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써니> - 결국 밥상을 못엎고 돈만 쥔 그녀들이 안타깝다. 본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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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써니> - 결국 밥상을 못엎고 돈만 쥔 그녀들이 안타깝다.

고래의노래 2011. 7. 23. 11:17
드디어 <써니>를 봤다. 버찌씨 친구 중 한 명인 영주와 함께였다.
학창시절 추억에 관한 영화를 여중시절 친구와 함께 볼 수 있어 행복했다.
하지만 영화는 재밌고도 씁쓸했다.

영화의 주제는 영화를 보기 전부터 짐작할 수 있듯이 아주 단순하고 명확하다. "각자의 삶을 살면서 잊고 있던 여고시절의 기억을 통해 그녀들이 자기 인생의 주인임을 생각하게 된다."는 것.

영화 끝까지 그녀들은 '생각'만 한다. 깨닫고 행동하는 것은 나오지 않는다. 영화 초반에 그림 같은 집에서 남편, 아이를 완벽하게 뒷바라지하지만 철저하게 무시당하는 나미를 보면서 관객들은 누구나 영화 마지막에는 나미가 저 상황을 통쾌하게 극복하겠구나 생각했을 것이다.
 
그러나 그런 것은 없다. 남편은 출장에서 돌아오고, 딸과 공항으로 마중을 나가고, 그렇게 셋은 차를 타고 집으로 돌아간다. 차 안에서 나미가 운전기사에게 예전에는 안 하던 쓴소리를 하지만 그게 어쨋단 말인가. '집'에서는, '가족' 안에서는 무슨 변화가 있다는 걸까.

춘화의 돈으로 장미는 그 달의 보험왕이 되고, 금옥은 출판사 사장이 되고, 복희는 집을 얻었지만 그 이후에는??
장미는 쭈욱 보험 잘 팔 수 있을까? 금옥이는 낙하산 인사의 눈총을 잘 견뎌낼까? 복희는 춘화의 생활비가 떨어지면 또 어디에서 돈을 번단 말인가?

훈훈한 마무리는 그 시절을 함께한 우리들의 '우정'이 아니라 우리들 '짱'의 돈으로 해결되었다.

이 영화에서 돈이 등장하는 장면은 너무나 많다.
나미는 남편과 마주치기만 하면 남편이 돈봉투를 건네준다. 그 돈으로 엄마 샤넬가방을 사주니 병원에 입원한 엄마는 사위가 전화 한 통 안해줘도 대만족이다. 사회운동을 하던 오빠와 비교까지 하며 사위가 이렇게 잘 나가게 될지 누가 알았겠냐는 것이다.
복희는 자신은 지금 춘화의 문병을 갈 수 없다며 꼬깃한 만원짜리 5장이 들어있는 봉투를 건네준다. 나미는 집에서 그 봉투의 돈을 자기 봉투에 든 빳빳한 십만원짜리 수표들로 바꾼다. 복희를 만나러 가서 복희의 하루를 술집 마담에게 살 수 있었던 것도 이 돈 덕분이다.
나미는 자신의 딸이 맞은 것에 분개해 친구들과 상대 여고생을 '밟아' 준다. 여기서 가장 일등 공신을 한 것은 무거운 자물쇠 장식이 달린 명품백이다. 경찰서 합의장면은 나오지 않았지만 어른들이 법적 미성년자를 폭행한 상황에서 합의가 매끄럽게 이루어졌을리가 없다. 그럼 어떻게 해결이 되었을까? 아마도 돈이지 않을까.

껄끄럽고 복잡한 상황을 해결해주는 역할은 이 영화에서 돈이 담당하고 있다.
그게 너무 씁쓸했다. 돈이 없다면 영화의 내용은 어떻게 흘러가게 될런지.

단 한 사람, '내 인생의 주인공은 나!'라는 걸 그나마 조금 깨달은 사람이 있다면 그건 '밥상을 뒤엎고' 장례식장에 나타난 금옥이다. 그녀는 과거의 자신을 기억하고 현재의 상황에서 '나'를 끄집어 내는 행동을 한 것이다.
금옥말고는 아무도 자신의 밥상을 뒤집을 용기를 내지 못했다.
그래서 이 영화는 '엄마들의 인생'을 생각하게 하는 작품이 아니라 과거에 대한 향수를 적절한 유머와 버무려 잘 만든 오락영화이다.

생각없이 웃어버리면 그만인데, 친구와 나는 <써니>들과 똑닮은 우리들의 삶까지 생각하게 되면서 뒤끝이 개운하지가 못했다.
영주와 집으로 돌아와 고등학교 2학년 크리스마스에 녹음해 녹은 테이프를 함께 들었다. <써니>에서처럼 우리도 미래의 우리, 30살의 우리에게 음성편지를 보냈었다. "너는 이럴꺼야. 너는 이랬으면 좋겠어~"라는 바램을 닮아서 말이다.
재밌게도 우리는 모두 30살에는 애가 둘은 있을 꺼라고 생각을 했다. 아마도 앞에 3이 붙은 그 나이가 굉장한 어른으로 보였나 보다. ^^
나는 고고미술사학과에 가고 싶어했고, 서태지와 만나고 싶어했다. 고고미술사학과를 나와 여기저기 답사여행을 다니다가 이 경험을 바탕으로 만화를 그려서 유명한 만화가가 된다는 것이다. 서태지같은 남자는 없을 것이므로 결혼은 안하고 20대가 가기 전에 서태지를 꼭 만날 수 있게 해달라고 빌었다.
지금 생각하니 꿈이 참 명확하지가 않았다. 막연한 긍정과 기대뿐. 이 때부터 자신의 꿈을 잘 알고 똑바로 갈 수 있으면 좋겠지만, 삶은 청춘에게 현명함까지 선물하지는 않는다. 안타깝게도.

아쉽게도 그 시절 바램대로 된 친구는 아무도 없었다.
그래도 그 시절이 있다는 게, 그 시절을 함께한 친구들이 아직 내 곁에 머문다는 게 힘이 된다.
<써니>의 친구들도 이런 마음이었을 거라고 생각해본다.
그래서 그 힘으로 영화 뒤의 미래에는 모두 달라져 있을 꺼라고.

나미가 병원에 계신 장모님에게 전화 한통없이 돈 봉투만 건네는 남편 얼굴에 돈을 뿌리고 병원까지 끌고가는 상상을 해본다. 아직 무리일라나? -_-