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자기와 자기실현> 내용 정리 본문
자아 - 의식의 중심
자기 - 의식과 무의식을 통틀은 전체정신의 중심.
자기실현은 인간의 핵심적인 과제이며 개인의 평범한 행복을 구현하는 과정이다.
그것은 성인군자나 초인이 되라는 요구가 아니라 당신자신이 되라는 것이다.
개인이 가지고 있으나 아직 실현하지 못한 삶을 가능한 한 많이 실현하는 것이다.
* 프로이트와 융의 차이점
'무의식에서 자아의식이 싹텄다.'는 생각은 프로이트의 관점과 다른 것이다.
그는 '최초에 자아의식이 있었다. 이로부터 억압에 의해 무의식이 생겨났다.'는 관점을 견지하였다.
프로이트의 정신분석의 관점은 어떻게 자아가 위험한 무의식의 충동을 승화시키는가를 강조하는데 비해
융은 어떻게 자아가 무의식의 창조성을 받아들이느냐에 집중한다.
페르조나는 바깥세계와의 관계, 즉 외적 관계의 산물인 외적인격이다.
그런데 자아는 외적관계 못지않게 정신의 내면세계와의 내적관계를 수립해야 하며 자아로 하여금 내면세계로 이어주는 내적인격, 심혼(아니마, 아니무스)과 관계를 맺어야 한다.
청소년기에는 자아와 무의식의 단절, 즉 심혼과의 관계상실이라는 희생을 감수하고서라도 페르조나는 형성되어야 한다.
페르조나와의 동일시가 문제되는 것은 자기실현이 본격적으로 시작되는 중년기부터이다. 중년에 이르면 자아는 페르조나는 구별하고 내면세계를 성찰하는 작업에 주력해야 한다.
청소년기는 그림자가 유난히 짙어지는 시기이다.
자아의식이 밝고 긍정적인 이상상만을 치열하게 구현하고자 노력하기 때문에 의식적 인격과 무의식적 인격 사이의 긴장과 분리가 생기는 것이다.
* 자기와 신의 상
자기는 '우리 안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
그것은 미합리적인 것, 정의할 수 없이 존재하는 것으로서 '자기'의 내용에 대해 우리는 아무 말도 할 수가 없다.
자아가 일단 그것을 의식하여 체험하면 '자기'가 주도권을 차지한다.
"이제 내가 사는 것이 아니라 그리스도가 내 안에 살고 있다."는 구원의 느낌을 갖게 되는 것이다.
"나는 원형이 진리인지 아닌지 모릅니다. 나는 다만 그것이 살아있고 내가 그것을 만든 것이 아님을 알고 있습니다."
원형은 뇌구조에 뿌리박고 있어서 생리적으로 증명가능하다. 뇌간 가운데 어떤 부위의 전기적 자극만으로 만다라 환상이 일어나는 실험결과가 있다.
진정으로 우리 안의 그리스도를 받아들이고 그와 하나된 사람, 도의 경지에 있는 사람, 자기 마음의 불성을 실현한 사람은 모두 자기를 실현하는 체험을 하고 있는 것이나 다름없다.
어떤 이들은 융이 신을 '자기'로 대치하고 있다고 비난했다.
융은 역설하기를 자신이 심리학적으로 다룰 수 있는 것은 사람들이 '신'이라 하면서 상상하고 체험하는 심리적 사실일 뿐이다. 자신은 심리적 사실로서의 신의 이미지를 말하고 있는 것이지 신 자체에 관한 형이상학적인 주장을 펴고 있는 것이 아니라는 것이다.
"자기는 신의 대치물이 아니며 아마도 신적인 은혜를 위한 그릇일 것."
"자기와 신이 비록 실제로는 동일한 것처럼 보이지만 정말 같은지 나는 증명할 수 없습니다."
"내가 신을 말할 때 이것은 심리적인 상입니다. 자기도 마찬가지로 인간의 초월적이며 기술할 수도 파악할 수도 없는 전체성의 정신적인 상입니다."
<자아와 무의식의 관계>에서 융은 자기는 우리 속의 신이라고 할 수 있다고 했다. 우리의 전체 심적 생활의 시초는 어떨 수 없이 이 점에서 뿜어져나오며 모든 최고의, 최후의 목표는 그에게로 달려가는 듯하다고 했다.
* 그리스도는 자기의 상징으로 합당한가?
"그리스도는 우리 안에, 그리고 우리는 그 안에 있다. 그의 왕국은 값진 진주, 밭에 숨어있는 보배, 커다란 나무가 될 작은 겨자씨, 그리고 하늘의 도시이다. 그리스도가 우리 안에 있듯이 그의 하늘의 왕국은 우리 안에 있다. 이러한 일반적으로 알려진 시사만으로도 그리스도 상징의 심리학적 입장의 특징을 제시하기에 충분할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시의 원형을 구체적으로 보여주고 있다."
그런데 문제는 그리스도상이 과연 인간의 모든 것을 포괄하는 전체상인가 하는 논란이다.
물론 그리스도의 속성들은 자기의 구체화라 할 수 있지만 심리학적 입장에서 보면 원형의 반일 뿐이고 그 다른 반은 반기독이라고도 했다. 그러나 그럼에도 불구하고 융은 기독교의 관조세계에서 그리스도는 틀림없이 자기를 묘사하고 있다고 한다.
인간은 전력을 다해 완전을 지향한다. 그러나 원형은 자기완성을 온전성이라는 전혀 다른 방식으로 이루어내며 원형이 우세하면 모든 의식적 노력에 반해서 온전성이 강요된다. 이런 상황은 완전한 인간이며 동시에 십자가에 못박힌 그리스도의 상에 필적한다.
그리스도가 자기의 상징이라는 주장과 악을 떼어놓은 그리스도상은 부족하다는 지적, 그리고 그리스도상이 너무도 완전해서 원형의 온전성을 넘어선다는 말들은 서로 무슨된 견해처럼 보인다. 그러나 이것은 전체성의 여러 측면을 말하고 있는 것이다.
"그리스도는 자기의 유효한 상징이 아니고 그것을 가장한 대치물인 뿐이라는 견해에 대해, 그 말이 엄밀히 심리학적 비판을 작용할 수 있는 최근의 시기에 관계된다면 찬성하겠다. 그러나 만약 그것이 심리학 이전의 시대를 판단하는 것이라면 결코 찬성할 수 없다....전체성의 표상은 그때마다 사람이 그렇게 있는 전체인 것이다. 우리의 전체성 개념이 마찬가지로 보충을 필요로 하지 않는 것이라고 누가 보증하겠나."
그것은 정지되어 있는 것이 아니라 부단히 움직이고 변하고 있는 것이다. 자아도 변하고 자기도 변한다.
심리학적으로 자기는 인간의 정신적 전체성이라고 정의한다. 인간이 자신보다 더 포괄적인 전체성을 전제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자기의 상징이 될 것이다. 그러므로 자기의 상징이 언제나 심리학적 정의가 요구하는 전체성을 가지고 있는 것은 아니다. 그리스도의 형상도 또한 그러하다.
그리스도상에 응축된 고통, 죽음, 부활의 의미, 인간이면서 신인 그리스도의 대극성과 초월성은 비록 그 완전성 때문에 현대인의 심성에서 발견되는 악과 물질성이 배제되어 있다고 하더라도 그리스도상을 하나의 전체성의 상징, 즉 자기의 상징이라고 부르는데 방해되지 않는다.
"붓다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자기의 구체화이다....붓다는 그것을 이른바 이성적 통찰로, 그리스도는 숙명적 희생으로 성취하였다."
전체정신인 자기는 결코 어떤 이상적 인간형이나 성자의 규범이 아니다.
그리스도의 모방이나 붓다 모방만으로는 결코 자기를 실현하는 것이 될 수 없다. 그것은 집단이 만들었고 개인에게 요구하는 역할, 즉 페르조나와 동일시하는 것과 다름없다.
자기는 진정한 의미에서 그 사람의 개성이다. 실현해야 할 것은 집단규범으로서의 그리스도나 붓다를 흉내내는 것이 아니라 개성적인 길을 걸어간 그리스도와 붓다의 그 정신과 용기다.
자기실현의 목표는 결코 모범시민, 도덕군자, 원만한 사람의 상이 아니다. 이것들은 다시금 집단에 의해 만들어진 가상으로서 자기의 페르조나에 불과하다. 자기실현은 그러한 집단인간이 되지 않게 위한 작업이다.
우리 안의 무의식에 있는 여러 요소들을 깨닫는 심리학적 체험이지 고등종교에서 말하는 깨달음과 꼭같은 것이라 말하기는 어렵다. 그러나 고등종교의 자기인식과 융의 자기실현 과정의 자기인식과는 많은 점에서 닮은 면이 있다. 융은 그리스도와 붓다가 자기를 실현한 사람이라고 말한 일은 있으나 자기실현이 된 사람의 모습이 어떤 것인지를 묘사한 것이 거의 없다. 그는 의식화를 통해서 세계에 매달려 있지 않은 상태, 보다 넓은 객체의 세상에 참여하게 된다. 예민한 자아세계에 대한 집착은 언제나 무의식의 내용을 밖에 투사하거나 스스로 이에 사로잡힘으로써 생긴다. 대상에 투사된 무의식의 일부를 되돌려오면 그만큼 그를 얽매던 집착에서 해방되고 대상과의 관계가 자유로워질 수 있다.
한가지 분명한 것은 자기실현이나 개성화는 사람을 편안하게 하는 것이 아니고 고통을 감내하는 힘을 주고 고통에서 의미를 발견하게 한다는 사실이다.
고통에는 기회가 있다. 나는 왜 이러한가?하는 물음을 외면하지 않고 계속 자신을 들여다보는 작업에 정진한다면 그는 중요한 통찰을 얻게되고 새로워질 것이다.
자기실현의 관제는 한편으로는 자기와 페르조나를 분리하여 구별하는 일이고 다른 한편으로는 밖의 대상으로 투사된 자기의 무의식의 내용들을 인식하여 자기의 분신들을 자신에게로 돌려오는 작업이다.
그리스도는 가족보다 더 위에 존재하는 하느님을 사랑하라고 했다. 집단사회의 규범인 페르조나를 버리고 자아보다 위에 있고 전체를 포괄하는 자기에게 이바지한다는 뜻이 있다.
사회규범과 내적인 충동 사이에서 고민하고 방황하지 않고 내린 결정을 전체정신의 해답이 아니다. 자기의 길은 의식과 무의식이 전체로서 응답할 때 비로소 열리는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는 무의식을 들여다보고 참을성있게 '자기'의 의도를 알아보는 작업이 있어야 한다.
자기실현을 위해 페르조나를 버리라 하지는 않는다. 페르조나는 필요한 것이다. 버리는 것은 페르조나에 대한 집착이지 페르조나 자체가 아닌 것이다.
우리의 무의식의 원천인 신화적 토대와의 관계가 단절되면 정신생활에 심각한 손실을 가져온다. 그러한 단절은 '종교적 태도'의 상실에서 온다. 다시 말해 사람들이 신성한 것에 대한 성실하고 주의깊은 관조의 자세를 상실하기 때문이고 이것은 곧 현대사회의 보편적인 문제이다.
* 자기실현의 방법
자기실현의 구체적 방법은 분석을 통한 무의식의 의식화이다. 꿈의 의미를 깨닫고 꿈의 상징으로 제시된 무의식의 내용을 의식으로 동화시킴으로써 의식의 확대를 시도하는 일이다.
- 페르조나의 인식
페르조나와 나를 구분하는 작업 - 자신이 가진 페르조나가 소용없는 환경에 자신을 옮겨보는 일이다.
분명한 것은 자기실현 과정에서 가아는 항상 페르조나와 자기를 구별할 수 있는 중립적인 자리에 있어야 한다는 사실이다. 전통적 가치관에 대해서도 편견없이 그 공과를 심리학적 입장에서 살피는 공부가 필요한 것이다.
자기는 때로 집단정신에 반하는 행동을 요구할 수도 있고 때로는 페르조나라고 부르는 집단적, 전통적 행동규범을 긍정적으로 수용하는 것이 전체에 이르는 길이라고 제시할 수도 있다.
있어야 할 페르조나가 발달되지 못하고 무의식에 있는 경우도 있다. 남성은 우선 남성다워야 하고 여성은 우선 여성다워야 한다.
- 그림자의 인식
정치판은 가장 추악한 그림자의 상호투사의 터전이 된다...그것을 보고 혀를 차는 국민의 마음도 그렇게 순수한 것이 아니다...여론몰이로 정의를 부르짖고 남의 부정을 규탄하는 사람들은 먼저 자기자신의 마음을 살펴야 한다.
그림자의 투사가 자주 일어나는 이유 가운데 하나는 투사함으로써 사람들의 마음이 일시적으로 편해진다는 데 있다. 왜냐하면 그 순간 자기는 깨끗한 사람이고 나쁜 것은 다른 사람이라고 믿기 때문이다.
꿈에 나타나는 그림자가 부정적이면 부정적일 수록 그 사람의 의식태도는 완벽하게 도덕적임을 반증하는 것이다. 아주 좋은 사람이 악몽에 시달린다. (화장실에 오물, 깡패에게 시달린다.)
자신의 그림자를 자기의 것으로 되돌려오는 작업은 그 사람에게 관용과 여유를 안겨줄 것이다. 그럼으로써 그와 다른사람과의 관계도 좋아지고 오해가 풀리게 된다.
모든 꿈은 꿈꾼 사람 개인의 연상과 감정 반응에 따라 그 해석이 다르다. 특히 꿈속에서 겪는 꿈꾼 사람의 꿈-자아의 느낌이 중요하다.
그림자의 인식이 단지 내 안에도 그런 나쁜 속성이 있다는 사실을 인정하는 정도에 머무르는 것만으로 되는 것은 아니다. 그림자의 인식은 그림자가 의식에 동화될 떄 살아있는 효과, 즉 성격의 변화가 생긴다.
그러면 그 열등한 인격을 어떻게 살린단 말인가. 모든 사람이 여기서 도덕적 갈등을 느낀다. 그림다를 살리는 일은 지금껏 생각해온 사회적 도덕관을 어기는 일이기 때문이다. 거짓말, 게으름, 쾌락, 사치, 화...그러나 자기자신의 전체에 이르기 위해서는 이러한 심리적 모험을 감행해야 한다. 왜냐하면 오직 그림자를 살려서 체험함으로써 비로소 무의식의 열등한 인격이 분화되고 발전되어 의식에서 쓸 수 있는 기능으로 변하기 때문이다.
그러나 그림자가 무의식의 원형층과 연관되어 있을 떄 문제는 좀 다르다. 그것은 자아가 그 존재와 작용을 알고 의식에서 떼어놓아야 할 요소들이다. 그것은 집단적 무의식에 속해야지 의식에 속할 수 없다. 어떤 의미로 그것들은 인간 안에 있는 비인간적이며 또는 초인간적 행위를 할 수 있는 조건들이다.
다시 말해서 꿈에 나오는 어두운 동반자가 꿈꾼 사람이 극복해야 할 결점인지 삶의 의미있는 부분으로 받아들여야 할 것인지를 추정하는 것은 자기실현의 과정에서 부딪히는 가장 어려운 문제이다. 무의식에서 무엇을 시사하는지 불확실할 때 우리는 옳은 것처럼 보이는 것을 우선 용기있게 행하면서 무의식이 제시하는 방향을 주시할 필요가 있다.
- 아니마, 아니무스의 인식
융의 아니마, 아니무스 학설의 핵심은 자아와 자기 사이를 매개하는 어떤 자율적 기능인 무의식의 내적 인격의 존재에 관한 학설이지만 실제적 측면에서는 남성과 여성은 자기실현에서 어떻게 다른 과제를 수행해야 하는가를 가르쳐주는 학설이다.
아니마, 아니무스의 가장 핵심적인 특징은 자율성이다.
이성에게로의 어쩌지 못하는 이끌림, 그것이 아니마, 아니무스 원형의 투사상을 경험한 것이다.
남성의 아니마의 의식화는 무엇보다도 이성에 눌려, 혹은 남자로서의 무뚝뚝함을 페르조나로 삼는 데서 억압된 섬세한 정감을 되살리는 작업으로 시작되어야 한다. 정감을 말과 행위로 표현하는 연습이 필요하다.
융은 아니마를 의식화하려면 아니마의 객관화를 시도할 것을 권하고 있다. 어떤 의미있는 목소리의 주인공, 어떤 불쾌한 기분을 나타내는 부인을 상상하고 그녀와 대화를 나누는 적극적 명상을 말한다.
자기의 기분을 서술하고 왜 그런 기분이 되었는지 객관적으로 생각해보는 것만으로도 큰 성과를 얻을 수 있는 것이다. 기분의 묘사는 그림, 글, 춤 등 자기가 하고 싶은 방법을 쓰면 된다.
엠마 융 - 여성적 본성이 훼손된 여성운동가의 남성화를 비판.
아니무스를 부정적 아니무스의 객관화를 통해서 의식화하는 것은 현명치 못하다. 아니마는 객관적으로 표현됨으로써 분화시키고 의식에 통합될 수 있지만 아니무스 의견을 적극 표현시키는 것은 그 의견의 완고함과 경직성을 오히려 고착시키고 촉진하게 될 우려가 있다.
여성은 먼저 사물을 객관적으로 보는 연습을 해서 자신이 확신이 옳은지를 살펴보아야 하고 꿈에 나타난 무의식의 권고가 자신의 확신에 어긋난다고 해서 그것을 배격해서는 안되고 받아들여야 한다고 했다.
부정적 아니무스 의견에 대한 비판적 검토는 여성 자신의 자발적 성찰이어야 하며 동료나 남성 선배와의 토론을 통해서 실행되어서는 성과는 거두기 어렵다.
현대여성은 취직하거나 대학에 남거나 하지 않으면 마치 남에게 뒤진 사람처럼 생각한다...다만 생각해야 될 것은 혹시 그녀는 시대변화에 따라 달라진 가치관, "여성은 독립해야 하며 따라서 취직하여 사회활동을 해야한다."는 또 하나의 페르조나 앞에서 자기가 여성으로 이룩한 귀중한 성과를 송두리째 부인하려는 것은 아닌가 하는 점이다.
엠마 융이 "여성의 창조성은 생활의 영역에서 표현된다."고 한 말을 새삼 회상해볼 일이다. 그녀는 어느 역할에서든 생활 전반을 만들어가는 일이 여성의 창조적 힘의 진정한 장이라고 했던 것이다. 엠마 융은 여성이 아니무스를 의식화하여 자기실현을 하려면 무의식의 의식화에 앞서 여성으로서의 자긍심을 높이는 것이 시급하다고 강조했다.
외향적 시대조류 속에서 무의식 내면에서 올라오는 새로운 영감에 마음을 열 수 있는 여성 특유의 비합리적 예감능력과 개인적으로 관계를 맺는 감성기능을 매우 가치있는 여성의 속성인 것이다.
사회에서 남들이 평가를 하든 안 하든 스스로 생각하고 판단하는 힘을 기르는 것이 중요한 것이다. 아니무스의 최고 단계인 자혜로운 여신은 옛날 여인들이 밥솥에 쌀을 앉히고 물을 부은 다음 손을 답가 물높이를 가늠하고 가마솥의 불길을 조절하는 데서, 혹은 된장을 떠서 담그는 과정의 사려깉음과 솜씨에서 발휘되기도 하는 것이다.
여성의 자기실현에서 아니무스의 의식화 작업은 여성에게 선천적으로 구비된 좋은 점을 부정하고 다른 것으로 대치하는 작업이 아니고 여기에 여성의 무의식의 창조적 남성성, 즉 판단의 객관성과 명징성, 용기와 진취성, 열린 마음, 융통성 있는 실제적 추리능력을 보태는 작업이다.
* 자기인식과 자아팽창의 위험성
인간이 순수하게 내적세계로 향하고 그 자신을 알려고 노력할 때는 그의 주관적인 생각과 느낌을 곰곰히 생각하는 작업을 통해서가 아니라 꿈이나 순수한 환상과 같은 자기자신의 객관적인 본성의 표현을 추구할 때 조만간 자기가 나타난다.
무의식의 의식화가 진행되어 무의식의 그림자와 아니마, 아니무스에 들어있던 세력이 감소되어 의식으로 편입되면 자아의식은 힘을 얻게되고 이제까지와 달라 세상을 보게 된 것에 보람과 희열을 느낀다. 그러나 이 대 주의해야 할 것은 성급하게 "이제 모든 수수께끼는 풀렸다." "이제 내가 가엷은 사람들을 구제할 차례다."라고 자만하는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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