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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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로 사는 이야기/아이들이 자란다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를 믿는 힘

고래의노래 2016. 6. 3. 22:52

한달 전쯤 윤우의 8번째 이가 빠졌다.
아이가 이를 베개 밑에 넣고 잠이 들자, 나는 이쯤에서 '아름다운 이별'을 만들어줘야 되지 않을까 생각했다.
그래서 500원짜리 동전과 함께 아래와 같은 편지를 써서 베개 밑에 넣어두었다.

안녕, 윤우야.
난 너의 이빨요정이야.
여덟번째 이를 뺀 걸 축하해. 우리 윤우가 쑥쑥 크고 있구나.
오늘이 너의 이를 가져가는 마지막날이기에 편지를 쓴다.
이빨요정마다 다르겠지만 난 위, 아래 4개씩의 이빨만을 모은단다. 그 이들에 가장 신비한 힘이 많이 들어있거든.
이제까지 예쁜 이들을 주어서 고마워. 윤우 이는 썩지도 않은, 아주 깨끗하고 튼튼한 이들이었고 그런 이를 받게 되어서 얼마나 기뻤나몰라. 다른 이빨요정들이 날 많이 부러워했어.
나는 이제 다른 아이의 이빨을 모으러가겠지만 윤우가 주었던 희고 튼튼하고 신비로운 힘이 가득했던 이를 계속 기억하고 간직할께.
아마 내가 네 동생의 이빨요정이 될 수도 있겠지?
그동안 고마웠어. 안녕~

엄마의 글씨를 알아보지 않겠냐던 남편의 걱정이 무색하게
윤우가 아침에 처음 보인 반응은 "이빨요정이 정말 있네!"라며 베시시 웃는 거였다.

그런데 안타깝게도 내 의도와는 달리
윤우는 저 편지의 내용을 '이제 다른 이빨요정이 온다.'는 걸로 해석했다. -_-;;;;;
다시 읽어보니 그렇게 해석할 수도 있겠다.

내가 살짝 "음...한 아이한테 이빨요정은 한 명뿐이지 않을까?"라고 다른 해석을 내밀어보았지만,
윤우는 아니라면서...다음 번에도 베개 밑에 이를 넣어보겠단다. T-T 우짤까나.

이제 옛이야기를 들려주면 "이거 엄마가 지어낸거지?"라고 물어보기도 하고
괴물이나 요정이야기로 이솔이에게 으름장을 놓거나 달랠 때
옆에서 한 술 더 떠서 일부러 과장되게 효과를 주길래
신비의 세계가 윤우를 떠나려나보다 싶었는데, 아직 윤우는 하늘과 땅 그 중간 지점에 있는 듯 하다.

이솔이가 너무나 정리하는 걸 싫어하길래
정리안하면 '정리요정'들이 주인없는 장난감인 줄 알고 다 가져간다고 하면서 시키고 있다.
윤우는 당연히 저게 만들어낸 이야기일 거라는 걸 안다고 생각했는데
어제 저녁 기도 전에 나에게 "엄마, 정리요정 정말 있어?"라고 물었다. 

나는 일단 "그럼~"이라고 대답해준 뒤 이렇게 얘기했다.
"엄마가 윤우를 사랑하는 거, 눈으로 보이니? 하느님이나 예수님이 지금 눈에 보여?
이 세상에는 눈에 보이지 않아도 존재하는 많은 것들이 있어.
하지만 그건 믿는 사람들에게만 존재하는 거지. 믿지 않는 사람들에겐 그건 없는 거야.
눈에 보이지 않는 걸 믿는다는 건 그래서 굉장한 일인거야."
윤우는 진지하게 고개를 끄덕였다.

예전에 읽은 청소년용 철학책에서 이런 내용이 나온 적이 있다.
책 속에서 주인공은 플라톤의 <향연>에서 나왔던 '디오티마'라는 여성 철학자를 만난다.
그녀는 전설상의 인물이고 창작되었다고 여겨지는데 눈 앞에 있으니 주인공은 "이제 진짜 당신이 있다는 걸 믿을 수 있어요!"라고 말한다. 그 말에 디오티마는
"생각해낸 것도 존재하는 것이지요. 왜냐하면 그것을 생각하는 사람이 있기 때문입니다. 어쨋든 그건 無는 아니예요."라고 대답한다.  

보고 듣고 느끼는 '감각적인 기준'에서는 어떨지 몰라도, 윤우가 믿고 있는 '요정의 세계'는 '부모'라는 매개를 통해 분명하게 존재하고 있다.


며칠 전에는 이 닦으러 화장실로 들어가다말고 윤우가 갑자기 "어.."하며 가만히 있길래
무슨 일이냐고 물으니 이런 말을 했다.
"갑자기, 순간..1초 정도? 내가 내가 아닌 것만 같았어."
아, 나도 저런 경험이 있었다. 어렸을 때.
"아, 그거. 엄마도 알아. 엄마도 어렸을 때 종종 그랬어. 지금은 그러지 않지만. 윤우는 아직도 다른 세계로 가는 문을 열 수 있는 거야."
"그럼, 그 때 잠깐 다른 세계에 다녀오는 거야?"
"응!"

나는 확신에 차서 대답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