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아이와 함께 도서관 가는 길 : 윤우가 도서관과 친해지기까지 본문

엄마로 사는 이야기/아이들이 자란다

아이와 함께 도서관 가는 길 : 윤우가 도서관과 친해지기까지

고래의노래 2012. 3. 26. 20:34
내가 책읽기를 즐기기 시작한 건 얼마되지 않는다.
정규교육 과정 12년 동안 교과서만 죽어라 읽다보니 책을 지루하고 딱딱하게만 여기게 되었고 학문의 날개를 펼쳐야 할 대학시절에는 갑작스레 몰려드는 홉스, 루소, 로크, 맑스같은 대천재들의 지성을 미처 다 받아들이지도 못하고 허덕거렸다. 아무리 몸에 좋아도 아기가 현미밥을 받아먹을 수 없는 것처럼, 독해능력도 없는 뇌로 쏟아지는 사상(思想)의 폭포수에 나는 항상 소화불량 상태였다.

그러나 그 한껏 체한 시간들 덕분에 난 도서관을 '발견'하게 되었다.
쿤쿤한 옛 냄새가 나는 낡은 책들 사이에 가만히 서서 내가 모르는 세상이 이렇게 넓고 다양한데 전율했고
그 모두를 한꺼번에 다 빨아들이고 싶은 욕심에 애가 탔다.  

대학교를 졸업하고 도서관과 멀어졌다가 윤우를 임신하고서 집 근처 도서관인 중앙도서관을 다니기 시작했다.
도서관으로 가는 언덕길을 오르내리며 뱃 속의 아이에게 조용히 쑥스러운 태담을 하고는 했다. 길가의 장미꽃도 보여주고 꿍시렁거리며 더운 날씨를 푸념하기도 하고 아기에게 바라는 엄마의 소망도 이야기했다.
나는 아기가 책벌레까지는 아니어도 책 속에서 재미를 발견하고 도서관을 좋아하게 되기를 바랐다.

처음 윤우를 데리고 도서관을 갔던 게 언제였는지 정확히 기억나지는 않지만, 아기띠에 매고 갔던 생각이 나니까 아마도 돌 전이지 않았나 싶다. 그 때는 물론 내 책을 빌릴 때 단지 아기를 데리고 다니는 상황이었다. 그 이후 윤우가 걸음을 떼고 난 뒤에는 나들이 삼아 자주 도서관을 드나들게 되었다.

나의 바램대로 도서관은 지금 윤우가 가장 좋아하는 장소가 되었지만 도서관이 그리 되기까지는 몇 단계의 변화를 거쳐왔다.


# 1단계 - 도서관은 우리의 산책로

맨 처음 윤우를 데리고 어린이 열람실의 온돌방에 들어가 책을 보여주니 나가자고 떼를 부렸다. 그리고 도서관 옆의 놀이터에서만 오랫동안 놀다가 돌아왔다. 도서관 내 도로 옆에서 과속방지턱을 지나는 차들을 바라보는 걸 좋아했고 도서관 입구 옆 돌담에 앉아 주차카드를 뽑으면 올라가는 안전바를 한참동안이나 바라보곤 했다. 도서관까지 가는 길 옆으로 길게 나 있는 울타리를 내달리는 것도 좋아했다.  

만 3살이 되기 전까지 윤우에게 도서관은 '노란 마을버스 타고 산책오는 곳' 그 이상도 이하도 아니었다.
처음 윤우가 책을 빌린 건 중앙도서관이 아니라 일주일마다 마을을 순회하는 '도서관 버스'에서 였다. 책을 가득 실은 버스는 윤우를 한 번에 사로잡았고 버스가 오는 화요일을 손꼽아 기다리곤 했다. 도서관 버스에서 처음 빌린 <코코몽 시리즈>를 윤우는 꽤나 좋아해서 이후 이 시리즈를 거의 모두 찾아 읽게 되었다. 엄마 입장에서 볼 때는 그림이나 구성이 모두 허접하기 그지 없었지만 (-_-;;) 아이가 스스로 선택을 하고 그 선택에 심취해 몰입하는 경험 그 자체에 의미를 두었다.


# 2단계 - 처음으로 대출 카드를 만들다.

그러다 만 3살이 되었을 때 생일 기념으로 도서관 대출 카드를 만들어주었다. 그러나 서가에 꽂힌 그 많은 책들 중 책등만 보고 책을 척척 골라내는 것은 아직 아이에게는 무리였다. 윤우는 그 중압감에 어찌 할바를 몰라 자꾸 나가자고 하는 듯 했다. 아직 어린 아이들에게는 어른들이 책 선택을 도와주고 지도해 줄 필요가 있다는 걸 처음 깨닫게 되었다. 아이가 무언가 선택을 할 때 어른의 개입을 최소화하고 선택의 결과를 무조건 존중해주는 것도 중요하지만 그건 선택의 경험이 여러번 쌓인 후에나 유의미하다는 생각이 든다. 선택의 가짓수가 너무 광범위하면 갈피를 못잡고 허우적거리게 되고 결국 선택 상황 자체를 거부하게 되는 것 같다. 일단은 부모가 선택의 범위를 좁혀주고 그 중에서 선택하게 해서 '스스로 선택하는 경험'을 점점 늘려주는 것이 중요할 듯.  

그래서 그 당시 재미있게 보던 애니메이션인 미피가 나오는 미피 그림책을 찾아서 보여주었다. 그랬더니 낯익은 그림을 반가워하면서 관심을 보였다. 그렇게 해서 처음으로 책 4권을 빌려오게 되었다. 아기들이 보는 단순한 보드북이었지만 지루해하지도 않고 윤우는 여러 번 그 책들을 읽어 달라고 했다.

그 다음부터는 자기가 미피책이 꽃힌 서가로 가서 책을 고르기 시작했다. 그 옆의 다른 책들을 조금만 살펴봐도 강하게 거부하면서 오직 미피책만을 빌리겠다고 고집을 부렸다. <코코몽> 시리즈처럼 그렇게 미피책도 모두 섭렵하게 되었다. ;;;;

한 달 가까이 계속된 미피 사랑~



# 3단계 - 집착을 내려놓다.

'미피 사랑'은 한 달 가까이 계속되었고 시리즈를 다 읽게 되자 다시 처음부터 반복을 하려했다. 다른 책을 살짝 끼워 빌리려 해도 미피 책만 빌리겠다며 막무가내였다.
다른 책에도 마음을 열게 된 기회는 우연히 찾아왔다. 윤우는 그 즈음 물범이 태어나 엄마와 헤어지기까지의 과정을 사진 그림책으로 엮은 <엄마 안녕>이라는 책을 즐겨보고 있었는데 그 책 뒷면에는 책의 시리즈 도서들이 소개되어 있었다. 윤우가 그 중 <고마워요 아빠>라는 펭귄 책이 보고 싶다고 해서 교보 문고에 가서 찾으니 마침 품절된 상태. 어찌해야 하나 고민하다가  윤우에게 도서관에 가서 한 번 빌려보자고 했다. 그리고 도서관에는 역시나 그 책이 있었다.

 


해당 시리즈 그림책을 모두 찾아서 읽은 후 윤우가 빌려가자고  한 것은 <우리는 쌍둥이 판다>. 이 책이 도서관에서 윤우가 미피를 벗어나 스스로 선택한 첫 책이었다. 
그리고 아이 아빠와 함께 주말에 도서관을 찾았을 때 놀이터에 둘이 놀게 남겨두고 나 혼자 어린이 열람실에 들어가
윤우가 좋아할 만한 책을 빌려서 나왔다. 혹시나 거부하면 어쩌나 걱정스러웠는데 윤우에게 보여주니 정말 잘 읽고 좋아했다. 그렇게 점점 윤우는 다른 책에도 마음을 열어갔다.


# 4단계 - 도서관은 재미있는 보물창고

그 이후 우리가 도서관을 이용하는 방법에 변화가 생겼다.
도서관에 가기 전 내가 윤우에게 보여주고 싶은 책을 생각한 후 그 책을 도서관에서 찾으면, 윤우도 옆에서 기웃거리다가 내가 이리저리 뒤적거리다 사이가 벌어진 서가 사이에서 책 몇 권을 선택한다. 그렇게 윤우가 선택한 책과 원래 내가 빌려주려 했던 책을 함께 열람실에서 읽은 후 빌릴 책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제 도서관에서 1시간 동안 책을 읽다가 가기도 한다.

개인적으로 세 돌 이전의 아기들에게 도서관에서 책을 빌려주는 것은 적절하지 않다고 생각한다.
돌 전 아기들에게 책은 물고 빨고 때로는 찢고 접어보는 '장난감'이다. 무엇이든 입으로 가져가는 아기에게 여러 사람의 손을 거친 책은 위생적으로 좋지 않을 뿐더러 자기만의 '장난감'으로도 활용할 수가 없다. 
두 돌 전의 아기에게는 규칙을 이해시킬 수가 없다. 물건을 나눈다는 개념을 알지 못하는 아이에게 도서관의 책은 다른 사람들과 함께 보는 것이므로 소중히 다루어야 한다는 것을 어떻게 알려줄 수 있겠는가.
세 돌 전의 아이는 좋아하는 책에 대한 집착이 강하다. 자기가 마음에 들어하는 책을 남이 보기에 지루할 정도로 반복해서 읽어달라고 한다. 이런 아이에게 2주일간의 '시한부 책'을 건네며 매번 이별을 강요하는 것은 가혹하지 않을까. 

윤우는 이제 몇 가지 책을 반복해서 보기보다 다양한 책을 굵고 짧게 집중해서 보는 시기로 접어들고 있다.
아이 욕구에 맞추자고 밑도 끝도 없이 책을 사들일 수는 없는 노릇이니 도서관을 활용하기에 딱 좋은 시기이다.
게다가 만 3살이 넘으면 이제 말귀를 알아듣고 규칙을 이해하기 시작한다. 모두가 함께 보는 책이라는 것을 받아들이고 집착에서 벗어나 책 속의 내용에 집중할 수 있게 된다. 도서관이 '재미의 보물창고'라는 것을 알게 되는 것이다.


# 5단계 - 우리는 도서관 추억을 만든다.

윤우가 좋아하는 동네 장소로 꼽히는 도서관.
사실 도서관이 윤우에게 사랑받는 이유는 더 있다.


바로 도서관 갈 때마다 내가 매점에서 사주는 막대사탕과 훈제계란.
버스 타는 길에 가끔 사주는 딸기, 초코 우유.
그리고 3-1번 마을 버스 그 자체!

간식 먹으러 도서관에 가냐고 아이 아빠가 윤우를 놀릴만큼 윤우는 도서관에 들어가자마자 일단 자신의 '할 일'을 매점에서 해결한다. 매점 아주머니와 '사탕 꼬마'로 안면을 텃을 정도이다. 몇 주 전에는 아이 아빠가 사먹은 훈제 계란을 맛보더니 여기에 매료되어 '필수 매점 간식 리스트'에 계란까지 올라왔다. 세 개짜리 한 망을 사서 그 중 두 개를 먹어치운다. ^^;;;

노란 마을버스와 초록색 로기 버스 중 한 대를 골라 잡아 타는 것도 빼 놓을 수 없는 '도서관 가는 재미'이다.
도서관을 가자고 함께 결정을 내리면 일단 3-1번을 타고 조금 돌아갈지, 33번을 타고 바로 가되 조금 걸을지를 고민한다. 그렇게 버스를 타고 도서관에 가면 인도에 한참 서서 지나가는 차들을 한참이나 구경하고 도서관 버스가 주차장에 서 있으면 도서관 버스의 주변을 돌며 바퀴가 얼마나 큰지 매번 확인을 한다. 그리고 도서관까지의 언덕길을 따라 울타리를 내달린다. 울타리의 끝에는 놀이터가 있다. 놀이터에서 모래놀이도 하고 그네도 타고 마음이 동하면 미끄럼틀도 몇 번이나 반복한다. 그런 다음 겨우 도서관 안으로 들어가면 바로 매점으로 향해서 '숙제'를 해치운다.

그리고나서야 우리는 열람실로 들어가 책을 고른다.^^;;
모든 재밋거리를 다 거친 뒤 책은 항상 맨 나중이다. ㅋㅋ

 

도서관을 향해 울타리를 따라 뛰는 윤우.


책이 좀 뒤로 밀린다고 문제될 건 없다. 중요한 건 도서관이 윤우와 나에게 추억의 장소가 되어가고 있다는 사실이다.

나에게 학창시절의 도서관은 '독서실'로만 기억된다.
'도서관'으로 도서관을 이용한 건 내 기억에 딱 한 번뿐이다. 하지만 그마저도 어떤 책을 빌려야 할지 몰라 쩔쩔매다가 <어린이를 위한 리어왕>을 몇 페이지 읽고 내려놓았었다. 친구들끼리만 갔기 때문에 책 선택에 도움받을 어른도 없었고 처음 보는 사서 선생님에게 그런 부탁을 할 만큼 주변머리가 좋지도 못했다. 
그 이후 도서관은 대학 입학 전까지 나에게 쭈욱 독서실일 뿐이었다.

윤우는 나중에 도서관을 어떻게 기억하게 될까. 일단 먼저 막대 사탕 향기가 떠오르지 않을까 싶다. ^^;;
그리고 그 향기 속에서 엄마와 좋은 시간을 나누던 행복하고 재미있는 공간으로 도서관을 기억한다면 좋겠다.

도서관에서 영화도 보고, 인형극도 보고, 뒷산을 산책하기도 하고...
도서관에서 윤우와 하고 싶은 일들이 아직 너무도 많다. 그렇게 윤우와의 '도서관 추억'을 계속 차곡차곡 쌓아나가고 싶다.

며칠 뒤면 윤우는 또 말하겠지.
"엄마, 우리 버스타고 도서관 갈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