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분석심리학 3부작>을 읽고 : 너 자신이 되어라! 본문
치유모임 첫번째 책이었던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를 통해서 저자는 몸이 우리에게 이야기하는 것에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이야기한다. 나의 역사와 인류의 역사가 나의 몸을 통해서 이야기를 하는데 인생을 통해 내가 배운 나와 남을 대하는 방식은 내가 몸을 대하는 방식으로도 대변되며 인류의 역사는 사회가 우리에게 강요한 페르조나를 인식하게 한다. '내면의 목소리'에 귀를 기울여 스스로 설 것을 말하는 이 책의 내용은 자기실현으로 '너 자신이 되어라'라는 융의 이야기와 통하는 면이 있다.
둘 다 경험과 선험적인 면에 대해서 그 영향력을 인정했지만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에서는 선험적인 영향이라는 것을 '내가 태어나기 전에 겪은 인류의 경험'으로 정의내리고 있다. 역사를 관통하며 여성들이 받은 억압이 어떻게 우리의 내면에 흔적을 남겼는지, 앞선 여성들이 경험한 출산의 경험이 우리의 본능에 어떻게 신비롭게 자리잡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한다.
그런데 융이 말하는 선험적인 영향력이라는 것은 그 근원을 가늠할 수는 없지만 인류에게서 이어져 내려오는 신비한 힘, 내가 의식하지도 못했지만 내 삶에 이미 존재하는 자기원형의 신비로운 힘이다. 융은 그것이 어떻게 형성되었느냐 하는데 집중하기보다 그 존재, 현상 자체를 주목한다.
융은 자기실현, 개성화에 이르는 방법으로
- 페르조나의 인식
- 그림자의 인식
- 아니마, 아니무스의 인식
을 이야기했고 전문적인 방법으로는 꿈분석을 들었다.
앞서 <그림자>와 <아니마, 아니무스>를 읽으며 아래처럼 계속 궁금해했던 부분이 있었는데 <자기와 자기실현>을 읽으며 이에 대한 답을 찾을 수 있었다.
- 구체적으로 그림자를 의식 안으로 통합하는 방법
- 사회규범에 반하는 파괴적 그림자조차도 통합하여야 하나? 이에 대한 해결방법은?
- 아니마, 아니무스를 인식하는 방법은?
- 그리스도를 자기상으로 볼 수 있는지?
- 종교적 수행이 자기실현에 도움을 줄 수 있는지? 둘은 얼마나 같고, 또 다른지?
- 자기실현을 하면 어떠한 모습이 되는 건지?
실생활에서 구체적으로 할 수 있는 방법으로는 '내가 불쾌감을 갖는 행위'를 실제로 해 보는 모험을 하는 것이라고 했다. 집단적 무의식에 속하는 파괴적 그림자는 의식에서 떼어놓아야할 것이라고 이야기한다.
아니무스의 인식은 페르조나에 갇힌 자신을 구분하며 내 안의 '여성'을 먼저 인정하는 것으로부터 시작하라고 한다. 현대 여성들이 페미니즘의 영향으로 생긴 '현대 여성의 페르조나'에 갇혀 스스로의 여성성을 부정하는 것을 경계한 것이다.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를 읽다가 무지개 어머니, 땅의 어머니 부분에서 내가 발끈한 것도 이것과 연관이 있을 것이다. 내 무의식은 여성성에 대한 가치를 인정받고 싶어하는데 그것이 무시당하는 느낌이 들자 강하게 반응한 것. 혹은 그것 자체가 현재 내 마음 속에서 일어나는 갈등 자체일 수도 있겠다.
또한 아니무스는 어떤 이성에게 끌리는지로 인해 파악할 수 있다. 이제까지 내가 끌렸던 남성들을 되짚어보며 내 안의 아니무스가 어떠한 모습을 하고 있는지 살펴볼 수 있다.
아니무스의 특징은 근거없는 억지와 고집이므로 이에 대해 인식하고 그러한 갈등 상황이 생겼을 때 상대방의 의견에 대해 긍정적으로 생각해보는 연습을 해보는 것도 좋겠다. 또한 이를 풀어가기 위해 객관적인 관찰 연습을 제시하는데 발도르프에서 이야기하는 '관찰'이 떠올랐다. 발도르프 학교에서는 '자유로운 인간'을 기르고자 한다. 사회, 타인, 물질 그리고 심지어 내 자신에게조차도 자유로워서 온전한 관찰이 가능한 인간 말이다. 앞서 <그림자>에서 슈타이너가 회장으로 있었던 신지학을 '선의 지나친 강조'가 문제가 되는 예로 제시했는데, 이 부분에 있어서는 또 발도르프가 생각나니 묘한 기분이다.
그리스도에 대해서 '악'을 포용하지 않았으므로 자기의 상으로 부르기에는 부족하다는 견해도 있고 나도 이 부분에 의문을 품었다. 그런데 융은 자기가 인간의 정신적 전체성이라고 정의할 때 그것은 다양한 면들을 내포한다고 하면서 인간이 자신보다 더 포괄적인 전체성을 전제하는 것이면 무엇이든 자기의 '상징'이 된다고 했다. '이것이 자기다!'라고 하지 않고 자기의 '상징'이라고 한 부분이 중요한 것 같다. 자기는 하나의 모습이 아니라는 것이다.
종교적 수행에 대해서 그것이 자기를 인식하는데 도움을 줄 수 있으나 일정한 틀이 제시되는 수행과정에서 이미 수행자의 페르조나가 제시되기에 온전히 자기실현에 이르는 방법으로는 어렵다고 하였다. 또한 자기실현에 이른 사람은 초인이나 성자가 아니라 온전한 자기자신이며 이것은 하나의 모습으로 규정할 수 없다고 하였다.
막둥이를 보내고 막둥이의 죽음에 대해 의미를 부여하는 것이 어느 정도 필요하다고 생각하면서도 조금은 억지스럽고 나의 자기합리화라는 생각이 들었었다.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에서는 그 의미보다도 그 경험을 통해 결과적으로 어떤 부분에 대해 치유가 필요한지를 이야기한다. 그 또한 필요하다. <가지와 지기실현>에서는 고통이 주는 자기실현의 기회에 대해서 이야기한다. 하와이에서 만난 치유사인 kahea는 "나에게 왜?"라는 물음은 지금 이 상황을 위한 해결책이 아니라고 했다. 그 또한 맞는 이야기이다. 하지만 내가 막둥이의 죽음을 통해서 겪은 마음 속 갈등을 생각해보면 그것이 내가 생각했던 나의 모습을 깨고 내 안의 그림자를 받아들이는, 경험한 일이었다는 걸 알 수 있었다. 그렇게 생각하니 매듭이 풀리고 정리되는 듯한 느낌이 들었다.
앞으로 내가 나의 개성화를 위해 아래의 것을 실천해보겠다.
- 내가 자주 꾸는 꿈이 의미하는 것을 찾기 (꿈일기 적기)
- 객관적인 관찰 연습 (소박한 어떤 생명을 담담하게 관찰, 기록해하기.)
- 그림자 실행해보기 (평소의 나라면 못할 일들 - 길거리에 쓰레기 버리기, 모르는 사람에게 인사하기 등 - 일주일에 하나씩 해보자.)
- 여성성에 대한 긍정 (생활 안에서 창조성을 발휘하기. 요리, 정리, 청소, 바느질)
- 불쾌한 감정에 대해 투사를 인식해보기
- 내가 좋아한 연예인 변화를 통해 아니무스의 변화 살펴보기
- 명상, 기도 꾸준히 하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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