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우리 '집'은 어디인가. 본문
2주 전에 이사 문제를 두고 치열한 고민을 했다. 남을 것이냐 떠날 것이냐...
결혼을 해서 분당의 이 집에 둥지를 튼 것이 이제 4년이 되어 간다. 2년 전에는 스리슬쩍 재계약 기간이 지나가면서 자동연장이 되었지만, 다시 2년이 지난 지금 펄쩍 뛰어오른 전세값을 보고 집주인이 무심하게 지나칠 리 없었다. 5,000만원 인상을 요구했고 우리는 이사를 결심했다. 남편의 직장 주변을 크게 벗어나지 않으면서 지금 보다 조금 더 넓은 곳을 바란다면 선택은 한 곳 밖에 없었다. 죽전이다.
이사를 염두해 두고 죽전 지역을 몇 번 다녀온 적이 있다. 신랑이 괜찮은 아파트라며 찍어둔 곳은 뒤 쪽으로는 탄천의 지류가 흐르고 앞으로는 작은 동산이 있었다. 서울로 가는 광역버스 정류장도 있었고, 탄천 지류를 사이에 두고는 번화가가 있어서 더 없이 편리해 보였다.
그 중 가장 내 마음을 사로잡았던 것은 탄천 지류를 끼고 나 있는 산책로를 따라 걸어갈 수 있는 죽전 도서관이었다. 새로 지은 도서관에는 정말 정말 넓은 어린이 도서관이 있었다. 유아 전용 마루 열람실도 정말 커다랬고 햇살이 잘 비쳤다. 게다가 탄천 지류 산책길을 따라 걸어보니 물장구를 치고 노는 아이들이 있었다. '물에 돌 퐁당' 좋아하는 윤우가 이 기회를 놓칠 리가 없었다. 윤우는 우리와 한참동안 물놀이를 했다. 놀던 아이들에게 물어보니 대부분 이렇게 물이 맑다고 한다. 자연과 책과 도시 인프라까지 모두 갖추고도 분당 보다 훨씬 싼 이 곳에 마음을 잔뜩 빼앗끼고 우리는 부동산에 전세가 나오면 바로 연락을 달라고 부탁을 해 놓았다.
그리고 2주전에 부동산에서 연락이 온 것이다. 하지만 융자가 낀 전세였고, 등기부 등본을 떼어보니 히스토리도 깨끗하지가 못했다. 부동산에서는 융자 없는 전세 아파트들도 보여주었지만 죽전 중에서도 그 아파트에 마음을 빼앗겼던 우리는 못내 아쉬운 마음에 결정을 미루고 집으로 돌아오고야 말았다.
집에 오니 집주인에게서 연락이 왔다. 우리가 이사를 가겠다고 하니 전세값을 1,000만원 빼주겠으니 남지 않겠냐고 한다. 신랑은 남는 것이 좋겠다고 했다. 전세 물량도 별로 없는데 우리가 원하는 아파트 전세가 다시 나올 때까지 마냥 기다릴 수도 없고 혹시나 해서 기다렸다가 마음에도 들지 않는 아파트를 단지 이사 날짜 때문에 급하게 결정하고 말 수도 있다는 것이었다.
그리고 '동네' 이야기를 했다. 우리가 바랬던 그 아파트 단지가 주변 여건은 참 좋으나 너무 작은 단지여서 '동네' 개념으로는 미약하다는 것이었다. 자신의 어린 시절을 떠올려 봤을 때, 어렸을 때는 '내 동네'라는 개념이 참 중요한데 그 아파트 단지에서는 이런 것이 가능할지 의문이라고 했다.
티셔츠 한 벌 사려고 해도 천만번은 생각하는 내가 '억!!"이 왔다갔다 하는 '집'문제에 쉽게 결정을 내릴 리가 없었다. 정말 짜증이 날 만큼 고민스러웠다. 그러다가 죽전에 아기 데리고 한 번 다녀온 뒤 결정하기로 마음을 먹었다. 결국 우리에게 중요한 것이 '집' 자체 보다는 '집'주변이니 아이와 함께 동네를 거닐어 보면 파악할 수 있지 않을까 싶었다.
죽전역에서 내려서 탄천을 건너 죽전 아파트 단지로 걸어갔다. 서현역에서 죽전역까지는 10~15분 정도 밖에 걸리지 않았다. 죽전에 살지만 분당으로 나갈 일이 많을 듯 했는데 이 부분은 별 문제가 없을 것 같았다. 죽전역에 연결된 이마트와 아파트 단지까지도 걸어서 15분 정도 거리였다. 유모차 이동도 가능했다. 아이를 데리고 장보는 것도 수월할 것 같다. 교통과 생활 편의시설 면에서는 생각보다 훨씬 훌륭했다.
부동산이 보여준 아파트 중 우리가 2차 후보로 점찍은 곳에 가서 놀이터에서 한참 놀았다. 이 곳도 탄천 지류가 아파트를 감싸고 있는데, 악취가 심했다. 여름이면 아마 더 심해질 것 같다. 우리가 마음에 들어하면 아파트 변 지류는 안 그랬는데, 상류와 하류의 차이인 걸까. 너무 심한 수질 차이가 놀라울 지경이었다.
아파트 단지 뒤쪽으로 몇 블럭 걸어가면 유명한 죽전 카페거리가 있다 하기에 걸어갔다가 다시 죽전 도서관 쪽으로 꺾었다. 여전히 나에게는 도서관과의 인접성이 매우 중요했으므로.
그런데 걷는 내내 답답했다. 이 곳은 우리가 살 곳이 아니라는 생각이 살며시 올라오기 시작했다.
죽전 도서관으로 가다가 길가에 보이는 놀이터 쪽으로 윤우가 방향을 트는 바람에 놀이터에 앉아 아이가 노는 모습을 바라보다가 '아~ 이 아파트 괜찮은 것 같은데 어디지?' 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퍼뜩 이 거북함이 무언지 알게 되었다.
푸르지오, 래미안 같은 브랜드 아파트가 많은 이 곳에서 단지 하나 하나는 그들만의 성곽이었다. 아파트 단지 입구에는 커다란 대형 게이트가 있어 비등록 차량 진입을 막고 있었고, 심지어 외부인의 출입을 금한다는 팻말을 아주 크게 써놓았다. 아파트 단지 안에 정원과 연못과 도서관까지 마련해 놓고 그 안락함이 관리비로 충당이 되고 있을 터이니 외부인이 그걸 공짜로 즐기는 게 마음에 들 리가 없다. 걷는 내내 답답했던 이유도 아파트 담벼락 때문이었다.
십년이 넘은 아파트 단지들 또한 의도하지는 않았지만 차도로 자잘하게 막혀서 탁 트인 느낌이 없었다. 그래서 단지도 작았던 거였다.
남편이 말했던 '동네'의 개념이 어떤건지 이제 알 것 같았다.
아이가 길가에서 홀리듯 들어간 그 놀이터는 죽전에서 그 중 오래된 대규모 아파트의 '탁 트인' 놀이터였다. 누구에게라도 개방된 놀이터였던 거다. 이 곳에서 나는 자연스럽게 '이 아파트는 살 만 하겠는데?'라고 느꼈다.
물론 "외부인 출입금지"라는 팻말을 무섭게 써 놓았어도 아이들은 비무장 지대를 자유롭게 오가는 새들처럼 재잘대며 이 곳 저 곳 재미있는 아파트를 탐험해 댈 것이다. 그래도 그 '철망'이 없다면 날아가는 새를 보는 우리 마음이 이렇게 싸하진 않겠지.
다시 분당의 집으로 돌아왔다. 오래된 아파트 단지에 키 큰 나무들이 바람을 맞아 출렁인다. 이 곳에서는 길 가다 보면 다른 단지가 나오고 또 길을 가다 보면 다른 아파트 단지가 나온다. 그 곳에서 나온 아이들이 모두 모이는 광장같은 놀이터도 있다.
나는 머물기로 했다. 거부와 거절보다 수용과 포용을 윤우가 먼저 배우길 바라면서.
싸이월드 다이어리를 뒤적거리다가 1년 반 전에 쓴 아래 일기를 발견했다.
그래, 나를 붙잡는 이유가 이렇게나 많았다.
이번에 나는 내가 모험을 즐기는 자유분방한 성격이 아님을 확인하게 되었다. 분명 모험을 즐기는 부분도 있지만, 생활 영역에서는 아니다. 나는 익숙함을 사랑하는 사람이었다. 항상 모험을 동경하는 나는 어느 새 나도 그런 사람이라고 생각하고 나를 억지로 맞지 않는 틀에 가두어 놓았던 것 같다. 인정하고 나니 편안했다.
윤우의 탄생을, 첫 걸음마를, 첫 단어를 기억하고 있고, 아침에도 눈 떠서 함께 라는 사실에 신기해하던 풋풋한 신혼부부를 말없이 바라보았던 '익숙한 친구같은' 이 집을, 난 떠나기 싫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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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아파트에 와서 산지 2년 반이 넘었다. 신혼부부에게 딱이라다고 생각했던 아파트에 아기가 불쑥 찾아오면서 상당히 비좁게 느껴지기 시작했다. 조그만 아기는 어마어마한 짐덩이를 몰고 왔고, 아기에게는 어른과 달리 '놀 공간'이 필요했다. 결국 소파까지 팔아가며 애쓰고 있지만, 뛰어다니기 시작한 윤우에게 이 집은 아직도 너무 좁다.
하지만 아는 만큼 사랑하게 된다더니, 익숙해진만큼 좋은 점들이 이제 많이 보인다.
전용면적이 너무 좁아진다며 내가 그리도 미워했던 아파트의 복도도 이제 꽤 유용하다. 아기가 콧바람을 쐬고 싶어하지만 외출하기는 부담스러울 때 현관문만 열면 바깥이라는 점이 좋다. 도둑걱정이 덜하다는 점도 마음에 든다. 특히나 우리 동 복도는 아파트 관리 사무소를 정면으로 향하고 있는데, 관리 사무소 주변으로 매주 장이 설 만큼의 작은 광장이 있어서 시야가 무척 트여 있어 시원한 느낌이다. 아파트 단지치고는 꽤 많은 나무를 심어놓아서 계절도 뚜렷하게 느낄 수 있다.
번화가 주변이라 걸어갈 만큼의 거리 안에 거의 모든 시설이 다 있고 서울로 가는 주요 버스의 정류장이 아파트 단지 바로 앞이라는 점은 객관적으로도 장점이고 집값을 올린 주범이기도 하다.
하지만 이것때문에 하나의 단점이 생기는데, 바로 먼지와 매연.
사실 환경과 건강에 민감한 요즈음이기에 이건 상당한 단점이다. 이 점 때문에 사실 이사를 생각하고 있기도 하다.
내가 가장 많은 점수를 주는 이 아파트의 장점은 바로 벌레가 없다는 것! 바퀴벌레는 물론 개미, 그리고 모기도 없다!!!! 모기가 없는 건 정말정말 굿굿굿~~~~ 난 정말 모기소리에 너무 취약하다. 모기가 많은 곳에서는 정말 살 수 없다. ㅠ.ㅜ 근데 왜 없는 걸까? 혹시 매연때문? 모기들도 살지못할 만큼 공기가 최악인건지...
그리고 오늘 새삼스럽게 다시 발견한 이 아파트의 장점. 돌마공원.
아파트 뒤편으로 작은 공원이 있는데, 사실 난 너무 작아서 공원이라기 보다는 도로변 소음차단용으로 아파트에서 만든 작은 나무숲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지도를 보니 어엿한 이름을 가진 공원이었던 게다.
윤우를 임신했을 때, 현수랑 둘이 아침에 산책을 나가기도 했던 그 곳. 이제 윤우가 저렇게 뛰어다니는데, 차도가 아니라서 멀찌감치 떨어져서 아기를 관찰할 수 있는 여유도 생긴다. 윤우가 아직 자연보다는 자동차에 더 매력을 느끼는지라 ^^;; 자꾸 공원을 벗어나 오매불망 도로를 바라보고 있기도 하지만, 자연 속에서 아기는 한결 편안해 보인다.
오늘 윤우는 지천에 핀 민들레를 꺾어 먹으려 하기도 하고, 솔방울을 주워서 날 주기도 하고, 나뭇등걸에 앉아보기도 했다. 후우~하고 불은 민들레 씨앗들이 아기 얼굴 위로 두둥실 떠갈 때는 눈으로, 마음으로 또 사진을 찍었다.
우리와 윤우의 시작부터 지금까지를 이 아파트가 모두 함께 해왔다는 것.
이제 영원히 '그 시절 추억의 장소'로 남아버리게 되었다는 것.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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