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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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노래의 사는 이야기/하루歌

Be My Valentine, Babies.

고래의노래 2012. 2. 14. 23:19
여느 날과 다름없이 정신없는 아침식사 시간이 지나고 게으름뱅이 윤우를 꾸역꾸역 먹이고 있는데 식탁 바로 옆 달력을 보니 오늘이 2월 14일이다.

출근하는 남편에게 멋적게 말했다.

- 발렌타인데이네. ㅎㅎㅎ 사랑해.
" 뭘 주고 그런 말 해라. -ㅁ-+"
- 여직원들한테 받아요. ㅋ
" -0- ..."

민망한 빈손을 흔들며 남편을 보내고 식탁으로 돌아오니 윤우가 물었다.

"엄마 뭘 받아?"
- 아, 오늘은 사랑하는 사람에게 선물주는 날이야.
"엄마 윤우 사랑해?"
- 그럼 사랑하지.
"그럼 오늘 내가 아빠랑 가서 경찰차 사줄께."
- (받는 사람이 내가 맞나? ;;;) ㅎㅎ 오늘은 주로 먹을 걸 선물로 줘. 직접 한 음식이라든지...초콜렛이라든지.
" 그럼 내가 엄마한테 초콜렛 줄께."
- ㅎㅎㅎ 고마워.

빈 말이라도 고마웠다. 자기가 선물을 받아야 하는건지 줘야하는 건지, 말하는 사이에 헷갈린 것 같긴 하지만 어쨋든 사랑이라는 단어가 나오자 엄마와 자신을 당연히 연결시킨 마음이 따스했다.

오늘은 간만에 따뜻한 날씨인데다가 발렌타인데이. 아들이랑 오랫만에 서울로 데이트를 가보기로 했다.
종로쪽에서 내려 인사동을 지나다가 점심을 먹고 조금 걸어서 갤러리 현대로 김환기 전시를 보러가는 것이 오늘의 코스.
집으로 돌아오는 버스를 타려면 세종문화회관까지 와야하니 종로 2가에서 인사동을 지나 경복궁을 끼고 세종문화회관까지, 아이가 걷기에 조금은 먼 거리였다. 유모차를 가지고 갈까 고민하다가 여행 준비를 하는 셈치고 윤우의 두 발에 맡겨 보기로 했다.

인사동 구석구석이 아이에게 재미있는 구경거리일만도 한데 윤우는 앞만 보고 성큼성큼 나아간다. 가을 내내 꿈꿔왔던 아들과의 인사동 데이트는 이렇게 꽤나 심심했다. 딱 하나 관심을 보인 건 동전지갑. 나중에 지갑이 필요할 때가 되면 사라고 했더니 그럼 그 때가 되면 자신은 빨간 동전지갑을 사겠단다. 금실은실로 곱게 수놓아진 빨간 공단 지갑을 과연 그 때까지 좋아할까. ^^;;; 생각해보니 지갑에 100원짜리와 500원짜리 몇 개 넣어주고 가게에서 사탕이나 우유를 살 때 직접 내게 하면 좋을 것 같다. 봄 날 다시 인사동에 왔을 때 하나 사주어야겠다.  
 


맛집을 찾는 거에는 젬병이다. 대충 검색해서 쌈지길 뒤에 있다는 '친절한 현자씨'에 갔다.
어짜피 아이는 매운 걸 못먹고 나는 위치료때문에 금지음식이 많아서 선택의 폭도 좁았다. 우리가 시킨 건 갈치구이.
 <내가 좋아하는 바다생물>이라는 책에 나온 갈치를 보더니 몇 번이고 먹어보고 싶다고 해서 시켜줬더니 시큰둥이다. 그런데 며칠 전에 '밥을 혼자 끝까지 먹으면 기념으로 선물을 사주겠다.'고 한 걸 기억하고는 혼자 밥을 먹어보겠다고 나섰다. 결과는...한 숟갈 남기고 먹여달라고 해서 실패. 딱 한 숟갈이었는데 왜 포기해버렸을까. 알 수가 없다.
"선물은 크리스마스 때 사줘." 이런다. 물질에 연연하지 않는 건 좋다만...쩝.

막판에는 바닥에 드러눕고 식탁 밑으로 들어가는 전형적인 5살 꼬마의 모습을 보이긴 했지만 밥이 나오기 전에 둘이 식탁에 마주 앉아 조곤조곤 이야기를 나누고 있자니 정말 데이트를 하고 있는 기분이 들었다.


김환기 전시를 보기 위해 윤우를 몇번이나 설득해야 했다. 그림책으로 김환기의 그림을 보고 "우리 언젠가 이 아저씨 점그림 보러 가자!"라고 했을 때는 그렇게나 흔쾌히 그러자고 하더니 막상 찬바람이 불고 걷는 게 힘에 부치자 바로 집으로 돌아가고 싶다는 것이다. 미술관은 '갈래갈래' 하는 곳이라며 거부하는 윤우를 달래려고 전시장 안에서 한과를 쥐어줬다가 바로 제지당했다. ㅠ.ㅜ 

전시를 보는 내내 나를 불편하게 한 건 떼쓰는 윤우보다 미술관 직원들의 싸늘하고 고압적인 태도였다. 매표할 때부터 웃음기없는 얼굴에 성의없이 신관과 본관을 설명하는 직원을 만났는데, 윤우에게 한과주다 제지당했을 때는 당연히 찬바람 쌩쌩에 '이 아줌마 개념있어?' 분위기였다. 그런데 결정타는 따로 있었다. 그 날따라 유홍준 교수의 특강이 예정되어 있어서 신관 지하 전시는 볼 수 없게 되어 있었다. 이것을 이야기하며 미안하다는 말, 이해 부탁한다는 말 한마디 없었다. 오늘 못 본 전시에 대한 대책이 없냐고 하자 "다음 번에 티켓가지고 와서 얘기하세요."라며 퉁명스럽게 대답하는 것이었다. 고고한 예술 세계를 오래도록 공부해서 자기 자신마저 고매한 존재가 된 양, 미술관 직원 모두가 대단한 착각 속에 빠져 콧대만 피노키오가 된 것 같았다.

우여곡절 끝에 마주한 김환기의 점화는 정말 아름다웠다. 그 유명한 <어디서 무엇이 되어 다시 만나랴>를 커다란 벽면 가득히 보고 있자니 마음이 물결치는 것 같았다. 오랫만에 느껴보는 일렁거림이었다.
사실 그림책에서 사진으로 보았을 때는 '점을 많이 찍은 것 뿐인데 뭐 그리 대단할까.' 싶은 생각이 있었다. 하지만 캔버스에 점을 찍고 네모를 그렸을 때의 붓떨림까지 전해지는 진짜 그림 앞에서는 달랐다. 마음까지 스며드는 푸른 색이었다. 화가가 점 하나에 담았을 그리움이 고스란히 전해지는 듯 했다.
윤우는 자기가 아는 그림을 반갑게 아는 체 하고 알록달록한 점들을 가까이 다가가 살펴보더니 이제 볼 일 다 봤다는 식으로 나가자고 했다. ^^; 한 번에 익숙해질 순 없겠지.

 

데이트를 마치고 집으로 돌아오는 길에 하트 도너츠를 샀다. 발렌타인데이용 포장 도너츠였는데 마침 윤우가 그걸 골랐다. 집에 있던 초콜렛과 함께 건내며 "사랑해~"라고 이야기하니 "응~" 이런다. ㅋㅋㅋ

기념일, 특히나 무언가 사게 만드는 기념일은 상술이라고 생각해서 거부감이 많다. '직접 만든 초콜렛'이라는 것도 단지 녹인 초콜렛을 모양 낸 것 뿐인데다가 남자들은 초콜렛 좋아하지도 않는데 여자들 자기만족 뿐이라는 생각이었다. 직접 카카오 열매를 따서 초콜렛을 만들지 않는 이상 말이다. ;;
그런데 아이에게 선물을 주며 사랑을 고백해보니 매일이 똑같은 일상 속에서 서로의 사랑을 소리내어 이야기해보는 달콤한 날 하루쯤 있는 것도 괜찮다는 생각이 든다. 굳이 상술에 휘말리는 느낌이 싫다면 무언가 정성을 담은 선물로 마음을 표현하는 방법도 있을 테니까.

점점 남편에게 미안해진다. 작은 카드 한 장이라도 썼으면 좋았을텐데. 게다가 며칠째 독감 트렌드따라 몸이 골골한데 내가 너무 무심했다. 다음 번 기념일에는 분발해봐야지.

어쨋든 발렌타인 데이의 끝자락을 붙잡고 지금은 잠든 두 babies에게 내 마음을 전합니다.
Could you be my Valentine?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