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상처없는 영혼> - 갈망 속에 머금은 위로 한 모금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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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처없는 영혼> - 갈망 속에 머금은 위로 한 모금

고래의노래 2010. 7. 19. 13:28
상처 없는 영혼 - 8점
공지영 지음/오픈하우스


  '어른'이 드문 세상이다. '제대로 나이먹은 어른'말이다. 쇠약해진 몸과 축져진 피부에 슬퍼하며 '세월'을 한탄하다가도, 젊은이들 앞에서는 '세월'의 길이를 들먹이며 턱을 치켜들고 권위를 내세우는 참 딱한 어른들이 판을 친다.
  형제가 없는 나는 '인생의 멘토'를 끊임없이 갈망했다. 스스로를 정의하지 못한 채 휘청이던 20대에는 말할 것도 없고 아이낳고 엄마가 된 30대의 지금도 마찬가지다. 현명하게 나이든 그 누군가가 지나간 길을 회상하며 "아~ 나도 그 때 그랬었지. 그런데 지나가보니..."로 시작하는 조언을 해주길 얼마나 바랬는지. 결국 내가 살아가야 할 내 인생이기에 뒤돌아서면 쓸쓸하고 외로운 것은 매한가지겠지만, 그러한 말 한마디로 "이 정도면 괜찮아. 잘 하고 있어."라는 푸근한 위로를 받고 싶었다.

  이 산문집은 두 아이를 낳고 (아마도 두 번의 이혼도 지난 후에) 삶의 역동기를 통과하며 30대 초반의 공지영 작가가 들려주는 성장기이다. 30대의 나이에 '성장기'라는 말이 주는 큰 파동이 어울리지는 않지만, '고통을 지나 깨닫는다'라는 의미에서 '성장'이라는 말보다 더 적절한 단어는 없을 것 같다.
  책은 괴로움에서 회복되기 위해 여행을 떠난 그녀가 새로운 곳에서 떠올리는 단상들을 나열하다가 대한민국에서 여자로 사는 것의 고단함과 풀어야할 과제들을 이야기하고 마지막으로 소설가의 입장에서 후배들에게 조언을 한다. 처음에는 원인을 알 수 없는 (미루어 짐작은 하지만 독자에게 설명해주지는 않은) 그녀의 고통을 지켜본다는 것이 피곤하게 느껴졌다. 짐작만으로 그녀의 고통을 함께할 수 없기에 '슬프다. 괴롭다.' 반복하는 그녀를 위로하지도 못하고 옆에서 멀뚱멀뚱 지켜보는 느낌이었다. 하지만 중반을 넘어 여자들의 삶에 관한 이야기가 시작되자 몰입할 수 있었다.
  14년 전에 쓰여진 글임에도 마치 어제 쓴 것처럼 현실을 반영하고 있는 글이 있는가 하면 나의 상황과는 조금 동떨어져 그나마 한국이 조금 '진화'했음을 느낄 수 있는 대목도 있었다. 출산율이 곤두박질쳐도 아기는 10년 전과 같이 엄마들의 문제일뿐이다.(출산율은 시스템적으로 해결할 수 없다고 생각한다. 이것은 문화의 문제이다. '가정'보다 '회사'를 중요시하는 문화. 이 문화가 바뀌지 않는 한 출산율은 영원히 올라가지 않을 것이다.) 하지만 남편들 친목 모임에 함께 나가 안면없던 부인들끼리 어색한 웃음을 교환하는 일은 아직 나는 물론 내 주변 친구들에게도 일어나고 있지 않으며, 오히려 우리는 우리가 주축이 된 여행에 남편들을 끌고 다니고 있다.

  책의 서문에 그녀는 '이 이야기가 누군가에게 위로가 되어준다면 바랄 것이 없겠다.'라고 이야기했다. 멘토가 사라진 이 세상에 그녀는 책을 통해 여러 사람들에게 멘토 갈증을 풀어주고 있다. 사회적으로 개인적으로 항상 치열하고 다사다난했던 그녀이기에 그녀의 이야기에 더 깊은 신뢰가 가는 것도 사실이다. (이 점은 그녀 개인도, 또 이를 마케팅적으로 활용하는 출판사도 모두 잘 알고 있는 것 같다. 그녀는 유난히 에세이를 많이 발표하고 그 모두를 베스트셀러에 올려 놓는다. 돈벌려고 이 책 저 책 쓴다는 식으로 비난하는 게 아니다. 작가들은 자신의 이야기를 더욱 많은 사람이 읽어주기를 바라는 것이 당연하며, 자신에게 맞는 형식을 발견했다면 그것을 활용하는 것이 당연하다. 게다가 이 시대에 우리는 그녀같은 작가가 필요하다.) 하지만 사실 나는 두 명의 아이 엄마가 된 30대 초반의 그녀가 들려주는 이야기에서 더 절절한 무언가를 갈구했었다. 아이를 낳고 섬에 갇혀 버린듯한 이 기분을 그녀가 알아주길 바랬다. 하지만 '나를 무너뜨릴 것을 요구하는' 엄마의 입장과 '나는 누구인가 끝없이 고뇌하는' 나 사이의 갈등에 대해서는 별로 이야기하지 않는다. 이 책 속의 이야기는 너무 은밀하거나 또는 너무 객관적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나는 위로받았다고 느꼈다. 그녀의 생각에 공감할 수 있었기에 20대의 나와 30대의 나는 '다행히도' 다르구나! 라고 깨달았던 것이다. 그러다보면 섬 안에 갇힌 것처럼 보여도 이 섬 안에서 나는 나름대로 단단해지고 있으며 어느 순간 돌아보면 이건 섬이 아니라 안개 속에 싸인 산봉우리일 수도 있기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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산다는 것은, 그것도 잘 산다는 것은, 전적인 사로잡힘과 전적인 무시가 아닌, 그 사이의 적당한, 차마 말로는 이렇게밖에 표현할 수 없는 아슬아슬한 선택의 연속이라는 것을 나는 이제야 어렴풋이 깨닫기 시작했다는 말이다.

그저 지켜본다는 것은 그렇게 쉬운 일이 아니며 지켜보는 일처럼 일처리를 바르게 해주는 일이 없기 때문에....

그를 행복하게 해주기 위해 재잘거렸던 영특한 지혜를 이제는 너 자신을 위해 쓰렴. 네가 귀중해지면 누구든 네게로 돌아온다. 그가 아니라면 더 귀중한 무엇이 돌아온단다.

깊은 밤 중에 산 속에서 무서운 것을 얼핏 보았을 때 그것이 무섭다고 고개를 돌리는 자에게 무서움을 영원한 것이지만 그것을 똑똑히 들여다보면 사실 그것은 나뭇가지이거나 바위이거나 하단다. 두려워하지 마라. 삶은 너를 안전하게 해줄 거야. 다만 거기에는 조건이 있단다. 자기 자신을 위해 있는 사람에게만, 이라는 단서가 붙는단다.

아이를 키우는 것은 어머니의 가장 신성한 임무라고 말하면서도 그 신성한 임무를 어느 정도 마친 어머니들에게 아무런 기회를 주지 않는 사회, 신성한 국방의 의무를 마친 남자들에게는 취업의 기회는 물론 호봉까지 올려주면서도, 탁아소에 게으른 모든 기업체들과 관공서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