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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모와 다른 아이들

고래의노래 2018. 10. 7. 10:26

<아들>
안경을 쓴지 5년 정도 쯤 되었던 중학교 시절에 문득 '나도 시각장애인아닌가?'하는 생각을 한 적이 있어요. 안경이라는 도구를 쓰지 않으면 일상생활이 힘들만큼 고도근시였는데, 이 정도면 '장애'수준이라고 볼 수 있겠다 싶었죠. 잠시였지만 '장애'라는 말이 나에게도 적용될 수 있다는 생각에 머리가 깨이는 느낌이었고, 사회적 다수라면 기능적으로 장애여도 장애라는 용어 안에 포함이 안될 수도 있다는 것이 놀라웠어요.
이 책을 읽으며 그 때의 그 느낌이 다시 되살아나는 듯 했습니다.

아이들을 키우며 제가 겪었던 갈등의 주요한 부분에 대해 아래처럼 명확한 언어로 표현해놓은 데에는 후련하고 시원하기도 했고, 그런 것이었구나...라는 생각에 왠지 불편하기도 했어요.

<모든 양육은 두 가지 행위를 포함한다. 자녀를 변화시키는 행위, 자녀를 지지하는 행위.
자녀의 어떤 면을 변화시키고 어떤 면을 축복할 것인가? 차이를 존중하는 사회적 모델에 어느 정도 의지하고, 그러한 차이를 제거를 약속하는 의학적 모델에는 어느 정도 의지할 것인가?
가족은 차이를 둘러싼 관용과 불관용의 시험대이며 차이를 받아들이는 법을 배우는 이런 과정이 강조될 수 있는 가장 원초적이고 시급한 장소이다.
부모가 자녀를 고통에서 구원해주고자 하는 바람과 부모 자신이 고통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바람의 차이를 구분하는 것, 이는 언제나 가장 중요하면서도 불가능한 일이다.>

어느 쪽이 아이에게 옳은 방향인지 제시해주지 않은 채 모든 선택에 대해 그것이 쉽지 않았음을 이해해주는 부분에서는 위로도 받았지만 답답하기도 했습니다. 하지만 결국 아래처럼 이야기한 걸로 봐서는, 그리고 이 책의 인터뷰이들은 결국 아이의 수평적 정체성과 함께 생을 보내고 있는 부모들이므로 책이 지향하는 방향은 하나일 것 같긴 해요.

<이 책에 소개된 부모들 대부분은 경계를 초월해서 사랑을 실천한다. 따라서 그들이 그들 자녀를 사랑하게 된 과정을 살펴봄으로써 우리도 그들과 똑같이 할 수 있는 유인과 교훈을 얻을 수 있을 터이다.>

아래의 이야기도 아프지만 인정할 수 밖에 없었습니다. 다양성에 대한 인정을 외치는 저이지만 "이것만은 받이들이기 힘들어!" 하는 부분이 있거든요.

<사람들은 모두 편견의 피해자인 동시에 가해자다.
위계때문에 상처받은 사람들조차 그들 사이에 또 다른 위계를 세우고자 하는 충동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우리의 속성들이 모두 장애일 수 있으며 일생은 장애에서 다시 장애로 들러가는 과정이라는 이야기도 저의 안경생각과 맞물려 의미있게 다가왔습니다.

"실제로 인생의 주기는 장애에서 한시적인 비장애로, 다시 장애로 흘러가는데 그나마도 운이 아주 좋을 때 이야기다." - 장애인권학자 토빈 시버스
종류와 상관없이 모든 속성은 우리를 상대적으로 무능력하게 만든다. 문맹, 빈곤, 지루한 성격, 종교, 권력...
"물건이든 사람이든 어떤 주체가 제 기능을 다하지 못하고 있다면 그 주체가 은총이나 발전, 진화의 과정에 있기 때문일 것이다." 비평가 나이절 앤드루스

나의 속성이 질병인지, 정체성인지 판단하는 것이 매우 중요한 지점일 것 같은데 저자는 아래처럼 말하잖아요.
"내 인생에서 난독증은 질병이고 게이는 정체성이다."
그러면서 글읽기에 실패하고 성적 정체성이 교정되었다면 다르게 생각할지도 모른다고 이야기하죠.
그렇다면 그 판단의 기준은 도대체 무얼까요. 지금 이순간의 만족감?

새로운 과점을 제시해주면서 지극한 혼란을 주는 매우 바람직한 책이예요. ^^
책을 읽으며 마음이 편치 않을 듯 하지만 이 책을 지금이라도 읽게 된 건 분명 축복인 듯 해요.
고마워요. 언니. ^^

<청각장애>
이제서야 다 읽었어요. 1장에서도 느꼈던 바지만 한 인간을 진심으로 대한다는 것이 얼마나 섬세한 일인가에 대해 중압감까지 들더라구요.

정체성이냐 질병이냐, 다양성이냐 편리함이냐, 누구의 선택이냐 의 문제들을 뛰어넘어 어떤한 판단도 내릴 수 없게 만드는 다양한 사례들의 폭포를 뒤집어 쓴 다음에는 " 모든 것이 운명이고 우리는 그저 살아갈 뿐."이라는 상태가 되고 말았습니다. 😱 ㅎㅎ

저는 여전히 '진화에는 선악의 방향성이 없다는 것'과 '선한 방향을 규정하는 건 극단의 미래를 상상할 수 없는 인류가 지금의 나를 놓을 수 없는 불안감'때문이라고 생각하기에 농문화에 대한 저자의 생각과는 조금 다른 결의 생각이 들더라구요.

지금 우리가 할 수 있는건 농문화를 지켜야한다는 당위보다는 어떤 경계선에 있는 인간이든 존중되어야한다는 것 뿐이고, 다양성을 유지하고자 하는 인류의 욕구는 유전자의 명령같은 욕구이기에 어느 문화가 사라져버리는 듯 하더라도 다른 곳에서 또 다른 문화가 분화되며 창조될 것이라고 생각해요. ㅎ

읽어가며 물론 바뀔 수도.. 계속 읽어보아요~ 😘

<소인증>
이현주 언니와 함께 읽고 있는 <부모와 다른 아이들> 지난 주에는 <소인증> 부분이었다. 언니~ 덧글로 달려다가 너무 길어져서 내 담벼락에 적어요. ㅎㅎ

소인증 부분을 읽으면서는 외형적으로 드러나보이는 다름이 정체성에 얼마나 많은 영향을 미치는지 느낄 수 있었어요. 아래와 같이 소인증모임에 처음 나갔을 때 소인들이 받을 수 있는 충격이 설명되어 있었잖아요.

"제가 처음 그 모임에 나갔을 때 내가 가진 거라고는 나 자신밖에 없었어요."
"자신의 모든 문제를 소인증 탓으로 돌려왔지만 이제는 개인적인 결점을 받아들이는 법을 배워야 하는 사람들에게 LPA 모임에 참여하는 일은 정신적 외상을 초래할 수 있다."
"소인에게 가장 어려운 일은 처음으로 다른 소인을 만나는 것이다."

자신이 구별되어지는 특징이라는 것이 손쉽게 나의 유일무이함을 증명할 수 있는 정체성의 도구였다가 그것이 평범함이 되어버리면 혼란스러워한다는 점이 새롭더라구요. 청각장애 부분에서는 오히려 공통점을 공유한다는 점에 대해 위안을 받는다는 이야기가 많았는데 말이죠.

"소인으로 사는 것보다 소인자녀를 양육하는 일이 감정적으로 더 힘들다"
"요는 아홉살 때 가졌던 편견 중에서 무엇이 시간이 흐르면서 바뀔 아홉살짜리 편견인지, 또는 어른이 될 때까지 지속될 진정한 속마음인지 아는 것이다."

아..저걸 어찌 알 수 있단 말인지..
우리가 항상 이야기하는 것이지만, 부모노릇이 힘든 건 아이 인생의 결정적인 선택을 대신 하게되는 시기에 갖는 중압감때문인 것 같아요.

"치료 대 수용을 둘러싼 영원불멸의 문제"

청각장애 부분에서 인공와우 수술과 구화법과 수화법의 기로에서 부모들이 겪었던 고민이 여기에서는 사지 연장술에서 재현되지요.

이 즈음에서 소인증 부모들이 스티븐 고피츠 박사에게서 받은 위안 부분을 읽으니 저 분이 매우 궁금해지더라구요.

"그는 아이들을 환자로 대하지 않았어요. 자식처럼 대했죠. 어떤 의사도 그렇게까지 환자를 대하지는 않아요."

소인증에 대한 전문적인 지식을 가졌으면서 아이들 한 명 한 명의 존엄한 아름다움을 바라볼 줄 아는 의사. 문제를 한 방에 해결하려하지 않고 장래에 확실한 이점을 보장하는 수술들을 단계적으로 여러 차례 실시하며, <죄송합니다. 지금은 이 환자를 봐야해서요.>라고 하면서 한 환자를 길게 진료하는 의사.
진정 우리가 바라는 의사의 모습이라는 생각이 들었어요.

그 점에서는 소인증 유전자를 발견한 존 바스무트도 인상적이었어요. 자신이 발견이 자칫 악용될까 연구결과 발표장에 소인증협회 간부들과 함께 했다죠.
기술과 과학이 사람을 향할 때 진정 울림과 감동이 있는 것 같아요.

'균형의 정확한 본질은 집집마다 다르다'
결국 중요한 것은 그것이 사랑에 바탕을 두었는가 하는 것이겠죠. 며칠 전 아이 학교 반모임에서 함께 읽은 발도르프 책에서 이런 말이 나오더라구요. "우리는 사랑하는 힘을 의식으로 전환할 수 있어야 한다."
우리가 할 수 있는 부분에 사랑으로 최선을 다하되 그 이상의 부분에 대해서는 받아들이고 우리를 보듬는 더 큰 힘이 있을거라 믿는 것이 필요한 것 아닌가 싶어요.

<다운증후군>
이현주 언니와 함께 읽는 <부모와 다른 아이들> 1권 4장 다운증후군

언니, 전 다운증후군 부분을 읽으며 언니와 정말 많이 다르게 느낀 것 같아요. 아마도 이게 같이 읽기의 힘이겠지요. 내가 보지 못한 부분을 다른 사람을 통해 보게 되는 거요.

부모로서의 역할이란 어떤 것인지 행복하게 살아간다는 것은 어떤 의미일지에 대해서도 지난 챕터에 이어 생각해볼 부분들이 있었지만, 저는 앞의 챕터였던 청각장애와 소인증과의 다른 부분이 뭘까 생각하게 되었어요.
청각장애는 밖으로 드러나지 않는 특성이기에 그 챕터에서는 정체성에 대한 이야기가 주요 주제였지요. 소인증은 겉으로 너무나 명확히 드러나는 특징이기에 오히려 그 특징 속에서 자신만의 고유함을 발견해내는 것이 숙제였고요.

다운증후군은 앞의 둘과는 또 다른 차원의 이야기라고 생각되었는데, 태아감별에 따른 낙태여부가 도드라지네요. 정체성의 문제도 물론 이야기되지만 저자도 이야기한 바대로 '정체성의 문제라기 보다는 과학의 문제'가 더 주요해보였어요. 왜 주제가 이렇게 바뀌었을까 생각했을 때 다운증후군 당사자들의 인터뷰가 이 챕터에 실리지 않았다는 사실이 떠오르더라구요. 지적장애를 가지고 있기 때문에 인터뷰가 용이하지 않았을 수 있겠지만, 제이슨같은 고기능 다운증후군의 경우도 소개하면서 정작 그 당사자의 인터뷰를 싣지 않은 게 아쉽습니다. 이 챕터는 계속 '그들'을 어떻게 바라보고 양육해야 되는지에 대한 '보호자'들의 이야기들만 이어지지요. 그래서 저는 이 챕터가 다른 부분들보다 조금 공허하게 느껴졌습니다.

물론 인터뷰했던 다운증후군 부모들의 헌신적인 태도는 정말 감동적이었고 부모의 역할은 어떠해야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했습니다.

제이슨 이야기를 하면서 제이슨의 엄마인 에밀리가 이런 말을 하지요.
"대다수의 부모들의 주된 역할은 그들 자녀에게 무엇이든 할 수 있다는 생각을 심어주는 거예요. 하지만 나의 주된 역할은 제이슨이 포기하도록 만드는 거죠."
'너는 뭐든지 될 수 있고 뭐든지 할 수 있어!'라는 가르침이 아이에게 '가능성의 폭력'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를 들은 적이 있는데, 그 이야기가 생각나더라구요. 강점과 약점을 제대로 인지하게 해주는 지도가 아니라 모든 가능성을 열어두며 결과는 너에게 달려있다는 식의 가르침은 아이에게 중압감을 줄 수 있다는 거죠.

아래의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어요.
"내 친구들은 그들이 완벽하다고 생각하는 아이를 낳았지만 시간이 흐르면서 그 아이의 한계나 문제와 타협해야 했어요. 반면에 나는 모든 사람이 재앙이라고 생각하는 아이를 낳았지만 내 여정을 아이의 놀라운 점들을 하나씩 발견해가는 것이 전부였죠."
모든 것이 축복이며 감사하게 되는 마음가짐이란 어디서 출발해야 되는지에 대해 생각해보게 되더라구요.

장애인에 대한 처우와 시각이 변화해온 과정에 대한 이야기도 인상적이었습니다.
2차대전이 끝나고 장애인 참전 용사들이 급증하면서 장애인에 대한 사회적인 편견이 완화되었다는 것, 흑인들이 인종차별에 반대하며 봉기했을 때 다른 사회적 소수자들에게도 권리주장에 대한 문이 열렸다는 이야기를 읽으니 인류가 나락으로 떨어진 것 같은 비극을 경험한 뒤에 어떤 면으로든 성장했다는 것에 안도감이 느껴지기도 했어요.

미국정부의 '조기개입서비스'에 대한 이야기와 국립장애인협회에서 출산 전 다운증후군으로 진단받은 부모들에게 상담을 해준다는 것에 대한 이야기를 읽고는 우리나라에서도 이러한 서비스들이 존재하는지 궁금해졌습니다. 사회적 시스템이 받쳐주지 않는 상황에서 태아감별 낙태에 대해 무조건적인 비난을 할 수는 없지요. 게다가 우리나라에서는 태아감별 이후에라도 제대로된 정보가 제공되지 않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어떠한 제도를 통해 무엇을 받을 수 있고, 관련협회는 어디가 있어서 어떠한 정보들을 얻을 수 있는지, 해당 장애를 가진 이를 직접 만나거나 가족들을 만나 이야기를 들어 볼 수 있는지 등 다양한 정보들이 제공되어야 해요. 막연한 두려움을 넘어서게 하는 구체적인 도움이 필요합니다.

하지만 제도적 서비스들이 마련되어 있어도 이것이 제대로 제공되지 않는 경우도 많지요.
"공공기관을 상대로 싸울 수단이 없는 사람들은 좀처럼 공공서비스를 이용할 수 없다. 즉 공공기관을 상대로 싸워서 그들이 제공하는 서비스를 이용하려면 대체로 교육과 시간, 돈이 필요하다."
"미셸은 집근처의 조기개입프로그램 센터가 사라지고 대책을 찾으려 노력하는 과정에서 전문변호사를 선임하고 공공 서비스 책임자를 두번째로 만나러 갈 때 그를 대동하고 갔다"
"만약 내가 가난했거나 다운증후군 아동문제에 대해 잘 몰랐다면, 심지어 내가 모르고 있다는 사실조차 몰랐다면 과연 어땠을까요?"
"제이슨이 그 학교에 지원했다는 사실을 알게 된 학부모들이 경기를 일으켰어요. 그들은 그 학교가 <저능아들의 학교>로 전락할 거라고 생각했어요. 에밀리가 소송도 불사하겠다고 위협한 다음에야 제이슨은 비로소 입학허가를 받을 수 있었다."

이 챕터에서 나온 부모들은 정말 헌신적인 부모들입니다. 하지만 저자가 이야기하고 그 헌신적인 부모들이 인정하는 것처럼 헌신을 위해서도 어느 정도의 경제력과 정보력이 필요하지요. 하지만 좋은 치료를 받기 위해 넘어야하는 장벽이 있는 사람들을 저자는 인터뷰하지 않았어요. 저는 이 점도 마음에 걸립니다.

선택적 유산의 증가로 다운증후군의 인구가 감소할 것이라 예상했지만 신생아 속 다운증후군의 비율은 일정 수준을 유지했다고 이야기하며 하지만 인구비례에 따라 다른 분포를 보였는데 "어머니의 80%가 35세 미만의, 태아기 검사를 하지 않은 대체로 가난한 여성들'이었다고 언급하지요. 그런데 그 다음 장에 바로 '노산의 인구 증가가 다운증후군 인구가 늘어나는 요인'이라고 말하더라구요. 나머지 20%의 영향력이 그렇다는 것일까요? 아리송해졌습니다.

저를 가장 불편하게 했던 부분은 다운증후군 아동의 입양문제를 전문적으로 다루는 기관의 한 책임자가 인터뷰에서 한 말이었어요.
"마음같아서는 자신의 아기를 포기하고 우리에게 보낸 사람들의 명단을 보여주고 싶군요."
이건 명백히 비난의 어조였어요. 저자가 그저 실상을 알려주고자 했다면 그런 사람들이 많다는 정도면 충분했을 꺼예요. 그런데 굳이 저런 비난조의 말을 그대로 책에 실은 건 어떤 의도였는지 모르겠네요.

물론 저도 '정체성의 위기'라는 용어를 만들어낸 에릭 에릭손이 자신의 다운증후군 아이를 보호시설로 보내고 거의 찾아가지도 않았으며 죽기 직전까지 이 사실을 공개하지 않았다는 사실과 그렇게 보호시설로 보내라고 '인류학자' 마거릿 미드가 조언했다는 사실은 무척 놀라웠어요. 하지만 그 놀라움은 '어떻게 그런 일을!'이 아니라 '어떠한 사정으로?'라는 궁금증으로 이어졌습니다.

보편적 인류에게 인간에 관한 극적인 성찰을 주었던 두 학자가 개인의 인생에선 그 학문적 내용과 전혀 달라보이는 선택을 한 것은 무엇때문이었까요? 두 학자는 그 선택이 자신들의 연구과 반하는 결정이라고 생각했을까요, 아니면 그러한 연구를 해보았기에 이러한 결정을 내린다고 생각했을까요?

저에겐 여러 면에서 아쉽고 그래서 또한 여운이 남는 챕터였습니다.

<자폐증>
빨려들어가듯 읽었어요. 왜 그랬는지 언니는 짐작하겠지요.

상상조차 할 수 없는 극한의 상황들을 견디어온 부모와 가족들의 이야기가 펼쳐질 때는 숨조차 멎는 것만 같았습니 다. 애정을 준 만큼 티가 나지 않는 자녀를 양육한다는 것은 지독한 희생이라고 저자도 이야기하지요. 잠도 못자고 아무도 도와주지 않으며 누구도 자녀들을 사랑해주지 않는 상태에서 버티고 있을 때, 그 버티는 의미까지 잃게 만드 는 '존재에 대한 무관심'을 대면한 상황들을 맞이하니 숨이 막혀왔습니다.

성공한 자폐인으로 알려진 템플 그레딘의 엄마는 '그들은 사랑은 불안정하고 의지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고 말했어 요. 어떤 부모들은 여러 가지 에피소드들을 통해 그들만의 애정표현법이 있으며 이를 식별할 수 있어야 한다고 이야 기하죠. 하지만 어떤 연구에서는 자폐인들이 얼굴을 인식할 때 일반인들이 사물은 인식하는 뇌가 활성화된다는 걸 밝혀내기도 했습니다. 예상가능한 상황에서 안정감을 느끼기 때문에 기계보다 사람을 대하는 것을 꺼려하고, 그래서 부모에 대해서도 우리가 말하는 애정이라는 마음은 없을 수도 있습니다. 그것은 그들의 잘못이 아니라 그냥 그렇게 된 것이죠. 하지만 '나쁜 의도'가 아니었더라도 힘들지 않은 것은 아닙니다.

저는 그러한 교감을 무엇보다 중요하게 여겼어요. 아이를 임신하고 아기가 여자아이였으면 좋겠다고 빌었던 것도 아 기와 소통하고픈 욕구가 컸기 때문이죠. 신체적인 장애들이 차라리 낫다고 생각했어요. 저에게 가장 큰 재앙이라고 한다면 이 책에 적힌 자폐인 부모들이 겪은 그런 '일방적으로 몰아치는' 고통에 직면하는 것이었죠.

"애정을 이해할 수 있도록 표현하지 않는 자녀를 양육하는 일은 사람을 황폐하게 만든다. 구체적인 상황에 맞추어서 치료와 수용을 병행함으로 이 같은 문제를 완화할 수는 있다."

저자는 자폐증이 '정체성과 질병 사이의 갈등이 극단적으로 드러난 케이스'라고 이야기합니다.
- 생물학적 실체가 없어서 질병이라기보다는 증후군인데
- 그 발현의 양상과 강도는 너무나도 다양해서 스펙트럼으로 이야기되기 때문에
하나의 그룹으로 한 목소리를 내기도 힘든 상황이죠.
자폐 커뮤니티는 사랑을 둘러싼 엇갈린 관점으로 인해 양극화, 분열된 커뮤니티라고 이야기합니다.
신경 다양성을 옹호하며 자폐증을 하나의 정체성으로 받아들여야 한다고 주장하는 쪽이 있는가 하면
명백한 치의이 대상으로 교정되어야 한다고 보는 쪽이 존재합니다.
중증 자폐인 그룹은 경증 그룹이 상황을 이해하지 못한다고 이야기하고요.

그래서 그런지 유독 이 장에서는 이 책의 주제처럼 관통했던 이야기들이 반복적으로 도드라지게 강조됩니다.
"자폐증은 장애인 동시에 차이이다. 우리는 한 편으로 차이를 존중하고 소중하게 여기는 가운데 장애를 완화할 방법 을 찾아야 한다."
"근본진실을 밝히는 일과 진실 자체를 창조하려는 시도 사이의 균형을 잡아야 한다."
"치료하고자 하는 충동에만 이끌리거라 수용하고자 하는 충동에만 이끌리지 않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포크마르는 그에게 노트북을 주자고 제안했다. 하지만 담임교사는 그건 <목발>을 주는 행위라며 반대했다. 폴크마 르가 말했다. '다리가 없는 사람에게 목발을 주는 것은 당연한 일이고, 선행이란 바로 그런 것 아닐까요?'"

이어서 그러한 균형을 잡으려 좌충우돌한 이야기들이 펼쳐집니다.
자녀의 자폐증 앞에서
- 도와주거나
- 치료하고
- 묵인하는
부모들의 다양한 태도들이 사례로 보여지지요.
자폐아들을 위한 특수한 교육방법을 개발해내는 부모와 재단을 설립하고 제도와 시스템을 정비하는데 온 열정을 바 치는 부모들의 이야기는 가슴 벅찬 것이었어요.
그 중 제게 특히나 인상적이었던 건 5자녀의 엄마였던 '아이실다'였습니다. 그녀는 아이의 상황을 묵묵히 받아들이 면서도 아이를 몰아세우는 불의 앞에서는 단호한 모습을 보였지요. 그녀가 우리가 이단으로 여기는 여호와의 증인이 었고 그 종교커뮤니티에 많이 의지하며 현실을 이겨나갔다는 것도 무척 인상적이었어요. 갑자기 이단의 기준에 대해 다시 생각해보게 되었습니다.

저자는 '받은 애정을 돌려줄 수 없는 자녀를 부모가 얼마나 사랑할 수 있을지'에 대한 관심에서 이 연구를 시작했다 고 이야기합니다. 자폐증은 특히나 중증일 경우 받은 애정을 돌려주는 것은 고사하고 사람들이 애정을 갖기에도 힘든 행동유형이지요. 그렇다면 도대체 이런 사람들이 왜 등장하는 걸까? 그 의미는 뭘까? 하는 생각까지 들었습니다.

다른 장애들은 선별검사법의 등장 등 의학기술의 발전에도 불구하고 인구학적으로 비율이 감소하거나 증가하지 않고 일정한데 유독 자폐만은 증가세라고 합니다. 상황을 해석하는 여러가지 이야기들이 있지만, 진단율과 발병율이 모두 증가하고 있는 것만은 사실이라고 하네요.
하지만 자폐가 왜 발생하는지에 대한 연구들이 밝혀낸 건 뾰족한 하나의 원인은 없다는 것일 뿐입니다.
친부의 나이와 연관이 있고,
사고전달 백색물질이 염증으로 과잉 생산되며
시냅스의 가지치기가 잘 되지 않고
단백질이 과잉 생산되는 시스템이면서
중금속 등 환경적인 요인도 작용한다는 것
등 여러 이야기들이 나오고 있지요.
참 익숙한 이야기들이라 예전에 여러가지 정보를 수집했던 시절 생각이 났습니다.

발도르프에서는 '아이가 선택해서 태어났다'는 이야기를 많이 해요. 그런데 비슷한 이야기가 이 책에도 나와서 신기 했습니다.
자폐증의 유전적 원인에 대해서 연구하는 유전학자 위글러는 "개인적 성격과 장애 사이에는 어떤 상호작용이 존재하 는 것 같다. 당신과 내가 비슷한 장애를 가졌을 수는 있지만 우리의 선택은 다를 것이다.어쩌면 그 아이들은 실제로 그러한 선택을 하고 있을지도 모른다."라고 이야기했다고 하네요.

책에서는 자폐인들이 있었기에 인류가 진보하고 문화가 더 다채로워졌다고 말합니다.
"한 쪽 구석에는 아스퍼거 증후군인 남자가 돌멩이를 다듬어서 인류 최초로 창날을 만들어요. 사회적인 사람들은 기 술을 개발하지 않아요."
"헬렌 켈러는 빼놓고 세상을 설명해도 대다수 사람들은 그녀의 빈자리를 크게 느끼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모차르트 , 아인슈타인, 안데르센, 뉴턴을 빼놓고 세상을 설명해보라. 그 세상은 무척이나 빈곤해질 터이다."

하지만 그 부모들은 기쁘고 행복하지만은 않았겠지요.
책의 마지막에 저자는 자폐증 자녀를 위탁할 시설들이 충분히 필요하다고 이야기합니다. 사회적인 제도와 시스템의 마련은 더 말하면 입아플 것들이죠. 자폐증 사례 중 하나로 나왔던 벤이라는 청년이 독립하여 기초수당으로 생활비를 충당하고 공동가정주택에서 돌봄 세입자와 함께 지낸다는 부분을 읽고 우리나라도 빨리 이러한 시스템이 탄탄히 마련되면 좋겠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물론 사례로 든 많은 경우에서 그러한 서비스의 혜택을 받기 위해 얼마나 투쟁했는지의 이야기들이 많이 나오지만, 우리나라의 경우에는 투쟁해서 얻어낼 무언가도 없다는게 너무 마음 아팠습니다.

누군가는 아스퍼거라고 진단하고 누군가는 아닌 것 같다고 했던 첫째는 어쨋거나 지금 건강하게 우리 곁에 있습니다. 여전히 상황의 맥락을 이해하는데 서툴고 창의적이기보다 분석적이며 아주 기본적인 것을 잘 잊어버리지요.
여전히 저희도 걱정했다가 이만하면 됐다 안도했다가, 화가 났다가 인정했다가, 들쭉날쭉합니다.
개선의 욕구와 수용의 충동 사이의 줄다리기는 아마도 계속되겠지요. 제가 할 수 있는 것과 할 수 없는 것을 구분할 수 있는 지혜를 기도로 갈구할 수 밖에요.


6장 <정신분열증>

어쩌면 가장 가슴아픈 장이 아니었나 싶어요.
저자가 일관되게 이야기해 온 질병과 정체성의 문제가 전혀 다른 차원으로 이해되어야 하는 장이기도 했고, 부모와 가족들의 고통도 다른 장보다 가장 극심했던 것 같습니다.
저자는 아예 "정신분열증은 무조건적으로 치료가 절실하다."라고 이야기하죠.
그리고 "정신분열증이 없었다면 이 조사를 하는 과정에서 내가 만난 부모들 중 상당수가 행복해졌을 것이다. 내가 보기에 그들은 고통은 끝이 없으며, 특이하게도 그 어떠한 보상도 없다."라고 했습니다. 부모와 다른 아이들을 돌보면서 사랑과 삶의 의미를 알아가는 많은 훈훈한 스토리를 기대할 수 없는 질병. 희망이 없 것만큼 사람을 고통스럽게 하는 게 또 있을까요.


1. 정신분열증 환자들

정신분열증이 사춘기 이후에 발병된다는 것과 퇴행적으로 진행된다는 것은 다른 질병들과의 확연한 차이입니다. 주변 사람들에게 극도의 고통을 주지만 정작 정신분열증 환자들은 그 질병 안에 안주하면서는 나름의 '평화'를 누리는 것 같기도 했어요.
그들은 해당 질환을 욕하지 않고 오히려 약 복용으로 자신의 상태를 인지하게 되면서 혼란스러움과 고통을 느끼게 되죠.

상태를 호전시켜준다는 약들은 개성을 말살하고, 극심한 경우에는 죽음으로까지 이르게 합니다. 그렇다고 그 약들이 증상을 깨끗이 없애주는 것도 아니죠. 상태가 호전된다는 의미는 단지 예전만큼 환청에 귀기울이지 않는다는 것 뿐이니까요.

"어떤 목소리는 그리울 껍니다."
환청이 모두 사라지게 아쉬울 거라는 한 환자는 저렇게 이야기하죠. 또 어떤 분은 약물치료를 거부했던 이유에 대해 묻자 "감정이 고조되는 느낌을 다시 느끼고 싶었어요."라고 울먹입니다.

저 이야기를 읽었을 때, 어떤 욕구인지 조금은 알 것 같았어요. 모든 감각을(촉각, 시각, 후각 등등)
철저하게 차단하고 느낄 수 없게 하면 나중에는 자기 자신이 존재하는지에 대해서도 의문이 들기 시작한다고 해요. 우리는 감각으로 우리 존재를 인지하니까요. 강렬한 감정이 없는 상태가 계속되는 것도 아마 감각이 통제된 상황이랑 비슷한 느낌이지 않을까 싶었습니다. "내가 살아있는 게 맞나?"하는 근본적인 회의...그런데 들 것 같아요.

저자는 정신병이 있음을 인정하지 않고 평화로운 모습으로 굶어죽은 린다 비숍에 대해서 이야기하면서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행복'을 어떻게 바라보아야 할지 질문을 던집니다.

"해리는 영웅이예요. 이를테면 그는 15년째 베트남 전쟁을 치러 온 셈이예요. 그럼에도 여전히 자리를 털고 일어나서 즐거운 일을 찾고 있잖아요."
아마도 이 이야기가 정신분열증 환자들을 가장 잘 나타낸 말이 아닌가 싶습니다. 내 일부를 무시하는 연습을 하면서, 어떤 것이 진짜 나이고 행복인지 계속 혼란스러운 삶, 그야말로 투쟁이요.


2. 부모와 가족의 고통

'해리를 보살피는데 얼마나 많은 시간과 심력을 소모하는지 그녀에게 물었다.그녀의 눈에 눈물이 고였다. (키티) "내게 있는 전부요. 모조리 다요. 정말 이렇게까지 말하고 싶지 않았어요."'
이 부분을 읽는데 얼마나 마음이 아프던지요..
저는, "지금 제 아이가 이 상태가 아니라는 건 이제 상상할 수 없어요. 이 질병은 저희에게 큰 의미를 주었어요."라는 희망찬 스토리보다 저런 무너지는 이야기에 더 마음이 갑니다. ㅠ.ㅜ

"조지가 혼자 중얼거리는 소리를 들으면 화가 치밀어 오르지만 심호흡을 하면서 참아요. 절대로 그만하라고 강요하지 않아요."
정신분열증 환자의 삶이 매일의 투쟁이라면, 부모 또한 그러할 겁니다. 어쩌면 더 극심한 투쟁일 수도 있겠네요.

군인에 집착하는 샘의 흥미를 충족시켜주기 위해 노력하는 부모의 이야기가 나왔지요. 주변 전문가들은 그러한 노력이 오히려 샘을 망치고 있다며 다 들어주고 오히려 확장시킬 것이 아니라 '체계'를 만들어주어야 한다는 조언을 했구요. 
"나는 그 의사에게 우리 집에 와서 직접 체계를 만들어보라고 제안하고 싶었어요. 우리는 그 체계라는 걸 만들기 위해 알려진 모든 시도를 해보았어요."
아, 이것도 어찌나 공감이 가던지요. 물론 샘과 같은 정도의 증상의 아이에게 체계를 만들어주는 부모도 있을 수 있을 겁니다. 하지만 그렇지 못한 부모도 있지요. 단지 노력이 부족하다고 비난하기엔 이미 그들은 '전부'를 쓰고 있으니까요. ㅜ.ㅡ

정신분열증 환자를 치료하는데 최선의 단기효과를 보여준 곳이 나이지리아와 인도였다고 하죠. 그리고 그 이유는 '친족관계'를 계속 유지했던 힘이었구요.
"애정의 반그들이 그들의 단절된 세상까지 덮어주지는 못하는 것 같지만 그럼에도 대다수 환자들에게 위안을 준다는 사실을 부모들은 알아야 한다."
물론 그렇겠지요. 하지만, 사회적인 분위기와 시스템이 이를 받쳐주지 않으면서 부모에게 희생과 투쟁을 강요할 수는 없을 것입니다.

 

3. 우리가 해야할 일

"환자들이 어떻게든 사회라는 직물의 일부로 짜여들어가는 것이 무엇봐 중요하다."

저자는 정신분열증 환자들의 몇몇 범죄로 인해 정신분열증이 위험하다는 사회적 편견이 생겼다고 이야기하면서 대부분의 환자들은 적절한 관리를 받으면 정상적인 생활을 할 수 있다고 말합니다. 또한 정신건강시스템과 형벌 제도를 비용 면에서 비교해보아도, 정신건강시스템이 훨씬 이득이라고 이야기하죠. 아래 뉴스도 그런 내용인데요, 정신분열증이 '조현병'으로 명칭이 바뀐 것 어렴풋이 알고 있었는데, 그게 '현을 조율하듯 관리하면 괜찮은 병'이라는 뜻인지는 몰랐네요. 명칭에는 많은 의미, 감정이 들어가는데, 조현병으로 병명을 바꾸는 운동을 하신 분들께 감사하더라구요.
 
<조현병, 알지 못하니까 두렵다>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7290948001&code=940100

저자가 제시한 사례 중 가장 희망적인 사례인 수전은 우리가 저현병 환자들과 어떻게 함께 살아가야 하는지에 대해 이야기해 줍니다.

포 윈즈 정신병원에서 조현병 환자들은 호스피스 환자들과 병동을 공유하지요.
"정신병 환자면서 현실세계가 살지 않는 나와 죽음이라는 가장 지엄한 현실에 있는 사람들과의 만남"이라는 표현처럼 두 환자들의 상황은 서로를 치유해주는 힘이 있었던 것 같아요.
"죽음은 다시 내 안에 현실이 파고들도록 만들었어요. 나는 지극히 자기 파괴적인 사람이지만 그들은 살고자 하는 마음이 간절했죠."

결국 우리는 근본에서 다시 바라봐야 되는 게 아닌가 해요. 우리 모두가 언젠가는 죽고, 그래서 소멸 전에 어떻게 살아갈 것인가를 선택해야한다는 사실이요.

아래 링크는 책에 언급된 '매드 프라이드'관련인데요, 조현병 환자들을 사회가 어떻게 시스템 안에서 '안정적'으로 품는지에 대한 유럽 국가들의 좋은 사례도 나와있네요.
현수1004
<미친 사람들의 자존심, ‘매드 프라이드’를 아시나요?
http://news.khan.co.kr/kh_news/khan_art_view.html?artid=201807290952011&code=940100