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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밥.먹.자> - 약고추장 : 요리가 나에게 주는 의미 본문

고래노래의 사는 이야기/밥은 먹고 살자

<밥.먹.자> - 약고추장 : 요리가 나에게 주는 의미

고래의노래 2012. 2. 10. 00:51
'다른 사람을 밥먹이면서 오는 즐거움'을 느끼기 시작한 건 얼마되지 않았다. 혼자 있을 때는 끼니를 대충 때우고, 다른 가족을 위해서야 겨우 주방 쪽으로 발을 질질 끌고 갈 정도로 철저하게 '남을 위한 요리'만을 해 왔으면서도 말이다. 나에게 요리는 단지 '의무'였을 뿐 '즐거움'이 아니었다. 요리에 대한 이런 부정적인 감정들을 벗어나고자 시작한 <밥.먹.자> 프로젝트가 6개월 정도 접어들자 우리나라 반찬 요리의 기본 과정에 익숙해졌고, 그제서야 조금씩 마음의 여유가 생겨나기 시작했다. 우리 가족을 건강하게 먹이고 살찌우는 책임이 얼마나 신성한 것인지도 깨닫게 되었다.

하지만 손님에게 음식을 대접한다는 건 또 다른 이야기이다. 나는 남들의 평가에 가뜩이나 예민해서 부담과 긴장에서 오는 스트레스는 '요리의 신성한 책임'에 대한 자각을 뛰어넘는 것이었다. 그러다가 한 상 번듯하게 내 놓는 손님상을 준비하며 즐거움을 느낀 건 지난 11월 친정부모님을 위한 생신상을 차릴 때가 처음이었다.(청주 부모님과의 1박 2일, 그 두근거림 http://whalesong.tistory.com/421) 사실 내가 망칠대로 망친 허접한 요리를 내놓더라도 딸이 요리했다는 것 하나만으로 맛있어하실 것을 알기에 부담보다는 기대가 클 수 있었다.

이제까지 윤우 친구와 아이 엄마들이 함께 모이는 자리에서는 으레 배달 음식을 시켜먹고는 했다. 서로 육아로 지친 마음을 달래고자 만나는 자리에서 밥상에 대한 부담을 지우기가 미안했기 때문이다. 그런데 이제 슬슬 집에 있는 반찬들로 평소처럼 한 상 차려내는 일이 늘어나고 있다. 어른들이 말씀하시는 '그냥 밥숟가락 하나 더 놓으면 되지 뭐~'하는 이야기가 어떤 것인지 알 것도 같다. ^^

지난 달에 희범이네와 연수네가 우리 집에 모였다. 다른 집 방문을 힘들어하는 윤우를 배려해서 현주언니는 무거운 배를 안고, 욱언니는 젖먹이 아기를 업고 먼 길을 달려와 준 것이다. 언니들이 오기 전 점심으로 무얼 내놓을까 생각하다가 집에 있던 반찬들에 조기 몇마리 구워서 모양을 내보자 했는데 차려보니 그림이 그럴듯했다. 그 중 가장 인기있었던 반찬은 이것이었다. 


약고추장! 약고추장이라기 보다 볶음고추장으로 많이 알려진 '소고기 볶음 고추장'이다. 오랫동안 한국을 떠나 있어야 하는 사람들이 가방 속에 챙겨넣었다가 진짜 고향이 그리운 날에 조금씩 짜서 밥에 쓱쓱 비벼 먹는다는 그 튜브형 고추장이 바로 약고추장인 것이다.

본래 이 하나만으로도 만만한 반찬거리인데, 위 치료 후 내 주요 반찬으로 급부상한 '데친 양배추'와 함께 곁들여 먹으니 그 궁합이 환상적이었다. 나의 요리에 이렇다 저렇다 평가가 짠 윤우아빠가 거의 처음으로 "이거 괜찮네."라고 인정해준 기념할만한 음식이기도 하다. 사실 그만큼 요리실력보다는 재료의 조합만으로도 자연스러운 맛이 나서 초보주부에게는 고마운 찬거리이다.


재료
(밥공기 하나 분량)
* 필수재료 : 다진 소고기(1컵 반=250g), 고추장(1컵), 참기름(3)
* 선택재료 : 다진 땅콩(반 컵)
* 양념 : 설탕(1), 깨소금(1.5), 간장(2), 청주(2), 꿀(3), 다진 마늘(2), 다진 파(2)

요리법
1. 다진 소고기는 키친타월에 올려 핏물을 빼 양념하고
2. 달군 팬에 식용유를 두른 뒤 양념한 소고기를 볶고
3. 양념한 고기가 익어 색이 갈색으로 변할 떄쯤 고추장과 물(1/4컵)을 넣고 10분 정도 중간 불에서 저어가며 졸이고
4. 다진 땅콩, 참기름을 넣고 섞어 마무리

이번에 만들 때는 꿀통을 거의 들이붓다시피 했다. 지난 번에 만들었을 때 달달한 맛이 조금 강한 것이 참 맛있었던 기억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너무 과해서 고추장의 매운 맛이 전~혀 느껴지지가 않았다. 느껴지려다가 꿀의 달콤함에 꾹꾹 억눌린 미묘한 맛이 되버렸다. 단 맛, 짠 맛, 매운 맛이 서로 아웅다웅 다투다가 지쳐 나가떨어진 느낌, 맛들이 눈 먼 느낌이랄까.T-T 급하게 언니들 오기 전에 고추장을 더 투하해서 맛을 조금 돌려 놓긴 했지만 여전히 밍숭한 뒷맛이 아쉬웠다. 그 요리가 응당 내야할 주요한 맛을 살리고 보완하는 방향으로 조리해야지, 내 입맛 취향에 맞추자고 요리의 본연의 맛을 꺾어서는 안된다는 걸 절실히 깨달았다.


꿀통에 빠진 밍밍한 약고추장인데도 언니들은 '이게 정말 물건!'이라며 정말 맛있게 먹어 주었다. 나의 <밥.먹.자> 프로젝트를 알고 있는 언니들은 내가 차린 평범한 점심상에 과분한 칭찬도 쏟아내 주었다. 마치 '아이구~ 저게 시집가서 밥이나 해먹고 살까' 싶었던 막내동생이 내 온 밥상에 무조건 감격하고 보는 친정 언니들처럼 말이다. 나도 겸손해하기는 커녕 마치 친정언니들에게 뽐내듯 '이게 요즈음 내 일상 식탁'이라며 마음껏 기고만장했다. ㅋㅋㅋ

배불리 먹고 나서 책읽어주는 현주언니 주변으로 아이들(뱃속의 봄이까지 모두 사내아이 넷!)이 한 자리씩 차지하고 누웠다. 내가 아끼고 사랑하는 사람들이 내가 해주는 밥을 먹고 만족스러운 표정을 짓는다. 내 손으로 만든 음식들이 그들의 피가 되고 살이 되고 힘이 되었다. 이것이 요리가 나에게 주는 의미이고 행복인 것이다.

자식이 밥 공기를 비우기 무섭게 밥주먹을 내밀어 빈 그릇을 채우며 "더 먹어, 더 먹어"를 연발하는 우리네 엄마들의 마음을 이제 조금 알 것 같기도 하다. 작가의 자전적 소설인 <도쿄타워>라는 책에 아들의 친구들이 집에 올 때마다 밥을 해먹이는 엄마가 나온다. (도쿄타워 - 나도 그 엄마의 밥을 얻어먹어 보고 싶다 : http://whalesong.tistory.com/201) 그녀의 넘쳐나는 사랑, 모든 사람을 귀히 대하는 마음이 '밥 먹이는 행위' 속에 고스란히 녹아있다.
내가 처음 보는 사람에게 선뜻 밥 한공기를 내밀게 되는 날, 내가 아무런 부담없이 우리 부엌문을 열어놓는 날이 내가 늘 바라던 '따뜻하게 열려있는 사람'이 되는 날일 것이다. 사람들을 위한 밥상을 차려내고 치우기를 반복하다 보면 어느 새 나 또한 그런 모습이 되어있을까.

** <밥은 먹고 살자>, 일명 <밥.먹.자>는 아기를 위해 요리혐오증을 벗어나고자 하는 초보주부의 눈물겨운(!) 투쟁기입니다. <2,000원으로 밥상 차리기 - 월간지>를 1년 목표로 따라합니다. 친절한 과정컷과 예쁜 결과컷 없고 오로지 처절한 인증샷만 존재합니다. -_-;; 자세한 설명은 http://whalesong.tistory.com/362 이 곳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