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여성몸여성지혜> 1부 12~13장, 임신과 출산, 모성애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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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여성몸여성지혜> 1부 12~13장, 임신과 출산, 모성애

고래의노래 2016. 5. 26. 03:20

이번 강남역 살인사건을 보면서
어린 시절에 내가 경험했던 불안감이 떠올랐다.
어리고 약해서 내가 외부의 공격을 방어할 힘이 부족하다는 것을 알기 때문에 느낄 수 밖에 없었던 불안들.

그런데 어찌보면 임신은 위험에 가장 취약할 수 있는 상태임에도 오히려 불안이 없었던 것 같다.
다른 생명을 지키기 위해 본능적으로 마음이 강해진 건지...
임신 중에 진행되는 온갖 검사들로 인해 이 아이가 아픈 아이이면 어쩌지라는 불안은 있었지만
내 몸이 이 아이를 품고 키우기 힘들어할지 모른다거나 아이를 낳을 때 위험할지도 모른다는
'내 몸'에 대한 걱정은 전혀 없었다.

나는 나의 생식능력에 대해서 기뻐하고 즐거워하고 행복했다.
내 몸안에 또 다른 생명이 있다니! 내 안에 두 개의 심장이 뛰다니! 내가 생명을 낳다니!
사춘기 시절 그렇게 남자가 되고 싶었으면서도
여자라서 나중에 임신을 하고 아이를 낳을 수 있다는 것이 매우 기뻤다.
임신과 출산이라는 성스러운 경험을 평생토록 하지 못하는 남자들이 불쌍하기까기 했다.

출산 시의 고통도 전혀 두렵지 않았다.
나는 고통을 직면하고 싶었고 이 고통이 아이가 나에게 올 때 취하는 최상의 방법이라고 확신했다.
둘재를 가정출산으로 낳으며 내가 원하는 대로 몸을 움직이고 웅크리고 소리를 내는 과정에서
내 안에 있는 아이를 세상에 내보내는 힘, 능력을 제대로 경험.
나는 잔뜩 짐볼을 끌어안고 웅크렸고 짐승같이 울부짖었다.
고통이 밀려오면 자연스럽게 아래로 힘이 들어가는 것도 너무 신기했다.


결혼하기 전에 나는 아기가 귀여운 줄을 몰랐다.
어린 여자아이들이 대부분 가지고 있는 동생과 아기 돌봄 본능같은 것도 없었고
아기나 동생들을 마냥 귀찮은 존재로만 생각했다.
모든 아기 생명체들 중 인간의 아기가 가장 안귀여운 것 같다는 생각도 했다.

그런데 아기를 낳을 것이라는 의지는 확고했으며
서점에서 아이들 대상으로 한 선그리기나 간단한 스티커 학습지들을 보면 막 가슴이 뛰면서
얼른 아기 낳아서 내 아이랑 같이 해보고싶다.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를 키운다는 건, 아이와 함께 한다는 건 생각만큼 달콤하지 않았고 지치고 힘들 때가 더 많았다.

식물을 잘 키우는 사람은 사랑할 줄 아는 사람 이라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다. 소리높여 요구하지 않는 상대에게 묵묵히 관심과 케어를 한다는 것, 즉 사랑을 주는 법을 아는 사람이라는거다. 사랑과 인간관계에 대해서 가장 많이 배울 수 있고 내 민낯을 볼 수 있는건 육아일 것이다.
가장 약한 사람을 무시하지 않고 상처받지 않게 존중하며 돌본다는 것. 그것도 십년넘게. 수련도 이런 수련이 있을까.

윤우가 5살 때 나는 블로그에 이런 글을 썼다.
"너그럽고 관대한 육아의 기본은 사랑보다는 사실, 측은지심이다.
아직 미성숙한 너를 내가 봐준다는 심정. 언뜻 오만해보이지만 꽤나 중요한 마인드이다. 미성숙하기에 무시해도 된다는 식으로 방향을 잘못 틀지만 않는다면 말이다.
'무시하지 않으면서 가엷게 여기는 마음'은 진정 어른의 너른 품성에서만 가능하다."

'엄마'라는 위치를 따로 떨어뜨려놓고 볼 게 아니라 괜찮은 어른이 괜찮은 엄마라는 생각이 든다.
인간의 삶이 대부분 그렇지만, 특히나 아이를 키우면서 '중용'의 가치에 눈을 뜨고 그 어려움을 더 뼈져리게 느끼게 된다. 거의 모든 육아서의 내용이 사실 이거 아닐까. 사랑을 주되 권위가 있고, 아이의 욕구를 무시하지 않으면서 규칙을 지켜나가고...
상황에 따른 유연한 대처와 융통성, 양극단에 대한 이해와 포용력이 필요한데 이 모든 것을 가능하게 하는 바탕은 결국 자존감, 자긍심이다. 자존감 높은 멋진 엄마가 되고 싶다.


대응하기 힘든 아이의 행동에 대해 내가 부모에게 받았던 그대로의 방식이 아닌 내가 옳다고 생각하는 다른 방식으로 대할 수 있다면 그 자체만으로도 내 안의 문제들이 치유된다는 이야기를 믿는다.
'아이들은 부모 사람만들기 위해 이 세상에 온다.'는 말은 아마 저런 뜻일 것이다.
내가 생각해왔던 이상적인 부모상과 내 모습이 달라서 느꼈던 온갖 좌절의 수위는 이제 한결 낮아졌다.
나는 내가 부족하다는 것을 인정하고 있고 그리고 이것이 빨리 바뀌기 힘들다는 것도 알고 있다.
하지만 의식하고 있다. 의식하면서 스트레스 받지 않고 그러면서 변화를 꾀하는 것은 참 어려운 일이지만...

나는 여자아이에 대한 열망이 강했는데
뒤틀어진 친정엄마와 나의 관계에서 내가 얻지 못한 친밀감을
내 딸을 통해 얻고 싶은 욕구때문이었다. 새롭게 완벽한 모녀관계를 만들고 싶었다.
친구같은 엄마. 나의 모든 고민을 털어놓을 수 있는 털털하고 따뜻한 엄마.
그런 엄마가 되고 싶었다.

아기를 좋아하지도 않았으면서 그렇게나 임신 출산을 즐기고 나의 아이를 바랬던 건
내가 외동이었기 때문에 외롭지 않기 위해서, 완전한 내 편을 만들기 위해서라고 단순하게 생각해왔었다.
그것도 맞는 것 같다. 그런데 더 크게 보자면...
러셀이 말한 것처럼(조금 거창하게 얘기하자면) 생명의 역사 안에서 다른 생명들과 연결되어 있다는 연대감을 느끼고 싶어서였던 것 같다.
그리고 내 인생의 숙제를 풀 수 있는 기회가 그 안에 있다는 것을 무의식 중에 알았기 때문일걸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