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래가 부르는 노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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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로 사는 이야기/아이들이 자란다

우리 둘의 사랑 이야기

고래의노래 2011. 12. 4. 00:51
사랑하는 사람이 나를 사랑해주는 기적같은 일보다 더 힘든 일이 상대방이 원하는 방식으로 사랑을 주는 일이다. 그것은 상대방을 사랑하는 '자연스러운 감정'을 뛰어넘는 '의식적인' 표현 방식의 문제이기 때문이다.
아이들이 엄마에게 원하는 사랑이라는 것은 '함께 있어 주는 것'이 기본이다. 이 절대적 시간을 바탕으로 주양육자와 아이 사이의 깊은 애정인 '애착'이 생겨난다. 올바른 애착이 형성된 아이는 자신감이 있고 긍정적이며 이를 바탕으로 모험과 도전을 두려워하지 않는다고 한다. 거창하게는 아이의 앞으로의 인간관계와 세계관을 좌우하는 것이 이 '애착'이다.
윤우가 태어난 순간부터 단 하루도 윤우 곁을 떠난 적 없었던 나는 윤우와의 애착관계에 대해서 조금의 의심도 하지 않았다. '의식'없이 행해졌던 내 사랑이 윤우를 병들게 하는지도 모른 채...



나들이를 원치 않는다는 고백 이후로 윤우는 줄줄이 충격적인 고백들을 쏟아냈다.

"친구들 만나고 싶지 않아. 상윤이만 만나고 싶어."
야마하 모임에서 만나는 친구들이며 블로그 언니들과의 모임에서 만나는 친구들은 모두 거부하고 어렸을 때부터 한 동네에서 줄곧 봐오던 상윤이만 만나겠다고 선언을 한 것이다. 나는 조금 당황했지만 이 때까지만 하더라도 장난감을 나누지 않고 과격하게 장난을 치는 몇몇 친구들이 윤우에게는 부담스럽고 싫었던 모양이라고 생각했다. 태어나서 누구 손에 든 물건 한번 뺏어보지 않은 아이이니, 자기가 원하는 것을 계속 뺏기는 상황이 반복되는 것이 달갑지 않았을 것이다. 게다가 윤우는 뺏긴 장난감을 되찾기 보다는 그것을 다시 찾아오기 위해 친구와 투닥거리는 갈등상황을 피하는 쪽을 택하는, 아주 여린 아이였으니까.

그런데 며칠 뒤 또 다른 마음 속 고백이 이어졌다.

"아빠랑 나만 남겨두고 엄마 어디 가지 마."
놀랐다. 정말 많이 놀랐다.
아빠랑만 남겨두고 내가 친구들과의 약속을 위해 나가거나 혼자만의 시간을 갖기 위해 외출할 때 윤우는 조금의 감정 변화도 보이지 않았었다. 심지어 시댁에 맡기고 우리끼리의 시간을 보내기 위해 나갈 때조차 어떤 미련도 보이지 않던 윤우였다. 돌아와서 잘 지냈냐고 어머님께 물어보면 매번 윤우는 너무 잘 놀았고 우리를 찾지도 않았다고 했다. '와, 윤우는 정말 쿨한 아이구나. 나와의 애착이 안정적으로 이루어져서 조금 떨어지는 것쯤은 문제도 아닌가 보다.'라고 나는 내심 의기양양했다.
그런데, 단지...속으로 삭히고 있었던 걸까.

엄마 어디 가지 말라는 말에 알았다고 이제 안 그러마 약속을 했지만 바로 다음 날인 토요일 나는 병원이 예약되어 있었다. 자주 체하고 체하기만 하면 머리가 아프면서 이틀 내리 쫄쫄 굶어야 평상시 상태로 돌아오는 일이 몇 년째 이어져 왔지만 몇 번의 내시경으로도 뚜렷한 원인을 찾지 못했다. 그러다가 이런 증상만 골라 치료하는 병원을 알게 된 것이다. 선택의 여지가 없는 막다른 골목이었으니 나는 치료를 시작해야 했다.
병원에서는 일주일에 적어도 3번 와서 치료를 받고 가라고 했다. 이제부터 나는 주말을 몽땅 쏟을 수 밖에 없게 된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애써 고백한 아이를 두고 말이다. 토요일 아침 엄마는 병원에 다녀오겠다고 하자 윤우는 입을 쑥 내밀고 나에게 다녀오라는 인사도 하지 않았다. 전에 없던 일이었다. 윤우는 다시 한번 엄마의 순위에서 뒤쳐지는 경험을 하게 되었다.
아이와 치료, 어느 쪽을 택하더라도 반드시 다른 한 쪽이 해를 입게 되는 딜레마 상황에서 나는 우울해졌고, 우울해지자 날카로워졌다. 아이에게 날을 세웠다가 다시 심한 자책으로 이어지는 악순환이 계속 되었다.  

윤우를 바라보는 현수와 나의 시각도 한창 각이 져 있던 상황이었다.
윤우는 눈을 깜빡이는 경미한 틱 증상을 보였고, 특유의 부산스러움은 ADHD를 의심하게 만들었다. 텔레비전에 나오는 문제아이들의 모습과 윤우가 너무 닮아 섬뜩하기까기 했다. '도대체 저 아이의 문제가 뭐냐!'며 윤우를 이리저리 재면서 도끼눈을 뜨는 일이 잦았다. 그러다가 심란한 마음에 올바른 정보를 알아보고자 본 60분 부모에서 뜻밖의 이야기를 듣게 되었다.

떼 잘 쓰고 신경질이 많은 것과 엄마와 떨어지지 않으려 하는 것, 잘 때 엄마의 특정부위를 만지며 집착하는 것 등이 불안심리의 표현이라는 것이다. 무언가를 만지며 불안한 마음을 감각적으로 안정시키려 하는 것을 감각방어라고 하는데 두 돌 이전의 감각기에 감각욕구가 충족되지 못했거나 기질적으로 감각이 예민한 아이들에게서 찾아볼 수 있는 것이라고 한다. 생각해보니 윤우는 어렸을 때부터 감각에 무척 민감했다. 올록볼록한 것은 무엇이든 만져보아야 했고 새로운 물건은 먼저 냄새부터 맡아보았다.
이미 아이와의 비슷한 갈등상황을 현명하게 지나간 상윤엄마의 조언도 덧붙여졌다. 엄마랑 떨어져 있어서 불안하다는 것은 자신에게 원칙을 정해줄 사람이 없는 데서 오는 불안이라는 것이다. 기준이 없는 세상에 던져진 막연함. 이것은 엄마가 제지를 많이 하면 벌어지며 특별히 안전문제가 걸리지 않았으면 뭐든 허용해주는 것이 아이들이 스스로의 기준을 세울 수 있는 길이라는 것이었다.

윤우가 불안심리를 가진 아이라니...처음에는 엄청난 죄책감이 엄습했다.
융통성 없이 윤우를 제지하며 엄하게만 대했던 순간들, 아이의 짜증을 감당하기가 버거워서 우는 아이를 싸늘한 표정으로 바라만 보았던 일들, 엄마 살 부비며 자려는 아이를 내 자세가 불편해진다며 저 만치 밀어버렸던 일까지 하나하나 마음에 와서 박혔다. 
그런데, 그 이후에는 억울해졌다.
그냥 분유 먹이라는 주변의 잔소리에도 꿋꿋하게 모유를 먹였다. 밤 중에 깨는 아이 달래느라 잠을 얼마나 설쳤던가. 힘껏 때리고 싶은 마음을 억누르며 부르르 떨었던 일도 많았다. 하루 24시간 일주일 내내 같이 있는데 주말 잠깐 몇 시간동안 외출한 것이 그렇게 잘못된 일이란 말인가. 나는 할만큼 했다. 사실 나만큼 하기도 힘든 거 아닌가. 다른 엄마들은 얼마나 천사처럼 잘해주길래!!!! 직장맘 아이들은 그럼 어떻게 살아가나, 왜 유독 이 아이만 이럴까. 도대체 내가 뭘 얼마나 잘못했다고...

감정의 파도 속에서 이리저리 휘청이다 지쳐서 해안가로 밀려났을 때쯤 겨우 이런 생각이 들었다.
아이마다 기질과 상황이 다르다. 윤우는 예민한 아이이고 자신의 감정을 쉬이 표현하지 않고 속으로 쌓는 스타일이다. 게다가 나랑만 생활하고 있으니 엄마의 눈빛과 기침소리 하나에도 민감해질만큼 엄마의 영향력이 막대해졌을 것이다. 감각도 예민한 편이니 더 했겠지. 똑같은 상황이었어도 윤우는 받아들이는게 달랐을 것이다.
그리고 같이 있었을 때 아이에게 얼마나 집중했나 생각해 보았다. 친구들과 함께 만나면 항상 나는 아이엄마들과 수다떨기 바빠서 윤우는 방치해두기 일쑤였다. 윤우가 계속 찾아도 조금 놀다가 도망와 버리거나 저리 가서 놀라며 거부를 했었다. 친구들과의 놀이가 서툰 윤우는 엄마에게마저도 거부당한 채 혼자 동그마니 남은 느낌이었을 것이다. 친구들과 만날 때마다 그런 부정적인 감정이 쌓여왔으리라.

어렵게 우리의 상황을 받아들이고 윤우에게 절대 화를 내지 말자 다짐했다.
아이에게 맞추자고. 윤우가 부르면 달려가자고 말이다.



몇 주 전 블로그 언니들 모임이 있었다.
윤우의 이런 상황에 대해서 언니들한테는 미리 얘기를 해 두었던 터라 새댁언니가 윤우가 좋아할만한 것을 준비해 줄테니 알려달라고 했다. 스티커와 퍼즐을 이야기하니 스티커와 퍼즐, 케익까지 준비해 주시겠단다. 약속 당일 아침에 조심스럽게 떠보니 윤우는 가기 싫다고 했다. 그런데 윤우가 좋아하는 스티커가 있다고 하니 선뜻 간댄다. 아직은 아이의 단순함이 남아있어 다행이었다.

마음을 접고, 최악의 경우 그냥 밥만 먹고 돌아오자는 생각으로 출발했다.
아니나 다를까 윤우는 스티커를 받고 조금 놀다가 한시간 반 쯤 지나자 집에 가자고 했다. 나는 주저없이 알았다고 하고 채비를 시작했다. 그런데 그 사이에 블로그 언니들이 코코아로 꼬셔서 잡아두고, 놀이터 가자고 조금 늘이고, 껌 준다고 꼬시면서 어느 덧 4시간이나 흘러버렸다. 그 시간 내내 나는 백일 지난 둘째 아이를 등에 업은 언니와 임신 후기의 임산부가 차려주는 밥을 먹고 케익과 차를 마시면서 내내 윤우 옆에 붙어 있었다. 윤우가 부르면 냉큼 달려가고, 앉아서 놀자 하면 언니들과의 대화는 포기하고 그냥 눌러 앉았다. 놀이터에서도 나는 내내 윤우의 그네를 밀어주고 시소를 태워주고 사다리 계단 올라가는 것을 도와주며 옆을 지켰다.
아이가 가잘 때 미련없이 가자고 마음을 접으니 한결 편안했다. 내 욕심을 깨끗하게 포기하고 접어놓으니 서운한 일도 없고 짜증도 나지 않았다. 게다가 이런 내 상황을 언니들이 이해하고 내 주변에서 동그랗게 자리를 잡고 도란도란 이야기를 나눠주었다. 너무나 고마웠다.

그 다음 주에 내가 병원에 다녀온다고 하자 윤우는 곧바로 얼굴이 굳었다. "그럼 같이 갈래?"라고 물어보니 고개를 끄덕인다. 온 가족이 선릉까지 출동했다. 내가 진료를 받는 한시간 반동안 윤우는 아빠와 선릉을 산책했다. 모든 것이 잘 진행되는 듯 했다.



그런데 그렇게 며칠이 지나자 나는 부러질 것만 같았다.
주말마다 병원에 따라가겠다던 현수의 약속은 100% 지켜지지는 않았다. 어느 상황이나 변수가 있는 법이니 말이다. 지난 토요일에는 근무가 있다고 했다. 결국 윤우를 시댁에 맡길 수 밖에 없는 상황이 된 것이다. 나는 잔뜩 예민해졌다. 아이의 기분에 맞춰 내 감정을 오랫동안 억제한 상태라서 심적으로도 지치고 힘든 상황이었다. 병원 진료를 그만두고 아이에게 집중하겠으며 내 마음이 지치고 힘들어지면 차라리 정신과를 선택하겠다고 했다.

현수는 나를 달래면서 건강한 엄마 또한 윤우에게 큰 선물이니 모든 점에서 완벽하려 하지 말고 현 상황에서 최선을 다하자고 했다. 윤우에게 우리의 한계를 알게 하고 상황에 적응시키는 것도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래, 그 말이 맞다. 엄마, 아빠가 지금 상황에서 최선을 다해 너를 사랑하고 있다는 걸 알려주자고 다짐했다. 아이와 떨어질 수 밖에 없는 상황에 대해서는 양해를 구하고 함께 있는 시간에 최고로 행복하게 해주자고 말이다.
윤우를 재우고 기도를 했다. 그저 저기 어디가에 있을 절대자에게 매달리는 심정으로 제발 도와달라고.

그 주 토요일에 윤우를 시댁에 맡기고 다시 찾아갔을 때 저녁까지 내내 계속 놀아주었다. 윤우와 놀아줄 때 항상 방법을 몰라 고역이었는데 60분 부모에 전문가가 나와서 하는 '말이 놀아주는 것이 별 게 아니다. 그저 아이가 하자는 대로 하는 것'이라고 하기에 아이가 시키는 대로 하고 맞장구를 쳐주었다.
그 날 이후 주말 내내 윤우는 짜증도 줄고 밥도 잘 먹었다. 그리고 훨씬 편안해 보였다. 현수까지 느낄 정도였다.



윤우는 결국 하나의 이야기를 하고 싶어한 것 같다.
"엄마, 나를 좀 더 바라봐 주세요."

사실 걱정이 된다. 이렇게 사교성과 사회성이 없이 엄마만 바라보면서 내년에 어린이집에서 잘 적응할 수 있을까. 게다가 윤우는 친구를 같이 놀 상태가 아니라 내 놀이를 방해하는 인물 정도로만 낙인찍어 버렸으니 말이다.
소수의 친구 그룹과 자주 만나게 해주는 것이 이 시기의 사회성을 기르는 가장 좋은 방법이라고는 하지만, 아이가 큰 스트레스를 받는 상황이어서 그리 할 수는 없다. 엄마와의 시간을 좀 더 충분히 가지면 그 때는 친구들에게 눈을 돌릴 수 있겠지. 내년에 시작되는 공동육아가 반일제이고 아이가 적응할 때까지 부모참관이 가능해서 다행이다. 혹시나 너무 힘들어하면 일주일에 하루 이틀 정도는 쉬게 하면서 지켜봐야겠다.


힘겨운 가을날이었다.
사랑이 본능적인 감정이 아니라 의식적인 행동이고 그렇기에 노력이 필요하다는 것을 이제야 깨닫는다. 아이에게 사랑을 주는 방법론에 대한 그 많은 책들은 결국 나를 한 걸음도 나아가게 하지 못했다. 나를 변화시키는 건 언제나 그렇듯 아이이다.  
단 하나 위안이 되는 것은 윤우의 어려운 고백 또한 나를 믿었기 때문이 아니었겠는가 하는 점이다. 
기꺼이 변해줄 수 있는 엄마라고 생각했기에 윤우는 이야기를 꺼냈을 것이다. 아이는 아직 나를 믿고 싶어 한다.

그네가 흔들리듯 멀어졌다 가까워졌다 울었다 웃었다를 반복하는 우리. 그래도 결국은 서로에게 제자리라는 것을 믿기 때문에 상처난 마음을 털고 일어난다.
우리 둘의 사랑 이야기는 이제 다시 시작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