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윤우의 방콕놀이 - 밀가루편 본문

엄마로 사는 이야기/아이들이 자란다

윤우의 방콕놀이 - 밀가루편

고래의노래 2012. 1. 6. 23:42
문화센터 수업도, 친구들과의 정기적인 모임도 없는 겨울이 시작되었다. 윤우가 8개월 무렵이었을 때 백화점 문화센터에서 베이비 마사지 강의를 들은 걸 시작으로 이제까지 항상 일주일에 한 번은 수업을 들었으니까 정해진 스케줄 없는 온전한 자유시간을 윤우는 이제서야 누리는 중이다.
유치원을 다니기 시작할 3월까지 남은 몇 개월의 꿀같은 자유시간을 어찌 보내야 할지, 정작 윤우보다도 내가 더 몸이 달았다. 여러 놀이책을 뒤적거리면서 윤우랑 할 수 있는 놀이들을 정리하고 스케줄을 짜 보기도 했다. 그러나 정작 윤우가 몸을 배배 꼬며 "심심해~~~"를 외칠 때에는 머리 속이 멍해지고 마는 것이다.

결국 '재미있는 걸 달라'는 요구가 몇 번 계속되자 나는 단순무식하게 돗자리를 펴고 밀가루를 뿌려 주었다. '일탈의 허용'이라는 가장 쉬운 놀이 방법을 택한 것이다. 이 때까지만 해도 집 안에서 밀가루 놀이를 허한다는 것의 의미가 어떤 것인지 깊이 생각조차 하지 못했다. -_-;

처음 시작은 미니 돗자리였다. 항상 반죽 형태로만 주던 밀가루를 풀썩거리는 가루 채 받으니 윤우도 많이 조심스러워했다. 그러나 밀가루 놀이가 매일 매일의 일상이 되고 하루의 스케줄로 자리잡더니, 돗자리 옆에 신문지가 늘어나고 결국 커다란 비닐장판까지 깔리는데는 그리 오래 걸리지 않았다. 자동차들에게 밀가루 눈을 골고루 뿌려주고 밀가루 위에서 자동차를 씽씽 달려 바퀴자국도 내준다.

그러더니 결국은 이 지경까지 왔다. 밀가루 위에 아예 누워버리기. 저렇게 눕고나서 나에게도 누워 보라며 권하는데 애미는 차마 그것까지는 해줄 수가 없었다. -_-;;;; 이렇게 한바탕 밀가루와 놀고 나면 화장실에 들어가 온 몸을 팡팡 털어준다. 옷 사이에 밀가루들이 자잘하게 남아있을게 뻔하지만 그런 것까지 신경쓰다보면 돌지 돌아...

밀가루 놀이를 마치고 나면 남은 밀가루는 대게 통에 담아 내일의 놀이를 위해 남겨둔다. 윤우는 몸만 쏙 빠져나가고 돗자리와 비닐장판, 눈쌓인(!) 자동차들을 정리하는 것은 엄마의 과제로 남는다. 엄마가 정리하는 틈에 윤우의 요구는 또 끝없이 이어진다. 이 날은 밀가루 놀이가 끝나니까 물감놀이를 하겠단다. 땡기는 뒷목을 부여잡고 불덩이를 목 안으로 삼키다가 퍼뜩 놀이책에서 정리해두었던 내용 중 밀가루 관련 놀이가 생각났다.

되직한 밀가루 반죽에 색색깔 물감을 풀어서 그리는 '밀가루풀 그림'. 내일 다시 쓰려고 담아두었던 밀가루에 물을 부어 반죽을 만든 뒤에 그릇 세 개에 나누어 담고 물감을 풀었다.

맨 먼저 그려 본 것은 닭. 되직한 밀가루반죽을 스케치북에 슥슥 문지르는 느낌이 제법 괜찮다.
윤우가 좋아하는 '눈알'도 붙여보게 하고 반짝반짝 별 스팽글로 닭몸도 장식해 보았다.

원래 난 시범만 보여주려 했는데, 이 녀석이 손에 끈적한 게 묻는 걸 기겁하면서 소심하게 돌고래의 콧바람과 단추로 만든 숨구멍에서 나오는 분수만을 노란색으로 찍찍 칠한다. 그러더니 자기는 장식에만 몰두...-_- 저 윗 그림에서 보이는 사자(로 보이지는 않지만...;;;)도 어떻게든 그리게 하고 싶었지만 본인은 갈기와 눈만 붙이겠단다.
 
39개월 짜리 아이와 함께하는 미술놀이라는 것이 이런 식이다. 엄마 미술 90% 아이 참여 10%. 놀이책에서 정리해놓은 놀이리스트들을 선뜻 윤우와 함께 하지 못했던 이유도 이런 것이었다. 이 나이 또래의 아이에게는 목표가 있는 행위를 시킨다는 것이 거의 불가능하며 그럴 경우 대부분 엄마 활동으로 끝나버린다는 것. 정작 '행위'를 즐기지는 못하더라도 다양한 재료로 이런 표현이 가능하다는 것을 '보여주는 것'만으로도 의미있는 걸까. 사실 모든 답은 그 과정에서 윤우가 충분히 즐거워했냐는 것인데 엄마 입장에서는 모든 준비과정과 후처리과정을 고려했을 때, 수고로움 대비 즐거움의 비율을 생각하지 않을 수 없다.

어쨋든 4개의 (엄마;;) 작품을 마치고 남은 반죽들에 밀가루를 더 부어 점토처럼 말랑한 반죽을 만들어서 건넸다.

내가 윤우 놀이감으로 밀가루를 사기 시작한 건 원래 점토를 대신하기 위해서였다. 놀다가 방치되는 점토들은 항상 산지 며칠 안되어 딱딱하게 굳기 일쑤였기 때문에 아예 필요할 때마다 점토처럼 반죽을 만들어주자는 생각이었던 것이다.
그런데 이번에는 색깔도 점토처럼 알록달록~ 경쾌하다. 뒷수습을 대충 마치고 가보니 윤우가 '깔맞춤'을 해놓았다. ㅎㅎㅎ 실제로는 차도에 몇 보이지도 않는 노랑색 차가 어찌 저리 대세일까. 역시 장난감의 세계에서 노랑은 독보적이다.


밀가루 반죽으로 매번 하던 과속방지턱 놀이만 하길래 이번에 슬쩍 '놀이학습'을 시도했다. 공룡을 좋아하는 윤우에게 공룡 인형을 반죽에 찍으며 "공룡 화석이다!!!"라고 외쳤다. 공룡책에 화석 이야기가 나올 때마다 '옛날 생물들이 흙에 꾸욱 눌려 찍혀서 돌이 된 것'이라고 설명을 해주었는데, 이 때가 기회다 싶어서 끼워넣은 것이다. 아이 입장에서는 나름 '유레카!'스러운 깨달음일 것 같은데 오버하는 엄마만큼의 반응은 없다. -_-;;; 그래도 공룡 발자국을 계속 찍어보며 흥미로워했다. 쩝

정작 오버하며 즐긴 건 이거다. 점토 코딱지. T-T 거기에 썬글라스까지 쓰며 사진찍으라고 들이대는 건 뭔지.
나에게도 노란색 점토로 친절하게 코를 만들어 붙여주었다. 노란색으로 만드니 참 리얼했다. 아직은 이런 수준. 뭘 가르치니, 욕심 버리자. ㅋㅋ

그래도 밀가루 하나로 참 다양하게 놀 수 있었다.
밀가루 놀이 → 밀가루풀 그림 → 밀가루반죽에 모양 찍기 → 밀가루 반죽으로 모양 만들기 까지~~~
내일도 윤우는 밀가루를 찾겠지. 밀가루 한 봉지 더 사놔야겠다.
매서운 겨울날, 우리 집에는 이렇게 매일매일 밀가루 눈이 내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