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2017년 6월 月記 본문
한 해의 반이 지났다.
한 해를 시작하며 다짐했던 여러가지 것들은 여전히 자리를 못잡은 채 둥둥 떠다니고 있다.
나에게는 생각보다 몸의 움직임이 필요하다는 것을 알고 있기에 그것을 실천해보기 위해
매일매일 손으로 하는 그림과 수공예 작업들을 계획했건만 나는 또 하염없이 책을 읽고 생각에 빠졌다.
# 베이고 꼬매다
부엌에서 자잘하게 손을 베이는 일들이 반복되던 와중에 결국 한 번 크게 베이고 꼬매기까지 했다.
아버님 생신모임을 우리집에서 하고 설거지를 하던 중 유리컵을 닦다가 오른손 검지 손가락 밑쪽의 살점이 꽤 많이 떨어져 나갔다. 수건으로 손을 싸쥐고 주말에 하는 병원을 찾아 4바늘을 꼬맸다.
생신상 차리는 게 엄청 힘들었던 것도 아니고, 다들 맛있다고 이야기해주시고 맛있게 드셔주셔서 뿌듯하고 기뻤는데 마치 혼자 이 모든 일을 감당했던 것이 엄청 억울했던 양 설거지 중에 저런 일이 일어나서 민망하기 그지 없었다.
현숙이는 "왜 며느리들은 시댁 일을 하다가들 다치는걸까?"라며 본인도 시아버지 생신상 차리던 날 손가락을 베여서 꼬맨 적이 있단다. ㅎㅎㅎ 희순언니도 내가 다친 이야기를 듣더니 자기도 시댁에서 명절에 상차리다 손 베여서 꼬맸다며...ㅋㅋㅋ
이런 이야기들을 연거푸 들으니 정말 난 나쁜 감정이라고는 하나 없었는데, 혹시 무의식 중에 뭔가 억울한 점이 있었나? 괜히 돌아보게 되었다.
어쨋든 2주일의 불편함을 잘 견디고 이제 실밥도 풀고 칼질할 때 매우 조심하게 되었다.
# 견진성사
견진성사를 받았다. 이제 내가 누군가의 대모가 될 자격이 있다니 아이쿠 이래도 되나 싶다.
견진성사 전에 남편이 계속 견진성사에 대해 물었다. '견진'이란 게 무슨 뜻인지 천주교 안에서 그 의식이 갖는 의미가 무엇인지 등등. 그리고 견진 당일에는 '꽃을 사가야 되는 분위기인건지' 물었다. 사가야 되는 분위기이지만 성사 의식의 당사자인 내가 내 입으로 사오라고 하기는 민망하여 "사오지 않아도 된다, 사지 말아라."라고 말했다.
그런데 성사 후 주변 견진 동기들에게 쏟아지는 꽃다발과 선물 세례 속에서 나만 덩그라니 빈 손으로 단체사진을 찍어야 했다. 옆에 분이 나의 그런 모습이 안쓰러웠는지 본인이 받은 화분선물을 들고 사진찍으라고 건네며 "남편 분이 오늘 못오셨나 봐요?"라고 물었다.
가족의 생일과 여러 의식들을 기념하며 챙기는 사람이 나이다 보니 정작 나의 기념일에는 적당한 축하도 받지 못하는 것 같아 씁쓸한 마음이었다. "꽃다발 당연히 사와야지, 이게 얼마나 큰 의미인데. 카드도 써주고 외식도 시켜줘."라고 그냥 말했어야 했을까. 그랬으면 그 꽃다발 속에서 난 과연 충만했을까.
서운하고 아쉽지만 그래, 어쩔 수 없는 것이다. 엄마의 자리가 감당해야 할 구석진 부분이 있는 것이겠지. 나에게 주는 다른 부분의 축복들에 감사하자. 남편은 남편의 방식대로 열심히 상황을 파악해보려 노력했다. 그 방법이 비록 서툴고 투박했지만 말이다. 그 진심만을 꽃다발처럼 고이 받는걸로..
# 첫영성체
윤우가 드디어 첫영성체를 했다. 1년의 기간이 아니라 짧게 끝낸 것이 아쉬울 만큼 영성체의 감동은 컸다.
'하늘에서 땅으로 내려오는' 루비콘의 시기에 윤우에게 이 통과의례는 많은 의미가 있었던 것 같다. 시험점수같은 외부적인 판단과 잣대는 분명 폭력적이고 지나치게 단순한 면이 있지만 '내가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어느 정도 가이드를 제시해주기도 한다. 이제 점점 부모에게서 떨어져 '나'로서의 단단함을 갖춰가야하는 시기에 시험도, 평가도 없는 학교에서의 포근함은 마치 천으로 둘둘감은 손으로 물건을 만지듯 모호하고 막막한 느낌일 수도 있지 않을까.
첫영성체를 위한 모든 과정을 한마디 불평없이 오히려 자신의 몫으로 완전하게 받아들이는 윤우를 보니 '바깥에서 나를 재단해주는' 작업을 윤우가 퍽 바랐다는 생각이 들었다. 윤우에게 적절한 통과의례였다.
첫영성체를 위해 신부님이 아이들에게 "아~"하라고 하시며 직접 입에 성체를 넣어주시는 모습을 보고 있자니,
내가 처음 윤우에게 '아~'하라고 하며 이유식을 떠먹여주던 장면이 떠올랐다.
한단계 성장하는구나. 내가 이 아이의 肉을 키운다면, 하느님께서는 진정 이 아이의 靈을 키워주고 계시구나. 하는 생각이 들었다. 몇 번의 입학식과 졸업식에서도 흐르지 않던 눈물이 펑펑 쏟아졌다.
# 꾸준함에 대하여
의식적으로 더 이상의 발도르프 책은 읽지 않으려 하고 있는데, '냇물아'에 꽤 쉬워보이는 발도르프 책이 들어온 걸 보고 빌려와 읽게 되었다. <아이의 건강한 리듬생활>과 <12감각을 깨워야 내 아이가 행복하다>를 읽었는데, 쉬운 말로 매우 설득력있게 발도르프 교육 내용을 풀어낸 것에 감명을 받았다! 이 두 책을 쓴 김현경이라는 사람이 매우 궁금해져서 이리저리 찾아보기까지 했다.
리듬생활은 결국 습관이며 내가 어딘가에 의존하게 된다는 것은 자기방치와 무절제라고 하면서 대표적으로 우리가 의존하고 있는 것으로 텔레비전, 스마트폰, 술, 쇼핑을 들었다. 스마트폰이 나의 일상에 너무나 많은 비중을 차지하고 있다는 생각에 문제의식을 갖고 있었고, 이와 동시에 에너지가 자꾸 분산되고 소비되는 느낌이 들어서 지치는 느낌이었는데, 리듬생활에 대한 저 책을 읽어보니 결국 나의 '리듬'에 문제가 있었던 것 같다.
저자는 올바른 리듬생활의 정착을 위해 '의지를 통한 꾸준함'을 강조하고 있다. 아! 나에게 너무나 부족하다고 느끼고 있던 것. '의지', '꾸준함'. 무언가를 하고자하는 마음이 들면 나는 벌써 그것을 잘 하고 싶다. 꾸준한 연습을 통해서 기술이 숙련되는 것인데 그 지난한 꾸준함의 시간을 견디지 못하니 무엇하나 잘하게 되는 것이 없고 그 상태로 편안하고 자극적인 것에만 손이 가고 결국 생활이 붕 뜨게 된다.
1년, 2년, 5년 그리고 나, 아이, 우리 가족의 10년 뒤를 기쁜 마음으로 느긋하게 기약한다는 것.
리듬생활은 내가 아이의 스케줄을 관리하는 차원의 문제가 아니었다. 삶을 바라보는 내 태도의 문제인 것이다.
# 책이 건네는 조언들
코엑스 도서전에 가서 <약간의 거리를 둔다>라는 책을 샀다.
삶의 경험에서 우러나오는 것일지라도 조언이나 충고가 나열되어 있는 책에 대한 거부감이 있는데,
이 책은 몇 장 읽어본 것만으로도 마치 나를 앞에 앉혀두고 나에게만 이야기하는 것 같았다.
저자소개를 보니 불우한 환경의 외동딸, 그리고 가톨릭신자이다. 아, 그래서 그렇게 느껴졌나보다.
흔히들 이야기하는 조언들 속에서 나는 오히려 길을 잃고 방황하는 느낌일 때가 많다.
'마음이 이끄는 대로 가라.'라는 말에서 '마음'의 이야기가 진정 나의 욕구인지, 사회가 주입한 욕구인지, 즉흥적인 쾌락추구인지 어찌 판단할 수 있지?라는 의문이 든다.
'지금 이대로의 당신을 인정하라'는 이야기에서는 개선되어야 할, 그래서 노력해야할 나의 성향, 태도와 받아들여도 괜찮은 부분들을 어찌 구분하지?라는 질문이 떠오른다.
'신과의 관계'에 있어서는 모든 것을 그 분 뜻으로 돌리라는 신념은 이 세상의 온갖 잔혹함 앞에서 무슨 말을 할 수 있는지 의아했다.
이런 질문들이 이 책을 보니 조금씩 풀어지는 느낌이다. 결국은 '약간의 거리'라는 적당함이 진리인듯도.
<아이들에 신에 대해 묻다>라는 책은 예전에 읽고 실망해서 방치해두었었다. 그런데 이번에 다른 사람에게 줄까 싶어 다시 뒤적거리는데 처음 읽었을 때와 너무 다른 울림을 주어서 노트에 발췌까지 하며 다시 읽게 되었다. 처음 이 책을 사기 전 이 책에 대한 나의 기대는 제목 그대로 아이들에게 신이라는 존재를 어떻게 설명하고 받아들이게 할 것인가에 대한 답을 주지 않을까 하는 것이었다. 하지만 책의 내용은 '신을 믿는 부모가 취해야할 육아태도'에 가까웠고 여타 육아서의 좋은 이야기들만 나열해놓은 듯하여 금방 흥미를 잃었었다.
그런데 이번에 읽어보니 감동이 남달랐다. 받아들이는 사람에 따라, 심지어 받아들이는 때에 따라 이렇게 느낌이 다를 수 있다니 신기했다. 이 책에서는 믿음 안의 육아라는 것은 내가 채워주지 못하는 점에 대해서 신에게 의탁하고 부모가 신이 아님을 인정하는 것이며 그래서 불안과 두려움 없는 육아라고 이야기한다. 나의 한계를 아는 것에서 불안이 사라지리니.
# 내 안의 욕구
나는 무얼 원하고 있는걸까. 아직도 잡히지가 않는다. 어쩌면 빨리 잡아내려 하는 것 또한 욕심일지도 모르겠다.
자연 속 어딘가로 이주해서 살고 싶기도 하고, 누군가에게 보탬이 되는 전문적인 일을 하고 싶기도 하고, 이래저래 배우고 싶은 것, 하고 싶은 것도 많다.
게다가 셋째에 대한 포기가 잘 안된다. 막둥이만 생각하면 마음 한켠에 뻐근한데, 셋째를 낳으면 막둥이에 대한 마음이 많이 해소될 것만 같아서 그런듯 하다. 막둥이가 지금 혹시 우리가 오라고 손짓하는 걸 기다리고 있는 건 아닌지..싶기도 하고. 화장하러 들여보내기 전에 "네가 원하면 꼭 다시 와.."라고 이야기했는데, 셋째를 포기한다는 건 내가 그 약속을 먼저 깨는 것만 같아서 쉽게 결정을 할 수가 없다.
하느님...막둥아...어찌해야 하나요.
# 남편과 나
남편과 싸웠다. 항상 같은 패턴. 20년째인가.
내가 원하는 다정함을 자신은 줄 수 없다며 바람을 피우는 게 나을 것도 같다고 이야기하는데, '이 사람이 많이 좌절했구나.'싶었다. 부모에게 못받은 애정까지 자신에게 덤태기 씌우는 것 같다고 할 때는 부인할 수 가 없었다. 맞는 이야기이다.
부모님도 남편도 모두 나를 사랑한다. 그들의 방식대로. 하지만 난 그 방식이 내가 원하는 사랑이 아니라며 슬퍼한다. 곰곰히 생각해보니 나는 부모님과 남편의 나에 대한 관심을 매우 부담스라워한다는 걸 깨달았다.
한 명의 아이에게 쏟아지는 두 어른의 관심은 그 사랑이 포용이 아니라 방향성을 가지고 있을 때는 감옥이 된다. 나에게 부모님의 사랑은 그랬다. 마치 감시 카메라 안에서 생활하는 기분, 일일이 체크당하는 듯한 갑갑함.
남편은 일상생활 속에서 나를 예민하게 챙긴다. 조그만 변화라도 감지되면 무슨 일인지 묻는다. 살가운 애정이다. 그런데 관심을 감옥처럼 느꼈던 내 지난 날들이 즉각 반응을 일으킨다. 이건 싫다! 라고.
잘못한 사람은 아무도 없다. 그 애정을 온전하게 받아들이지 못하는 것은 내 그릇의 문제이다.
20년동안 바뀌지 않았지만 앞으로 20년동안 연습하면 조금은 나아질 수 있겠지. 본질을 보는 연습.
그리고 내가 원하는 그 모습대로의 사랑을 가족에게 주는 연습을 하면 내 그릇도 점점 달라지지 않을까.
내 안의 욕구를 직시하고 꾸준함과 희망 속의 기다림 안에서 때때로 막막할 때 신에게 도움을 요청하면 무언가 삐걱하며 열리고 달라지는 날이 오리라고 믿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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