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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먹.자> - 호박죽과 우럭지리 : 요리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본문

고래노래의 사는 이야기/밥은 먹고 살자

<밥.먹.자> - 호박죽과 우럭지리 : 요리의 '힘'은 어디에서 오는가?!

고래의노래 2012. 1. 17. 23:30
수많은 소설과 영화에서 음식이 주는 치유의 힘을 이야기하지만 나는 아직 그런 마법을 경험해보지 못했다. 지친 마음을 위로받았던 술 한잔의 기억은 있어도 힘을 북돋아 주었던 밥 한 그릇의 추억은 떠오르지 않는다. 임신했을 때 혼자 눈물을 흘리며 먹었던 칡냉면의 에피소드가 있긴 하지만 칡냉면은 여전히 나의 혀에만 작용할 뿐 마음에까지 힘을 뻗치지는 못한다. 만화책 <심야식당>처럼 다른 사람들은 마음 속에 품은 '치유의 음식' 하나씩은 있는 것일까.

며칠 전 우리 가족은 꽤 힘든 주말을 보냈다. 나는 나대로 남편은 남편대로 또 윤우는 윤우대로, 서로서로 맞물려 마음이 많이 힘들었다. 토요일 아침부터 왠지 모르게 몸에 힘이 없고 축축 늘어졌는데 남편도 마찬가지여서 둘 다 무표정한 얼굴로 아이와 잘 놀아주지도 않고 같이 놀자는 아이를 귀찮아 하며 힘든 기색을 계속 내비쳤다.
그러다가 급기야 울며 보채는 윤우에게 남편이 "조용히 해!" "뭘 잘했다고 울어!"라면서 윽박지르기까지 했다. 어른의 권위로 아이를 찍어누르는 슬프고도 무서운 말. 아주 어렸을 때부터 저 말을 들으면 '어른들이 논리로는 안 되니 나를 힘으로 누르려 한다.'는 억울함이 차 올랐고 내가 어른이 되면 아이에게 절대 저런 말을 하지 않으리라 다짐했기에 남편이 저 말을 했을 때 많이 서글펐다.

여러모로 힘든 한 주를 보내고 남편이 많이 지친 것 같았다. 건강상 염려되는 점이 있어서 병원을 왕래하면서 긴장했을 것이고 팀 이전도 결정되어 다가올 변화를 준비하느라 마음이 많이 바빴을 것이다. 그 지친 마음을 달래고 다시 기운을 낼 수 있게 해줘야 했다. 결국 모든 게 '기운'의 문제이고 그렇다면 음식으로 귀결된다. 뭘 해줘야 호랑이 기운이 솟아날까나 고민스러웠다.

원래 주말 아침에는 간단하게 넘어갈 때가 많다. 주말 요리는 남편이 책임지는데 아침만큼은 유난히 일어나기 힘들어해서 주말 아침도 내가 하고 있다. 일요일 아침에는 빵과 떡을 먹기로 했는데 어제의 남편을 보니 빵쪼가리를 줄 수가 없었다. 평소와는 다르게 새로운 분위기로 기분 전환을 시켜주고 속도 든든하게 해줄 메뉴를 생각하다가 단호박을 쪄서 호박죽을 준비해 보기로 했다.

불린 쌀을 천천히 끓이면서 만드는 정식 호박죽이 아니라 찐 단호박을 찬밥과 섞어 믹서에 갈아내어놓는 초간단 호박죽이다. 요리책에서는 전자렌지에 단호박을 살짝 돌려서 껍질을 먼저 벗기는 걸로 되어 있는데, 우리집에는 전자렌지가 없으니 일단 그냥 찐 후에 속을 파내는 방법을 썼다. 그렇게 찐 단호박과 찬밥을 섞은 후 물을 조금 붓고 믹서에 갈아서 다시 냄비에 옮겨 담은 후 소금, 꿀을 섞어 다시 한 번 끓였다.


그냥 호박죽만 내어놓기에는 심심해서 냉장고에 있던 시루떡을 가위로 작게 잘라 고명처럼 죽 위에 얹었다. 호박죽과 단팥, 새알심이 왠지 어울린다는 생각이 든 건 호박죽과 단팥죽이 짝꿍으로 연상되기 때문인걸까? -_-;;; 어쨋든 뭔가 궁합이 잘 맞는다 싶어 시도해 보앗다. 찍어놓은 사진을 다시 보니 호박죽 위에 얹은 시루떡 조각들이 꼭 전복죽 위에 놓인 전복 슬라이스같다. ㅎㅎ 전복죽처럼 보양식은 아니지만 조금은 특별한 아침상에 남편의 몸과 마음이 다시 단단해지길 기도했다.  

그러나 정성과 기도만으로 모든 것이 완전해지는 마법은 없었다. 오후에 또 사건이 터진 것이다.
요즈음 윤우는 식탁에서 '놀지 않고 밥만 먹는 연습'을 하고 있다. 3월에 유치원에 들어가기 전에 혼자 밥먹는 법을 익히게 하고 싶었기 때문에 그 전 단계로 밥상에서는 밥만 먹는 것부터 시작해본 것이다.
하지만 5살 아이에게 이것은 큰 도전이다. 밥먹기에서는 도저히 재미를 찾을 수 없는 아이는 식사시간에 끊임없이 우리에게 말을 걸고 노래를 부르며 의자에서 뒤돌아섰다가 발 구르는 것을 반복했다. 식탁에 흘린 음식은 꼭 손으로 문지르거나 바닥에 휙 하고 떨어뜨린다. 이 날도 부산스럽게 밥을 먹다가 식탁에 떨어진 반찬을 바닥으로 던지려고 하길래 "하지마!"라고 제지를 했다. 한 5번 정도 큰 소리를 내며 흘린 반찬으로 향하는 손을 잡았는데 마치 내 말은 들리지 않는 것처럼 무조건 반찬만 보고 계속 손을 뻗었다. 이 순간만큼은 진짜 아이가 미친 사람같았다. 미치기 일보 직전의 내 얼굴도 짜증으로 무참히 일그러졌을 것이다. 

이 모습을 보고 결국 남편이 윤우의 손을 낚아채 잡더니 윤우에게 "자꾸 그러면 너 병원가야 돼!"라고 엄포를 놓았다.
난 경악했다. 병원이란 건 소아정신과를 말하는 건데, 순간 내가 이해한 게 진짜 맞는지 잠깐 의심을 했을 정도였다. 우리의 아이를 '비정상적 아이'로 보고 있는 남편이 너무 서운하고 서글펐다. 게다가 그 사실을 당사자인 아이에게 이야기한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고 있었던 건지... 어른의 상황으로 비유하자면 "너 자꾸 이러면 정신병원에 보내버린다!"라는 협박이나 다름이 없었다. 
윤우는 대번 "병원은 아플 때 가는 거지!"라며 반박을 했다. 이에 남편은 "이러는 게 지금 아픈 거야!"라며 확인 사살을 했다. '너는 지금 정상이 아니다.'라는 이야기는 '정상'이라는 범주를 정의내리기 어렵기 때문에 함부로 뱉기 힘든 말일 뿐더러 그것이 '마음이 아픈 상태'일 경우에는 한껏 애둘러서 부드럽게 표현해야 하고 진짜 생화학적(호르몬 작용이나 뇌 결함)으로 아픈 경우에라도 그건 본인의 잘못이 아니므로 그 상태를 죄악시하는 말투는 아이에게 큰 상처가 될 게 뻔했다. 이제 만 3세인 아이에게 "나는 비정상적인 아이다."라는 자의식을 심어준다는 건 너무 끔찍한 일일 것이다.
 
이 또래의 아이들이 바른 자세로 밥 한 그릇을 말끔하게 비운다는 게 어디 가능한 일인가. 똑바로 앉아라, 발 떨지 말아라, 빨리 씹어라, 계속 잔소리를 하며 매번 짜증을 내지만 나도 이 사실은 알고 있다. 게다가 부산스럽더라도 윤우처럼 식탁 의자에 계속 앉아 있는 아이도 찾아보기 힘든 것이 사실이다.

윤우가 밥을 다 먹고 거실로 포르르 달려간 사이 난 이 점에 대해 남편에게 조용히 이야기했다. 남편은 듣기만 하고 대답이 없었다. 나의 말을 수긍하고 자신이 했던 말이 심했다고 인정하는 것 같았다.
하지만 시간이 지날수록 화가 났다. 남편이 몸이 힘들어서 마음의 여유가 없어진 것 뿐이라고 계속 되내어 보아도 화가 풀리질 않았다. 한 숨 자고 일어나면 괜찮으려나 싶었는데 낮잠을 자고 일어난 후에도 마음 속에 앙금이 한무더기 쌓여있었다. 그런데 왜 이렇게나 화가 나나 또 생각해보니 내 마음 또한 그러하지만 애써 감추고 있는 것인데 남편이 이를 드러내주었기 때문이라는 걸 알게 되었다.

사실 나도 윤우를 꽤나 걱정하고 있었다.
윤우는 전화통화도 제대로 하지 못하고(상대의 이야기를 듣지 않고 자기 이야기만 대충 함) 기분이 좋아서 흥분하면 같은 말만 반복적으로 한다. 전화 통화에서 친정 엄마가 살짝 걱정했을 정도였다. 엄마, 아빠말고는 또래 친구들을 포함하여 다른 사람들과 대화를 거의 안 하고 책 내용도 맥락의 이해며 원인-결과의 유추를 거의 못하는 듯 했다. 그리고 다리를 가만히 두지 못하고 끊임없이 움직인다.
결국 이런 걱정 중 대부분은 시간과 함께 사라져 버릴 것들이고 만약 그 걱정들이 사실이라고 할지라도 내가 지금 윤우에게 해줄 수 있는 건 걱정하는 눈으로 바라보는 게 아니라 그저 사랑해주고 긍정해주는 것임을 알고 있다. 그렇기 때문에 애써 등 뒤로 감춰두웠던 근심이었다.

낮잠을 늘어지게 자고 일어나더니 남편은 컨디션이 많이 좋아 보였다. 예전처럼 윤우에게 장난치고 깔깔대며 뒹굴었다.
하지만 나는 여전히 마음이 냉랭했다. 이 기운을 감지한 남편이 왜그러냐고 물었지만 나중에 얘기하자며 팔짱끼고 꽁할 따름이었다.

그러다가 저녁 즈음이 되어 장을 보러 마트에 갔다. 남편이 저녁으로 우럭지리를 해주겠단다.
우럭이라니! 나였으면 절대 생각 못했을 메뉴 선택이다.
남편은 나보다 요리 감각이 만배는 뛰어나다. 대장금처럼 맛을 그릴 줄 알아서 텔레비전에서 본 요리를 비슷하게 재현하기도 하고 혼자 메뉴를 개발하기도 한다. 일반적인 메뉴를 요리하더라도 나처럼 요리법을 검색하는 일은 좀처럼 없다. 그저 이런 저런 맛의 조합을 상상하며 손을 움직일 뿐이다.

 
결과는...역시나 훌륭했다. 우럭과 무에 물넣고 끓인 다음에 대파와 소금을 넣었을 뿐이라는데 그 뜨근하고 진한 국물에 "으~~어!"하는 감탄사가 절로 나왔다. 허겁지겁 먹다보니 사진찍은 건 냄비에 남은 찌꺼기 뿐이다. ;;;;; 감자부침개도 함께 했는데 마치 감자칩처럼 바삭한 것이 어찌나 맛있던지!!!! 나는 꽁했던 상태도 잊고 "조쉪~~~역시 훌륭해, 훌륭해!!!"하며 엄지 손가락을 허공에서 몇번이나 흔들어 주었다.

음식이 얼린 마음을 녹인다. 맛있는 음식이 주는 행복감은 바로 앞에 앉은 사람에 대한 마음으로까지 퍼진다. 게다가 그 사람이 음식을 요리한 사람이라면야! 우럭지리가 내 마음 속 근심을 덜어주는 '치유의 마법'을 부리지는 못했지만 '그래, 당신만한 사람도 없다.'라며 내 마음을 다시 말랑하게 해주었다. 요리에 힘을 불어넣어 상대에게 전달하는 것, 나는 실패했고 남편은 성공했다. 받아들이는 입장에서 내가 더 유연한 사람이기 때문이라고 생각하고 싶지만...역시나 요리 실력 차이일까. -_-;;; 요리의 '힘'이라는 건 결국 정성보다 맛이란 말인가! 결과보다 과정이 중요하다는 말은 역시 그냥 사탕발림? 흑흑 게다가 더 서러운 건 남편은 요리로 내 마음 풀어줄 의도따위는 없었다는 거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