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청주 부모님과의 1박 2일, 그 두근거림 본문
항상 생신 때가 되면 우리가 청주로 내려가곤 했는데 생각해보면 정작 생일 당사자의 집에 내려가 우리가 배불리 얻어먹고 오는 식이니 어딘가 어긋난 느낌이 진작에 있었더랬다. 생일 파티는 외식으로 한다쳐도 그 외의 아침, 저녁 등 남은 끼니들은 고스란히 부모님의 책임이 되어버리니 말이다. 게다가 아빠는 예전부터 청계천이 보고 싶다며 엄마에게 노래를 부르셨단다. 딸네 집에서 하룻밤 자면서 사위랑 편하게 술잔도 기울이고 마음껏 서울 나들이도 해보는 아빠의 꿈을 "늙어서 애들 성가시게 하면 안되는겨!"라며 엄마가 내내 꺾어오셨던 터였다.
그런데 이번에는 주말마다 가는 나의 병원일정 때문에 도저히 시간을 낼 수가 없었다. 두 분을 올라오시게 할 아주 좋은 핑계거리가 생긴 것이다. 딸이 아파서 그렇다고 하자 엄마는 두 말도 않고 "그래 올라가마!"하셨다. 물론 1박을 결정하는데는 하룻밤의 시간이 걸렸지만 말이다.
올라오시기 며칠 전부터 집안을 조금씩 청소하기 시작했다. 평소에 잘 챙기지 않던 현관입구와 화장실 거울, 베란다 창틀까지 싹싹 닦았다.
예전에 혼자 살던 자취방에 엄마가 오신다고 하는 날에도 항상 그랬다. 때국물 뒤집어쓴 집안을 한바탕 뒤집어 놓는 일. 그렇게 전력을 다 해 닦고 쓸어 놓아도 엄마는 귀신처럼 청소할 거리를 찾아내어서 팔을 걷어 붙이고 한숨을 쉬기 시작하셨다. 그 때의 엄마는 나에게 초등학교 시절의 장학사와 다름없었다. 아무런 떨림이나 기대도 없이 그저 긴장만이 존재하는 살벌한 감시자의 방문.
그런데 이제는 달랐다. 지금의 청소는 밑보이지 않기위한 최소한의 몸부림이 아니라 귀한 손님을 맞이하기 위한 설레이는 준비였다. 집안 구석구석을 새벽까지 청소하면서 나는 피곤하다기보다 오히려 들뜨는 기분이었다.
병원 치료를 마치고 집에 와 계신다는 부모님을 뵈러 서둘러 집으로 걸어가는데 횡단보도 앞까지 오자 마치 100일된 연인을 만나러 가는 사람처럼 심장이 뛰었다. 너무나 오랫만에 느껴보는 두근거림이라 나조차도 당황스러웠다. 그만큼 난 엄마, 아빠와의 1박을 기대하고 있었다.
다행히 매서운 추위가 한차례 지나고 비도 그친 주말이었다. 내가 체하는 바람에 원래 예약해두었던 광화문의 한정식집에는 갈 수가 없었다. 분당에서 대충 점심을 해결하고 서둘러 광화문으로 버스를 타고 출발했다.
드디어 청계천에 발을 디디신 우리 아빠! 워낙에 수줍음이 많으신 분이라 티는 안 내고 그저 미소지으실 뿐이다. 엄마는 연신 "이제 봐유. 여기가 청계천이랴. 이제 봤지? 소원 풀었지?"하며 확인을 하신다. ㅎㅎ 아빠가 방랑자라면 엄마는 집순이이다. 그런 둘이 만났으니 두 분 다 답답할 수 밖에. ㅋㅋ 엄마는 구경거리에 목매는 아빠를 못마땅해하시고 아빠는 즐거움을 같이 나눌 수 없는 것이 안타까우실 꺼다. 나는 아빠를 닮아 방랑벽이 있기에 아빠의 마음을 충분히 이해한다. 세상엔 보고 싶은 것들로 가득하거늘!
날이 많이 풀렸지만 청계천을 끼고 광화문까지 걸었더니 몸이 으슬으슬했다. 광화문 광장 옆 KT 건물 1층에 있는 올레 스퀘어에 들어가 따뜻한 커피와 빵을 먹으며 몸을 녹였다.
내리 이어지는 사랑이 증명사진처럼 보이는 순간이 바로 이러한 것이리라. 손주에게 한 입 먹이는 할머니의 모습. 제비처럼 입을 한껏 벌린 우리 꼬맹이가 할머니의 사랑을 먹는다.
벨기에인이 직접 만들어 '일반 와플과의 비교를 거부한다'는 올레 스퀘어의 와플은 진짜 훌륭하다고 한다. 맛있다며 4분(꼬맹이 한 명과 어른 셋)이서 두 접시를 비웠다. (나는 위에 탈이 나서 먹지 못했다. ㅠ.ㅜ 나까지 먹었으면 세 접시는 너끈했으리.)
광화문 광장에 선 친정 부모님과 나, 그리고 내 아이.
서울로 올라와 학교를 다니며 친구들과 백번도 넘게 지나다녔을 이 서울길을 이제서야 부모님과 함께 거닌다. 그 때 왜 그러지 못했을까 반성하는 것이 아니다. 지금 다시 돌아간대도 그 때의 상황을 바꿀 수는 없을 것이다. 그 때 나는 아직도 자유를 찾아 날아가는 중이었고 부모님은 나를 놓아주지 않았으니 말이다. 엄마가 전화할 때마다 나에게 쏟아붓는 비난의 말들에 치여서 엄마가 나에게 전화하라는 메세지를 보낼 때마다 '이번엔 내가 또 뭘 잘못했나.'하는 걱정에 가슴이 답답해지곤 했다.
올해 초에 엄마는 나에게 말씀하셨다.
"이제 너와의 끈을 놓을 수 있게 됐어. 그게 참 힘들었는데 어느 한 순간 되더니 마음이 편해지더라."
그 뒤로 엄마와 나는 한결 편안해졌다. 나는 더 이상 엄마의 전화가 두렵지 않았고, 대화하며 웃는 일도 많아졌다. 자식이었을 때는 그저 달아나고만 싶던 품이었건만 부모가 되어보니 자식을 쉬이 떼어보낼 수 없는 것이 부모 마음이라는 것을 알게 되었다. 그렇게 힘든 일을 엄마는 해냈다. 나도 친정엄마처럼 20~30년 뒤쯤엔 윤우와의 '그 끈'을 잘 놓을 수 있을까.
그래서 지금 이렇게 웃으며 같이 광화문을 걸을 수 있는 것이 감사하다. 더 늦지 않았다는 것이 다행이다.
광화문 광장은 FTA 반대 집회를 막을 준비를 하느라 경찰들이 깔려 있었고, 광장 옆으로는 펜스가 쳐져 있었다. 살수차도 보였는데 윤우가 "엄마, 이거 무슨 차야?"하고 묻길래 "사람들한테 물대포 쏘는 차야!"라고 크게 얘기해 주었다. -_- 흥!
윤우가 추울까 걱정이라며 어서 집에 가자는 엄마를 설득해서 광화문에서 인사동을 지나 명동으로 왔다. 며칠 전 텔레비전에 나왔다는 '명동의 회오리 감자 청년들'을 부모님이 연예인 보듯이 보고 계신다.
인사동 용수염 과자 가게 청년들이 시끄럽게 수다떨며 용수염의 긴 가닥들을 휘이휘이 감아대는 모습을 보며 해맑게 웃으시던 아빠의 얼굴을 잊을 수가 없다. '어쩜, 이리 재밌는 구경거리가 있담!'이라는 생각풍선을 머리 끝에 매달은 소년의 얼굴이었다. 부모님을 모시고 '서울구경'을 하는 보람이 온 몸으로 짜릿하게 느껴졌다. 저리도 재미난 구경을 좋아하시는 분인데, 해외여행을 척척 보내드리지 못하는 게 너무 아쉽다.
집으로 돌아와 저녁상을 차렸다. 엄마, 아빠께 드리는 나의 첫 생신상. 32년만에 드리는 온전한 한 상차림이다.
부모님이 올라오시기로 한날부터 생신상을 어떻게 차려드릴까 고민했었다. 이제까지 잠실 부모님께는 집들이다 생신이다 해서 음식을 장만해 상을 차려드린 것이 꽤 되지만 정작 친정 부모님께는 처음 해드리는 일이었다.
돼지고기를 좋아하시는 아빠와 소고기를 좋아하시는 엄마를 위해서 각각 삼겹살 파인애플 꼬치와 소고기 불고기를 준비하고 가지, 호박, 시레기로 나물 요리를 했다. 상차리기 직전에 한 것은 배추굴전. 그리고 생신상에 빠질 수 없는 미역국. 김치와 깍두기는 시댁표이고 감자 샐러드는 엄마가 싸오신 것이니 내가 한 반찬만으로 치면 조금 가짓수가 적다. ㅠ.ㅜ 그래도 엄마와 아빠는 '꼬마 주애'가 커서 한 상 차려 내왔다는 것이 그저 신기하신지 연신 맛있다, 대견하다 하셨다. 미역국이 살짝 흠이었는데 "미역국 좀 밍밍하지?"라는 내 질문에 현수가 "응. 좀 그렇네."라고 솔직발언을 했다가 엄마의 호된 역풍을 맞기도 했다. ^^ ㅎㅎ ("아~~~~니~~~ 미역국이 왜~~!!! 맛만 좋아! 맛만 좋아!")
"할머니, 할아버지 생일 축하드려요!"라고 제법 의젓하게 얘기하는 윤우. 엄마, 아빠는 고깔모자에 즐겁게 민망해하셨다. ㅋㅋ 우리가 윤우에게 받고 싶은 그대로 해드리자고, 꺼지는 촛불 너머로 조용히 다짐했다.
내려가시는 부모님께 이제 어버이날에 다시 올라오시라고 했다. 날씨 좋은 그 때에는 경복궁과 창경궁, 창덕궁, 덕수궁 어느 궁궐을 가도 좋을 것이고 북촌을 돌며 구경을 하는 것도 좋을 것이다. 어버이날과 생신, 이 두 날만큼은 우리가 부모님을 대접해드리는 날이니 당연히 서울에서 모셨어야 했는데 이제서라도 제대로 자리잡게 되어 기쁘다.
부모님이 돌아가시는 것을 가끔 상상한다. 이제는 제법 그럴듯하게 그려지는 그 장면 속에서 나는 '고아'가 되어 있다. 형제, 자매없이 동그마니 세상에 남겨진 아이. 그리고 이런 생각이 드는 것이다.
'나에게 쏟아지던 무조건의 사랑은 이제 끝났구나.'
너무나 생생하게 느껴지는 이 공허한 마음때문에 나는 윤우에게 형제가 더 필요하다고 생각했었다.
"네가 어떤 짓을 해도 이 세상에서 너를 무조건 지지해줄 사람들은 엄마, 아빠 뿐이야. 그걸 기억해."
엄마의 이 말도 이제 이해한다.
나는 어쩌면 엄마, 아빠의 젊은 시절을 계속 이해하지 못한 채 살지도 모르겠다. 가끔은 내가 그 시절에 대해 설명을 요구할 자격이 있는건가 하는 생각이 들 때도 있다. 가족 모두가 각자의 상처를 안고 신음하고 있지만 서로를 보듬으려 다가가기에는 명확하지 않은 무언가가 안개처럼 가로막고 있다는 게 답답할 뿐이다. 상처를 안보이게 잘 감싸고 웃고 있지만 상처가 났고 있는지 곪고 있는지 알 길이 없다. 그저 지금은 찌뿌렸던 얼굴을 활짝 피고 웃고 있다는 사실에 안도하는 수 밖에.
나는 아직 어린 시절의 내 옆에 서 있을 뿐, 손을 잡지 못했다. 그건 엄마, 아빠도 서로의 과거에 대해 마찬가지일 것이다. 안개를 더듬어 그 시절로 돌아가 서로의 손을 잡을 수 있다면 그 땐 마음 속의 울음들을 폭포처럼 쏟아내고 다시 말간 얼굴로 깨어날 수 있겠지.
부모님과 나는 이제야 현실에서 마주하고 웃을 수 있게 되었다. 이제서야 두근거리는 사이가 되었다. 이게 좋은 시작이 아닐까. 지금 여기에서부터 서두르지 않고 시작하는거다. 한 걸음. 한 걸음...
벌써 어버이날이 기다려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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