사라져버린 듯, 아무 것도 아닌 듯한 그 시간이 진짜 아무것도 아닌 시간은 아니라고 생각한다.
뿌리까지 뒤흔드는 페미니즘 혁명을 위해서는 결혼과 출산에 대한 파업이 필요할지 모른다. 그리고 어쩌면 그것이 가장 쉬운 방법일 것이다.
하지만 그 과업을 받아들이기로 했다면 그 안에서 페미니즘을 찾아보자.
현주언니는 지난 번 모임에 대한 내 글을 읽고 '삶과 페미니즘이 결합점을 찾아가는 과정'이 보이는 것 같다고 이야기했었다. 그제야 나도 내가 풀어야할 숙제가 명확해졌다. 나는 그 글을 '나는 여성으로서 어느 지점에 있는걸까 알아가보자.'라는 걸로 마무리했었으나 결국 그것은 '나만의, 내 삶 안의 페미니즘을 찾아가보자.'는 것이었음을 알겠다.
융이 이야기했듯이 규정된 틀은 페르조나를 만들고 페르조나에 갖혀서는 진정한 자기로 향할 수 없다. 방법, 과정과 그 끝의 목표상이 분명한 수행이 진정한 내면으로의 인도를 하지 못하는 이유가 거기에 있다.
페미니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페미니즘, 페미니스트는 이런 모습이어야 한다! 는 틀은 애초에 무의미하다.
우리에게는 지구상에 살고 있는 사람수만큼이나 다양한 삶이 존재하고 그 삶 안에서 각자 '개개인의 페미니즘'을 발견해가야 할 것이다. 각자의 삶 속에서 무지개빛으로 반짝이는 고민과 실천들로 페미니스트 생활인이 되어보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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