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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노래의 사는 이야기/하루歌

깨달음의 순간!

고래의노래 2010. 4. 4. 23:03
깨달음(!)은 순간적으로 찾아왔다.
그건 마치 양파를 춘장에 찍어먹는 '맛'을 알아버렸을 때와 같았다. 먹어보고 싫어한 것도 아니고, 미리 머리 속에서 저 멀리 치워 버렸던 그 맛. 한 입 두 입 먹어보다 익숙해진 게 아니라 번개와도 같이 깨달아버린 것이다. 아! 이런 맛도 맛있구나!
 
별로 특별할 것도 없는 오후였고, 나는 건조대에서 양말을 한무더기 가져와 개고 있었다. 그 날따라 참 예쁘게 잘 개어지는 양말들. 차곡차곡 예쁘게 갠 양말로 높은 탑을 만들어 쳐다보니, 정말 "보기 좋았다." 그런데 이렇게 잘 개어진 양말을 서랍장에 넣으려 서랍을 여니, 여기저기 흐트러진 속옷과 양말들이 "보기에 안 좋았다."
 
'예쁘게 정돈해서 넣어 놓으면 기분이 좋겠다.'는 생각에 마트에서 서랍 정리용 수납함을 사서 깔끔하게 정리해 보았다. 찬장 여기저기 흩어져 있던 현수와 나의 약들도 수납함에 깨끗이 담아두고, 내친 김에 주말에 날을 잡아 냉장고를 청소하고 칸 별로 카테고리를 나눈 후 필요한 곳에 라벨링을 했다. 베란다의 수납함들도 정리해서 양을 줄이고, 무조건 상자에 담아두는 게 아니라 찾기 쉽게 담아두려고 노력했다.
 
그렇게도 비좁았던 찬장이었는데, 정리를 하고 나니 공간이 남았다. -_-;; 주방도 윤우 식탁 의자를 한쪽으로 치우니 훨씬 넓어졌다. 이제 작아져버린 아기 옷들을 정리하고, 우리 옷들을 계절별로 잘 개어 두었더니 서랍장도 남는다. 오매야.
 
정리를 해야 공간을 효율적으로 쓸 수 있을 뿐더러 풍수적으로 좋다는 건 뻔히 알고 있었다. 정리에 관한 책도 몇 권 읽었었고, 심지어 정리의 달인 블로거가 썼다는 정리 실용서는 구매까지 했었다. 하지만 그 때는 남을 따라하느라 헉헉대는 기분이었고 그래서 진전이 없었는데 이번에는 단 몇 주만에 집 안을 화라락~ 바꿔버린 것이다. 유진이가 예전에 내 자취집에 왔을 때 화장실 문을 왜 닦아 줬는지 알 것 같기도 하고...-ㅂ-;;
 
"이것이야말로 깨달음이다!" 라는 생각이 들었다. 순식간에 가던 길을 멈추고 돌아가버린 거다. 가던 속도를 늦추거나 멈칫거릴 기색도 없이 번개처럼.
 
자아나 세계에 대한 것도 아니고, '정리를 하면 기분이 좋다'라는 본래 누구나 알아왔던 소소한 '사실'을 알아버렸다는 걸 깨달음이라고까지 부르는 게 조금은 민망하지만, 그런 명백한 사실을 이제서야 행동으로 옮길 수 있었다는 변화는 나에게 그야말로 폭풍같은 것이었다. 30년의 세월이 뒤집어지는 순간이었으니 말이다. (청소는 안하고 서랍 안에 옷을 아무렇게나 쑤셔두는 것은 물론이고, 한 번 열었던 서랍을 다시 닫지 않은 채 살기도 한 사람이었다. 아..진상..ㅜ.ㅠ)
 
그리고 이건 또 하나의 의미를 가지고 있기도 하다.
작년부터 좋은 엄마가 되겠다는 생각에 나의 과거경험들을 들춰보며 치유하는 노력을 하고 있었다. 어린 시절의 경험을 윤우에게 되물림하기 싫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관련 책을 여러권 읽고 있었는데, 행동하지 않는 게으름이 과거 어린 시절에 대한 보상행동일 수도 있다는 이야기가 나왔다.
어쩌면 이 깨달음은 내 치유의 과정일 수도 있다.
 
한편 이런 생각이 들기도 했다.
어느 일이든 여러 해동안 하면 그 일에 익숙해지고 그러다 보면 본인만이 알 수 있는 즐거움을 알아가게 되는게 아닐까. 회사 일을 그만두고 전업주부가 된지 만 2년이 되어간다. 외부 평가로 스스로를 평가하는 성향이 강한 내가 과연 주부로서 즐겁게 살 수 있을런지 고민이 많았다. 그래서 윤우를 키우면서도 꼭 나만의 시간을 챙기려고 했고, 책도 더 읽고 블로그도 더 열심히 써 두려 했다. 언젠가는 다시 일을 하고 싶고, 그러기 위해서 '공백기'인 주부시절을 의미있게 만들고 싶었던 것이다. 그러기 위해서 주부로서가 아니라 다른 모습으로서의 내 시간이 절실했었다.
그런데 이렇게 정리의 즐거움을 알게되니 주부로서의 삶에서 내가 배울 점이 있다는 생각이 든다. 전업주부로의 생활이 3년이 되든 5년이 되든 그게 아무 것도 하지 않은 '공백기'가 아니라 새로운 것을 계속 깨닫고 느끼고 발견하는 시간일 수 있는 것이다.
 
말이 거창했지만, 사실 언제 다시 이 '정리 깨달음'이 산산히 흩어지고 '30년 그 자리'로 돌아가게 될지 모를 일이다.
하지만 다시 서랍 속에 옷을 아무렇게나 꾸겨 넣게 되더라도 그 때의 나는 예전과 다를 것이다. 그건 이미 또 다른 배움의 한 페이지일테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