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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시절과의 다정한 독립 그리고 완전한 독립을 향해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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내 어린시절과의 다정한 독립 그리고 완전한 독립을 향해

고래의노래 2016. 6. 15. 00:17

성인애착면접법의 질문에 대답하면서 나는 중요한 사실을 알게 되었다.

엄마와 아빠와의 관계를 나타내는 5개의 형용사를 제시하라고 할 때, 나는 적당한 단어를 찾지 못해 굉장히 끙끙거리다가 엄마와의 관계에는 '집착, 감정의 배수구, 벗어나고 싶은' 이라고 쓰고 아빠와의 관계에는 '먼산'이라고 썼다. 막연하게 부모님을 떠올리면 눈감고 싶은 느낌, 떠나가고 싶은 느낌만이 너무 강했다.
그런데 구체적으로 어렸을 때의 일들을 하나하나 떠올려보자 나의 어린 시절이 꽤 많은 유쾌하고 따뜻한 에피소드들로 채워져 있었고 나의 그런 어린시절을 위해 부모님이 꽤나 노력하셨음을 알 수 있었다.

가족끼리 오토바이를 타고 이리저리 여행다닌 기억, 아빠와 함께다녔던 낚시터와 새사냥의 추억들, 아빠의 후배분 부부 집으로 놀러가 그 아내분과 수수께끼를 서로에게 내며 놀았던 기억들이 떠올랐다. 얼음낚시터에서 아빠가 만들어주신 썰매를 타기도 했고 저수지에서 아빠와 보트를 타며 우주의 외계인들에게 보내는 교신이 지금도 우주 너머를 건너고 있을 꺼라는 이야기에 놀라워하며 하늘을 올려다보던 기억도 있다. 오토바이를 내가 운전하겠다며 아빠한테 운전대에서 손을 놓아보라고 막 우기던 것도 기억난다. 진짜인지 그런 척 하신건지 아빠는 잠깐 손을 놓았고 그동안 내가 운전을 한 게 맞다고 이야기하셨지.

엄마와의 기억은 특별한 에피소드라기보다 생활 속의 정경들. 엄마가 햄버거 패티 반죽을 하는데 옆에서 내가 손으로 주무르고 싶다고 해서 주무르는 모습, 아침마다 내 눈이 위로 올라갈만큼 짱짱하게 내 머리를 빗겨 묶어주던 기억. 그 옆에 텔레비전 뉴스에서 성폭행 이야기가 나와서 내가 엄마에게 저게 무슨 말이냐고 물었던 기억도 난다. 지금 생각해보니 엄마는 참 허용적이었다. 내가 무슨 짓을 하든...나라면 윤우한테 하지 말라고 했을 집안을 어지럽히는 모든 일들을 엄마는 그냥 허용했다. 데깔코마니를 한다고 온 방안을 물감 범벅으로 해놓았을 때도 혼난 기억이 없다. 나는 윤우가 물을 조금이라도 흘리면 "네가 치워!"라며 신경질적으로 반응하는데 말이다.

이렇게 떠오른 기억들때문에 나는 인생그래프에서 나의 어떤 시기도 불행 쪽으로 내려놓을 수가 없었다. 또한 이런 기억들 속에서 나는 혼란스러웠다. 이 모든 좋은 기억들을 뒤로 하고 나는 왜 어린 시절을 부정적인 울타리 안에 가두어 놓았을까. 사춘기 이후로 삐걱거린 엄마와의 관계가 이 기억들을 모두 희석시켜 버린 것 같다. 지금의 관계를 떠올리면 당연히 과거는 이래야한다는 공식 안에서 나는 안정을 느꼈던 것일지도. 물론 항상 불안불안했던 부모님 사이가 저 모든 추억들 뒤로 배경화면처럼 깔려있으니 꽃밭도 그냥 꽃밭으로 보이지 않는건 당연한거겠지만.
어쨋든 막연하게가 아니라 구체적으로 알게 되었다. 부모님이 그 시절 최선을 다했다는 걸 말이다.

나는 어린시절을 암울한 회색으로 칠해놓고 저 곳은 떠나가야 할 곳, 다시는 가고 싶지 않은 곳으로 정해버렸었다. 그 힘으로 앞으로 나가고 싶었는지도 모르겠다. 그 곳에서 벗어나 나 스스로 서고자 하는 독립의지를 다지면서. 그 시절을 객관적으로 보지 못한다는 건 아직 그 시절 안에 머물러있다는 뜻이겠지. 현주언니가 이야기했듯이 그 시절이, 그 사람이 나쁜 것은 아니라는 걸 인정하면서 그것들과 이별하는, '다정한 독립'이야말로 진정한 독립인 것 같다.

그런데 이 기억의 삐걱버림들 속에서 내가 가장 강하게 느낀 감정은 불안감이었다. 윤우도, 이솔이도...지금은 나를 좋다고 하지만 나중에 나를 저렇게 기억하면 어쩌지..하는 불안, 두려움. 나는 아이들에게서 사랑받고 싶은 욕망이 너무나 강하다. 이 욕망을 극복해야만 나 스스로 서는 '완전한 독립'이 가능할 것이다.
'네가 날 사랑하지 않아도 괜찮아. 난 그래도 나니까.' 이렇게 완전해지는 날이 오기를...


아래 질문 중 18번, 아이에게 바라는 세가지 모습에 대해 난 이렇게 답했다.
- 다른 사람에게 미움받을 용기를 가지고
- 자신을 좋아하고
- 약자를 배려하는 사람
이었으면 좋겠다고. 지금 보니 이건 딱 내가 되고 싶은 모습일세. ^^;


*성인애착면접법 질문은 아래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