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인간과 상징> 모임 후 에세이들 본문
1. 무의식에 대한 접근 - 첫번째주
누군가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다른 사람이 아닌 그 사람의 이야기를 들어봐야 한다는, 너무나 당연한 사실을 왜 잊고 있었을까.
칼 융의 직접 쓴 글로 그와 대면해보니 그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훨씬 더 열려있고 선한 의도를 가진 심리학자였다. '10년의 기다림'이 가슴에 와 박힌다. 지금의 나에게도, 내 가족, 주변인들과의 관계 속에서 내가 꼭 간직해야 할 이야기인 것 같다. 꿈 속에서 성폭행범을 목졸라 죽인 내가 전하는 변화의 에너지가 이 기다림 안에서 잘 융화될 수 있게 해봐야지.
2. 고대신화와 현대인 - 두번째 주
신화, 영웅, 의례가 주는 성장으로의 도약이 옛날처럼 지금의 우리에게도 유의미하다는 저자의 이야기에 동의한다. 참된 의미에서 내 자신의 주인이 되기 위해서 끊임없는 죽음과 재생이 반복되는 이 삶이 고단하긴 하지만 길잡이가 있다면 더 편안할 것이다.
그런데 여성으로서 내가 잡을 수 있는 길잡이는 뚜렷하지 않은 것 같아서 안타깝다. 남성은 여성인 어머니와의 독립을 통해 남성으로서의 주체성을 획득한다. 그런데 여성은 어떨까 부모로부터의 독립이라는 성장의 단계는 마찬가지겠지만 여성에게는 더 미묘한 과정이 남아있다. 여성은 벗어나고자 하는 엄마처럼 여성이다. 제대로된 모방과 일치의 작업 또한 필요한 것이다. 캠벨이 '자연은 여성을 편애한다'고 했던 것처럼 월경을 통해 성인식을 자연스럽게 치른다고 한다면, 그 의식 안에서 여성은 '독립'과 '모방'을 동시에 이루어야 한다. 게다가 월경이 텁시되고 수치스럽게 여겨지는 지금 이 시대에 정말 힘든 과제이다. 스스로 개척하며 나만의 길과 방법을 찾는 것이 '아이러니한 축복'이 될 수 있을까.
꿈이 그러한 역할을 해줄 수 있을까. 내 감정이나 허황되 보이는 상상들이 혹여 길잡이가 되어주진 않을까. 주어진 정보가 없다면 내 내면의 우물에서 한 번 길어올려 봐야지.
3. 개성화 과정 - 세번째 주
이번 주 내용을 읽으면서는 이제까지 읽었던 부석심리학 관련서의 내용들이 한꺼번에 연결되어 정신이 없었다. 내가 품고 있던 주요 질문들이 질문으로 떠오르는게 당연한 것이라는 걸 알게되면서 안도감을 느끼기도 했다.
많은 부분이 명확해지기도 했지만 모호함을 모호함으로 남겨야 한다는 이야기가 답답하고 부담으로 느껴지기도 한다. 나는 미미하고 또한 거대한 존재이며 삶은 나를 애정하며 나를 자기완성으로 이끌기도 하면서 파멸의 함정을 치워주지도 않을 것이다.
분명함, 명확함, 신속함을 중요시하는 나에게 이것은 또 다른 도전.
꿈꾸고 계획하되 기꺼이 뒤틀릴 용기를 향해 나아가보자.
4. 시각 예술에 나타난 상징성 - 네번째 주
예술가 - 무언가 표현하지 않고는 못버티는 사람들. 무의식과 의식의 미묘한 조율을 시각적으로 보여주는 사람들.
그림으로 하는 소통을 직업을 꿈꿨었다. 어떤 형식의 삶을 선택하고 살아내고 드러내느냐로 생각했을 때 우린 모두 창조적 예술가라 할 수 있을 것이다. 대극합일의 삶의 연금술사로서 예술가를 난 여전히 꿈꾼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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