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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먹.자> - 김가루 달걀죽 : 엉망진창으로 지친 마음을 삼키다. 본문

고래노래의 사는 이야기/밥은 먹고 살자

<밥.먹.자> - 김가루 달걀죽 : 엉망진창으로 지친 마음을 삼키다.

고래의노래 2011. 12. 21. 00:04
미운 4살, @이고 싶은 7살이라고 하지만 지금보다 더 한 상황이 있을거라고는 상상하기조차 싫은 요즈음이다.
끈기없고 의욕도 없는 데다가 벌려놓고 수습하지 않는 뻔뻔함까지. 사람이 가질 수 있는 온갖 취약점이 4살 배기 작은 아이게게 꽉꽉 들어찬 느낌이다.

- 참을성 제로
무언가 달라고 요구를 한 뒤 1초가 지나면 "왜 이렇게 빨리 안 돼?"라며 재촉을 한다. 2초도 아니고 분명 1초다. 과자나 요구르트같이 바로바로 줄 수 있는 거라면 모르지만, 냉동실에 얼려 두었던 떡이나 빵을 해주는 사이에는 이러한 재촉과 짜증을 내내 받아내야 한다. 심지어 만화영화가 조금만 길어도 너무 길다며 못 본다.

- 의욕 제로
제 손으로 해 보려는 의욕이 전혀 없다. 무언가를 찾을 때 손으로 찾지 않고 눈으로 훑으면서 없다고 난리를 핀다. 그저 편하게 원하는 것을 얻고자 한다.
 
- 정리 제로
온갖 장난감을 다 늘여놓고 안 치워서 엉덩이 붙일 공간 한 자리도 남기지 않는 것은 '아이니까..'라는 마음으로 넘길 수 있다. 그런데 아이들 있는 집들이 다 그렇고 그러니 정리는 포기하라는 말을 따를 만한 수준이 아니다. 거실 가득 밀가루 놀이를 한 뒤 이것을 안 치울 수는 없지 않은가!!! 그런데 엄청 벌려 놓고 자기는 몸만 쏙 빠져나가는 와중에 곧바로 다른 놀이에 대한 요구를 하기 시작한다. 뒤따라 다니며 뒤치다거리하는 것도 지치는데 정신차리기도 전에 쏟아져나오는 요구들을 받아내고 있자면 신경이 마비될 지경이다. 그 요구들을 곧바로 들어주기 않으면 '참을성 제로' 성질에 따라 징징거리는 떼가 따라오기 마련이다.

- 심심해 함
게다가 요즈음은 드러내놓고 심심해 한다. 나에게 재미있는 것을 내놓으라며 계속 요구하는데 참으로 난감하다. 아이 밥먹일 궁리에 정리 뒤치다거리 하다보면 "뭐하고 놀아줘야 할까?"하는 창의력이라고는 씨가 말라버린다.

미성숙한 아이. 그래 맞다. 아이는 완전하지 않다. 어른도 완전한 사람이 드문데 하물며 아이가 아닌가.
그래도 머리로 아는 것과 깨닫는 것은 다르다. 나는 아직 깨닫지 못했다. 오후가 되어 아이의 요구와 사태수습에 지쳐서 groggy 상태가 되어 버리면 이성의 힘은 일찌감치 마비되어 버린다. 오로지 선뜻한 감정만이 남는다.
윤우가 미워진다. 모성애 지극한 엄마들이 들으면 딸꾹질 나올 이야기지만, 그게 지금 솔직한 내 마음 상태이다. 나는 요즈음 자주 내 아들이 밉고 너덜너덜해진 내 마음은 분노를 가까스로 통제하고 있다. 모든 걸 놓아버리고 그냥 현관문을 박차고 뛰쳐나가고 싶은 마음이다.  

내 블로그 이웃 중에 시댁과 친정의 도움을 받지 않고 씩씩하게 두 남자아이를 기르고 있는 새댁 언니가 있다. 육아와 가사에 치여 강아지 손이라도 빌리고 싶은 심정일 언니일텐데 어느 주말 아침에 남편분이 과음을 하신 채로 정오까지 일어나지 않으셨단다. 남편을 향한 밉고 서운한 감정을 부르르 끓어오르는 칼국수 국물에 녹였다는 이야기를 들었을 때 언니의 그 고운 심성에 감탄하면서 요리라는 행위가 주는 위로와 치유를 생각해보게 되었다.

신경에 날이 서고 온 몸이 무거워지기 시작하는 정오 무렵, 오늘은 뭘 먹나 고민하다 김가루 달걀죽을 끓였다. 고만고만한 반찬들만 조금씩 남아 있을 때, 머리를 쥐어짜다 항상 그 고민의 끝에 죽을 끓여 먹곤 한다.


원래 요리책에서는 자취생들의 한끼 식사로 소개된 요리이다. 그만큼 별 재료없이 '때우는 끼니용 식사'.
책에서는 밥에 물을 부어 끓인 후 후리카케, 달걀물을 붓고 참기름, 김가루를 넣으라고 되어 있다.


후리카케가 없어서 김부각에 달걀물, 참기름만 넣어 끓였다. 김부각이 짭짤해서 간을 하지 않았었는데 나중에 먹어보니 너무 싱거워서 소금을 추가했다.

엉망진창으로 지친 마음같이 생긴 죽이다. 나는 새댁언니처럼 끓어오르는 죽 냄비에 내 마음을 녹이지는 못했다. 
다만 성난 마음으로 끓인 죽이 내 마음같아서 측은해졌고 그 죽을 꼭꼭 씹어 넘기면서 지친 분노가 내 속에서 피와 살이 되길 기도했다.
윤우도 함께 너덜너덜한 엄마의 마음을 먹었다. 너의 강한 심성으로 모자란 엄마의 모난 마음까지 잘 소화해주길...

** <밥은 먹고 살자>, 일명 <밥.먹.자>는 아기를 위해 요리혐오증을 벗어나고자 하는 초보주부의 눈물겨운(!) 투쟁기입니다. <2,000원으로 밥상 차리기 - 월간지>를 1년 목표로 따라합니다. 친절한 과정컷과 예쁜 결과컷 없고 오로지 처절한 인증샷만 존재합니다. -_-;; 자세한 설명은 http://whalesong.tistory.com/362 이 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