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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삶이 글이 될 때/읽고 보다

그리스인 조르바

고래의노래 2022. 1. 4. 16:07


0302 1장
오! 처음부터 확 빠져든다. 몸 쓰며.살겠디고 결심하고 짐챙기며 아지 마무리못한 원고 챙기는 장면에서 나랑 너무 비슷하게 느껴져 웃음이 나옴.
조르바가 갑툭튀 등장해서 놀랐다. 근데 그 캐릭터면 그렇게 등장시킬 수밖에 없는듯.
요즘 시대에 보기엔 여성비하 문장들이 가득하다 들어서 읽기 전부터 좀 긴장했는데, 일단 그 문장들을 잘 걸르며 읽어보고픈 흥미가 강렬히 일어남!
게다가 저 마지막 조르바의 말에서 파우스트도 떠오르고! 기대기대~

0303 2장
놀이터에서 그네의자타며 읽었더니 그들의 뱃멀미가 고스란히 느껴지는듯.유명한 여신문명지인 크레타에서 조르바는 여성들에게 군침만 흘리는구나. 내일 뱃멀미가 잦아들면 다른 얘기가 나오리라 기대하며..

0305 4장까지.
주인공의 고민이 너무 나랑 비슷해서 완전 빠져들어 읽게된다.
공산주의적 행동주의와 불교적 체념의 조화시키려는 노력 속에서 주인공이 인부들 하나하나를 알아가려 질문하고 이상향을 이야기하는데 조르바는 이를 답답하게 바라본다. 그리고 오직 자신은 자신만 믿는다고!
으악! 너무 나한테 하는 말같아!

주인공이 친구랑 미술관에서 보고 사내다운 행동에 마음이 동하는 램브란트의 전사.그림.


여성에게 자기도 모르게 말을 걸게되었던 로댕의 하느님의 손


두 그림이 각각 주인공과 조르바를 나타내는 듯.
앞으로 주인공은 조르바에 의해 어떻게 변할까! 흥미진진


0308 5장까지
팩폭의 연속

0309 6장
미치겠다! ㅋㅋㅋ

0310 7장
조르바의 성별구분에 대해 화가 나는게 아니라 웃음이 난다. 비웃음아니고 진짜 꺄악! ㅋㅋ 요런 웃음.
조르바의 여자에 대한 철저한 대상화는 아이러니하게도 철저한 존중을 바탕으로 하고있는 것 같다!

0311 8장
각자 가지 키만큼의 행복.
그래서 다르지만 같은 방향의 이야기.
주인공 말처럼 주인공은 자기 행복을 계속 재보는 상태인 것 같다.

0312 9장
순간에 사는 조르바.
저 일을 즐기거나 탄광 일이 내 천직!이라고 여기지 않아도 저리 될 수 있다는 게 넘 신비롭다. 물아일체..
유퀴즈 이직 특집에서 나온 이야기들과는 어떻게 연결할 수 있을까?

난 성경도 지금 읽고 있는데, 두 내용이 엄청 대비되는데..묘하게 이어지는 느낌.
본능과 연결된 조르바의 직관과...하느님과 연결된 예언자들이 과연 다른걸까..요런 생각 들고...사람이 자신의 행복의 키를 잘 찾아 그만큼 만족하며 살아가는 것과, 내 안의 그리스도를 깨닫고 사는 것...요건 다른가? 이런 질문도 떠오르고...암튼 흥미진진임. 조르바아아아아

0315 10장
이제 나도 기다리게 되었다!
과부랑 주인공 언제 자나요!!

"이리오너라, 이 거지같은 자슥아!"
호탕한 쿨내진동 하느님~

0316 11장
마흔은 미친 지랄의 클라이막스라니. ㅋ 청년 때보다 '진짜 청년'처럼 느껴졌다라...
갑자기 이건 홀로일 때야 가능하다는 생각이 들었다.

0317 12장
주인공은 '나 자신을 버린 최후의 인간'이 어설프게 나를 사로잡고 있음을 깨닫고 '최후의 인간'을 몰아내려 한다.
두통의 편지가 온다.
아프리카에서 자신의 키를 넘으려다, 다시 퇴행해 허무주의적 감각의 삶을 사는 그리스를 증오하는 친구에게서.
그리고 그리스를 사랑하여 죽음을 각오하고 행동하는 친구에게서.

이들이 각각 발도르프에서 얘기하는 인간영혼의 세가지 활동, 느낌(아프리카친구) , 사고(주인공), 의지(행동파친구)를 상징하는 것처럼 보였다.

그럼 조르바는? 전인..?

0317 13장
조르바는 인생의 허무함을 이겨냈지만 늙어감을 두려워한다.
결국 조르바나 주인공이나 주인공의 친구들이나 모두 각자의 방식으로 삶의 본질에 닿기위해 애쓰고 있다.
'자유를 원하는 자만이 인간이다. 여자는 자유를 원하지 않는다. 여자는 인간인가?'라는 조르바의 질문에서, '받아들임'의 자유를 모르는 반쪽 자유인이 보인다.

0318 14장
혼란스러워지네.
이성을 갖춘 인간이라는 것이 슬픈 이유는 뭘까? 동물이 아니라 인간인 것은 '제 아무리 늘어진 팔자라도 힘든 법'. 본능, 자연과 닿아있다는 것만이 축복인걸까?

0322 15장까지
어딘가에 빠지지 않는 해방의 상태.
그게 과연 인간의 상태일까?

0323 16장까지.
조르바와 주인공의 재회.
주인공은 조르바에 경외심을 가지면서도 그가 가진 경험이 세상전체에 비해 얼마나 작은 것인지 팩폭을 날리고, 조르바는 왜 내 마음에 독을 푸냐며 흔드리는 모습을 보인다. 그리고 둘은 이제 서로가 서로의 성장에 필요한 존재임을 인식한다.
지적 공동체를 꿈꾸던 주인공의 소망을 간파하고 그 앞의 문지기로 자길 써달라는 조르바의 이야기가 이를 나타내는듯.

0324 17장까지.
마음에 남은 문장들.
'이 놈의 세상이 좀 작아지든지 내가 좀 커지던지 해야지. 안 그러면, 난 끝장이에요!'
'나는 내 열정에 휘둘리지도 않습니다..이게 사람이 자유를 얻는 도리올시다.'

조르바가 생각하는 자유의 의미가 드러난다. 놀랍게도.그것은 주인공이 닿고자하는 지점과 같은데, 방법은 판이하다. 토할 때까지 밀어넣는 것! 그래서 집착에서 해방되는 것. 주인공이 글을 토해내며 내면의 붓다를 몰아내려 하는 것과 완전 같음.
그렇다면 조르바와 주인공의 삶의 방식 중 어떤 것이 '진짜 삶'에 가까운지 이야기할 수 없겠다. 양쪽 모두 집착에서 벗어나고자 하는, 자유롭고자 하는 몸부림.

0326 18장
수도원이라는 절제의 공간에서 집약된 욕망들이 폭발한다. 그것은 육체적이기도 하고 정신적이기도 하다. 육체적 욕망은 육신을 죽이고, 정신적 욕망은 자신의 정신적 결실을 낯선 손님에게 토로하게 한다. 살인사건 전개는 마치 '장미의 이름'읽는 것 같았다.

0326 19장
결혼이라는 욕망을 '구원하는' 제우스 조르바의 이야기.
자신을 언제나 정당하게 여기며 자기편이 되는 그의 자기애가 대단하게 느껴진다.

0329 20장까지
나라에 대한 구분이 사라지고 좋고나쁨만 있으며 종국에는 이 또한 없어지고 연민만 남을꺼라는 조르바의 말에 갑자기 맥이 풀렸다.
그 얘기에 너무 공감하지만..너무 많은 것이 설명되자 조르바가 생기있게 느껴지지 않았다. 문학 속에서 저자에 의해 탄생된 캐릭더라는 작위성이 크게 느껴져서 이 책을 읽은 이후 처음 시들해지네.
그나마 조르바가 내 안의 예전 조르바같던 한 마디.
"당신 붙잡고 얘기한 내가 병신이지."

0331 21~22장
충격의 도가니탕...
이게 그 시대의 평범한 동네가 맞다고? 설마..
조르바의 분노와 슬픔이 어떤 종류의 것인지 감도 안온다. 머리 전에 몸이 나가고, 그걸 설명한다고 하는 말이 저건데..
나의 분노는 기준이 무얼까? 뭐가 내 감정의 버튼일까..

0401 23장
하이에나들...

0402 24장까지
인간이 어디에서 와서 어디로 가는지 묻는 조르바에게 주인공은 자신이 느낀 건 인간이 도달할 수 있는 최고 정점은 '신성한 경외감'이고 그 순간 시작되는게 바로 '시'라고 이야기한다.
그러면서 필연에 순응하는 것만이 '슬프게도' 해방의 길인데, 비인간적인 자연법칙을 거스르는 반항은 어디로 가게되는건지 자문한다.

'동화의 지혜'읽기 모임에 참여하고 있는데 조금씩 천천히 읽는 것의 힘을 느낀다. 시작부터 '이 책이 이런 책이었어?' 하며 놀랐다. 더 놀라운 건 이 책이 조르바랑 연결된다는 것.

영혼이 자기근원을 기억해내 드높은 소임을 깨닫는 것, 영원한 자아를 아는 것. 이러한 자각은 인간 대 인간으로 전해질 수 없는 신비로움이라고 동화의 지혜 저자는 이야기한다. 지성적 교육으로 가능한 것이 아니라 태고적 신비에 가 닿아야 한다는 것이다.
그리고 동화에 대한 전혀 다른 접근을 이야기한다. '내적 출발점', '정신의 발원지'에 가닿는 것! '의미의 정복'이 아닌 '영민한 순종'!

태고적(본능적?) 예감에서 논리적 이성, 그리고 정신적 직관으로...가는 여정에서 주인공이 이성적 현 인류를 상징한다면 조르바는 정신적 직관일까?

0405 25장까지
모든 것을 잃고 오히려 해방감을 맛보는 주인공. 조르바에게서 받은 영향으로 필연의 미로에서 자유로 나아가고 '우주의 진리를 직접 느낄 수 있었던 지상 최초의 인간이.가졌던 영혼'으로
깨어나기 시작한다.
그러나 실제로 그 영혼이 작동하자 '거대한 확신'에 불안해하며 영혼의 날개를 자르고 이전의 평정으로 돌아가버린다.
벗어나고자 하는 것이 불행이고 감옥일지라도 익숙한 것만큼 우리를 끌어당기는 것은 없나보다. 참 무서운 일이다. 불행에 안주하고자 하는 것..

0406 26장
[동화의 지혜] 읽다가 너무너무너무 조르바랑 연결되어서..지금 이 강렬함을 적는게 좋겠다 싶음.

오늘 읽은 [동화의 지혜]는 육신, 지적 인식, 정신의 관계에 대한 이야기였다. 인간은 정신이면서 육신이고 이 둘을 잘 돌보아야 하는데 육적인 땅의 힘은 '리듬과 예술적 감각활동'을 통해 정신의 차원으로 올라간다. 이렇게 상승하지 않으면 그 힘에 의해 해를 입을 거라고 [동화의 지혜]는 이야기한다. 발도르프 교육에서 예술, 리듬을 강조하는 것이 이런 의미인걸까?

말보다 춤과 음악으로 자신을 표현하는 조르바가 떠올랐다. 본능적이고 쾌락추구형이면서도 그가 지적인식의 총아인 주인공보다 정신적이며 영적으로 느껴지는 이유는 조르바가 '중력'(육적인 힘)을 예술활동으로 정신의 차원으로 올려서인 듯! 그래서 조르바는 유언으로 주인공에게 자신의 산투르(악기)를 남겼나보다.

'정신'과 '영혼'이라는 단어가 [조르바]에도 계속 나온다.
"우리는 이제 우리의 영혼을 신뢰하지 않는다. 영원산 구멍가게 주인인 이성이 영혼을 비웃고 있다."
"우리들이라면 고통스럽게 몇년을 걸려 도달할 정신의 경지에 그는 단숨에 가 닿았다."
아..사실 이제 좀 그만 듣고 싶기도한데...멀미나면서도 계속 파고있다. 그만큼 중요하다고 느껴서 그렇겠지만..

[동화의 지혜]에서 예술이 주는 영혼의 선율이 없다면 중력에 제압당하리라는 이야기가 강렬하게 마음에 남는다. 이제 정말 책 좀 그만 읽고 악기 연주나 그림, 춤에 좀 집중해볼까. 노래방가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