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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치유모임> 영성에 대한 나의 생각

고래의노래 2016. 8. 12. 00:51

6단계 내면의 지혜를 인정하라
- 영성을 믿는가? 내가 겪은 영적 순간이 있다면?
- 종교가 있다면 그 종교가 나에게 갖는 영적 부분을 이야기해보자.

* 이 글은 2016년에 적기 시작해서 2018년 4월인 지금에야 마무리지었다. 


영성에 대한, 신에 대한 생각은 분명한 어떤 지점에 머무르는 듯 보이면서도 계속해서 이리저리 표류하고 있다. 하와이 여행을 다녀온 후 나는 신에 대해, 믿음에 대해, 영성에 대해 참으로 많은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영성을 믿는다. 이는 영성을 무엇으로 정의내리느냐에 따라 사실 많이 달라질 문제이지만,
거창하게 종교, 신, 철학적인 접근이 아니고 생활 속에서 겪는 사소함에 초첨을 맞춘다면 이런 것이다.

누군가를 생각하면 그 사람 이야기나 소식을 듣게된다. 무언가에 관심을 가지면 관련된 자료가 들어온다.
분명한 에너지의 흐름이 느껴지는 이런 일들은 누구나 종종 또는 자주 경험하게 된다.
나는 이러한 영역도 '영적인' 부분이라고 여기며 그래서 '영성'을 넓게 정의한다면 '우리 삶에 영향을 미치는 신비로운 에너지'라고 생각한다.

막둥이가 우리에게 왔던 건 내가 경험했던 가장 영적인 체험이었다.
남편이 셋째를 완전하게 반대하는 상황이었음에도 막연하게 아직 나에게 올 아이가 있다고, 느꼈다.
운명이라고 밖에 생각할 수 없는 과정으로 우리에게 와주었던 막둥이..

나는 가톨릭 신자이고 이솔이를 낳기 전 2013년 초에 세례를 받았다.
적극적으로 이끄는 사람이 있었던 것도 아닌데 내 발로 성당을 찾아간 이유는 여러가지가 있었다.
명상과 수련으로 진리에 다가가고자했지만 항상 부족함을 느꼈던 터라 일정한 틀 안에서 누군가가 나를 이끌어주기를 바랐고 그러기에는 불교보다 기독교가 더 적합해보였다. 그 중 개신교보다는 가톨릭이 나에겐 보다 '종교적'으로 다가왔는데, 내가 생각하는 종교의 모습은 '적극적인 행동'이기 때문이었다. 가톨릭 안에서도 물론 보수적인 목소리들이 있지만 공식적으로 가톨릭은 약자의 편에 서서 외치고 행동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는다. 다른 종교의 절대자들과 달리 예수님은 가장 낮은 곳의 사람들과 함께 하며 그들을 어루만지셨던 것이다.

칼 융은 "붓다와 마찬가지로 그리스도는 자기의 구체화이다....붓다는 그것을 이른바 이성적 통찰로, 그리스도는 숙명적 희생으로 성취하였다."라고 하였다.
내가 본 기독교도 바슷하다. 나에게 종교는 내면의 평화와 나만의 안녕을 추구하기 위한 수단이 아니라 '사랑'이라는 가치를 인간사회에서 실현하기 위한 적극적인 행동이다. 그러므로 종교는 철저하게 정치적이어야 한다.
내가 가장 안타깝게 여기는 종교의 모습은 신의 이름이 다른 사람을 재단하고 판단하는데 쓰일 때이다. 동성애자에 대한 차별금지법에 반대하는 경우가 그러하다. 그리고 여성이 종교 안에서 철저하게 다른 계급으로 여겨질 때도 마찬가지다. 가톨릭이 아직 여성 사제를 받아들이지 않는 것, 태아의 생명권 아래에 여성의 자기결정권을 두고 억압하는 것 등이다.

나는 아이들이 어릴 때 경이로운 어떠한 존재, 힘에 대해 느끼고 이를 두려워하거나 신비롭게 체험하길 원했다. 절대자에게 다가가는 여러 방법들 중 가톨릭을 택한 이유 중 하나는 아이들과 내가 절대자를 반복되는 의식 안에서 배우고자 할 때 가장 편안한 길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주변에 성당도 많아 접근성도 좋고 말이다.

신은 이 세상의 다양한 종교를 통해 다양한 방식으로 이야기되고 있지만 결국 하나의 힘, 에너지, 혹은 어떤 규칙이라고 생각한다. 그러므로 이단이라고 여겨질지 모르나 우리 종교 안에서의 신만이 유일하다고 생각치 않으며 그러므로 모두 꼭 이 종교를 믿어야 된다고 여기지도 않는다. 다만 기독교에서 '하느님 나라'라고 부르는 모두가 서로 사랑하는 평화로운 세상, 예수님께서 재림하셔서 만드실 세상 이라는 이상세계를 사람들이 스스로의 손으로 만들기 위해 '서로 사랑하는 것'이 얼마나 중요한지 깨달아야 한다고 여긴다. 그 깨달음이 누군가에게는 종교를 통해서일 수 있고 도 다른 누군가에게는 철학, 과학, 문학일 수도 있다.

구복신앙이라는 것은 나에게는 불경스럽게 느껴진다. 절대자에게 무언가 우리 자신의 안위를 위하여 '내 뜻대로 내 생각대로 내 인생을 풀어내달라고 요구'하는 것은 우리가 절대자와 맺는 관계의 핵심이 아니라고 생각한다.

칼 융 관련서들과 신화를 해석한 조셉캠벨의 책, 페미니즘 신학 서적들, 페미니즘 영성서들을 읽으며 지금 내가 가지고 있는 영성에 대한 생각은 이렇다. 

융이 이야기한 의식과 무의식, 그림자, 아니마와 아니무스가 통합된 '자기'는 종교에서 이야기하는 '내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과 다르지 않다. 그 단계에 이르면 우리는 무아지경이라고 무르는 내적 충만함을 경험하게 되는데 이는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에서 이야기한 여걸의 본성과 같다. 의식적으로는 명상과 수련, 무의식적으로는 자연이나 우주 안에서 또는 소소한 일상 속에서 경험하는 경이로움을 통해서 우리는 저 상태로 나아갈 수 있다. 인간의 본성은 그 경이로움을 쫓아, 자기통합을 향해 나아가게 되어 있으며 우리는 그 여정을 적극적으로 받아들이면 되는 것이다. 


내가 세례를 받은 여러 이유 중 하나는 절대적 사랑과 믿음을 경험하고 싶은 욕망이었다. 타인에게서는 이러한 사랑을 경험한다는 것이 불가능하다는 것을 깨닫고 그 자체가 사랑이시라는 그 분께 매달리고 싶었던 것이다. 하지만 내가 경험하고자 했던 하느님도 결국 내가 타자화하고 대상화시킨 하느님이었다는 것을 알겠다. '내가 나 스스로를 사랑해야 한다.'는 말은 '내 안의 하느님'을 느끼라는 말과 같다. 그것은 내가 전지전능하다는 것이 아니라 내 존재 그 자체만으로도 온전하고 온당하다는 걸 깨닫는 것이리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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