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딸을 바라보며... 본문
윤서는 딸이다.
나는 딸을 낳았다.
너무나도 원했던 딸이기에 바로 내 눈 앞에 아기가 보이는데도 믿기지 않을 때가 있다.
심지어 '진짜인가? 진짜 내가 딸을 낳았나?'하며 몽롱한 느낌마저 드는 거다.
품에서만 잠드려 하는 아이를 매달고 화장실까지 다녀오면서 어제는 문득 '너도 커서 이렇게 아기 안고 동동거리고 잠 못자는 날들을 보내겠지.'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자 갑자기 안쓰러워지면서 '그 때 네가 힘들어서 징징거리면 내가 달려가 아기도 업어주고 네 밥도 차려줄께.'하며 고물거리는 둘째에게 먼 미래를 약속하기까지 했다. 고단하고 처절하고 때론 사무치게 벅찬 그 일을 너도 하겠구나..생각하니 뜨끈한 동질감이 느껴졌다. 그러면서 아직 아기인데도 딸에게서 내 인생이 보이고 딸의 인생 속에서 나를 그려볼 수가 있었다.
러셀은 <행복의 정복>에서 이렇게 말했다.
이 세상에서 삶을 행복하게 영위하기 위해서는 자신은 곧 인생의 막을 내릴 고립된 개체가 아니라 최초의 세포로부터 멀고 먼 미지의 미래로 이어지는 생명의 흐름의 한 부분이라고 생각하는 마음가짐이 필요하다. 미래에 확고한 흔적을 남길 만큼 위대한 업적을 이룰 수 있는 능력을 가진 사람은 일을 통해 이 감정을 만족시킬 수 있지만 대부분의 남녀들은 자녀를 통해서만 이러한 감정을 충족시킬 수 있다.
이제서야 그가 말하려는 게 무슨 뜻이었는 알 것 같다.
가정출산을 준비하며 나는 인류의 역사동안 생명을 낳아 기르던 여성들의 에너지가 나와 연결되어 있다는 믿음을 가지려 노력했다. 내가 혼자가 아니며 생명 에너지 흐름 속에 함께하고 있음을 느끼고자 했던 거다.
그런데 딸을 낳으니 노력하지 않아도 느낄 수 있었다. 내가 윤서를 통해서 우주와 연결되며 영원히 사라지지 않을 거라는 걸. 내가 아이들을 통해서 인류와, 우주와, 다른 모든 생명들과 이어져 있다는 것을 말이다.
윤서는 나와 손금 모양이 같다. 나는 손금이 여러 갈래 나눠진 흔치않은 모양인데 어느 날 보니 윤서가 딱 그 모양 손금을 갖고 있는 거다. 나와 비슷한 아이인걸까?
내가 딸을 원했던 건 사실 내 인생 내내 이어져오고 있는 고질적인 외로움 때문이었다. 딸이라면 나를 이해해주고 나와 친구가 되어줄 수 있으리라는 못나고 처절한 바람이 있었던 거다. 지금도 친구같은 엄마가 되고 싶다는 소망은 변함이 없다. 하지만 이제 반대로, 같은 여자라서 내가 이 아이를 많이 이해하고 도와줄 수 있으리라 생각하니 좋다.
여기 또 한 여자의 일생이 시작되었다. 같은 듯 다르게 흐를 내 딸의 인생을 옆에서 지켜볼 생각을 하니 벌써부터 행복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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