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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노래의 사는 이야기/하루歌

사랑이 어렵다. 그래도...

고래의노래 2011. 10. 13. 23:50
아침부터 분주했다. 보통 주말의 일정은 내가 미리 짜놓고 남편에게 통보하는 편인데, 그 주의 스케줄은 홍대 와우북페스티발에 가는 거였다. 도서관에 책을 가져다 주고 다시 집근처 버스 정류장으로 돌아와서 버스를 타야 하니 시간이 빠듯했다. 물론 빠듯하다는 건 충실한 하루를 보내기 위한 나의 기준에서이다. 누구 하나 기다리는 사람없는 온전히 우리들만의 나들이니 말이다.

내가 운전을 하고 나섰다가 도서관에서 주차를 하는데, 3번 시도를 하다가 이 정도면 됐다 싶어서 급한 마음에 얼른 차에서 내렸다. 하지만 남편은 삐뚤어진 차를 보고는 "이게 다 댄거야?"라며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지금은 시간이 없고 조금 삐뚤어지긴 했지만 양 옆의 차들이 문을 여는 데 지장이 없다며 맞섰다.
그러자 남편은 "이래서 차 끌고 나온 김여사 소리를 듣는 거야. 어려운 건 배울 마음이 없구만." 이라며 빈정댔다.
바쁘다고 하니 페스티발이 시간이 정해져 있는 것도 아닌데 뭐가 바쁘냐는 거다.
알았다고 다시 주차하겠다고 하니 됐단다. 남편은 이미 마음이 틀어져 버렸다.
처음부터 스펙트라로 가자는 걸 조금이라도 운전 연습 해볼 요량으로 소나타 끌고 가자고 한 건 나였다.
게다가 양 옆의 차에게 욕 들을 만큼 삐딱하게 주차한 것도 아닌데 '김여사' 운운하는 소리를 듣자니 화가 뻗쳤다.

결국 아이를 사이에 두고 언성이 오고 갔다.


누가 우리를 기다리는 것도 아니요, 주차 연습 몇 번 더 하면 나에게 좋은 것도 당연하다.
구구절절 맞는 이야기이다. 맞는 말에 화를 내는 내가 남편은 이해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비난에 쉽게 발끈하지만 불편한 공기를 견디지 못한다. 혼자 부르르 끓어올랐다가 금방 식는다. 좋은 말과 미소로 달래며 다시 한 번 주차해 보자고 말했다면 나는 그렇게 했을 것이다. 그렇게 나는 분위기를 잘 타는 편이다. 누군가 띄워준다면 혼자서 방방 뜨지만 굳은 얼굴에 애교를 떨지는 못한다. 
하지만 남편은 절대 그렇지 않다. 분명한 이유가 없이는 미소 한 번 짓지 않는다.
그래서 답답하고 때론 우울해진다.

아이를 돌봐주며 내가 힘들어하는 모습이라도 보이면 남편은 불편해하면서 잔뜩 부어오른다.
지난 번에 윤우를 데리고 전쟁기념관에 갔을 때도 그랬다. 식당에서 내가 윤우 밥을 먹이고 있는데, 앞에서 잔뜩 굳은 얼굴을 하고 있다. 밥 맛도 없다며 반도 더 남은 설렁탕을 옆으로 치운다.
자주 아팠던 어린 시절에 아프다고 하면 엄마는 짜증부터 내면서 "어휴~ 내가 못살아"라고 땅이 꺼져라 한숨을 쉬었다. 나는 이해할 수 없었다. 진짜 걱정되고 마음이 아프면 더 따뜻하게 돌봐주면 되는 일인데, 아픈 사람에게 짜증까지 내다니. 게다가 아픈 건 내 의지로 어쩔 수 있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어렸을 때부터 이 '모순된 반응'을 똑똑히 기억하면서 내가 어른이 되면 절대 저러지 않으리라 다짐까지 했다.
그런데 남편이 나에게 저러고 있는 거다. 이제는 벗어날 줄 알았던 그 한숨에서 말이다. 이제 내가 한숨이 나왔다.

무조건 안쓰러워 하고, 무조건 달래고, 언제든 예쁘다 잘한다 칭찬해주는 햇살같은 사랑..이 고팠다.

남편...은 나와 대학교 동기이다. 동아리에서 만났고 1학년 때부터 연애를 해서 회장, 부회장까지 한 동아리의 죽돌이, 죽순이였다. 태어난 햇수로는 차이가 난다 하지만, 어짜피 같은 학년인 것이다. 30살에 친구들보다 일찍 아이 아빠가 되었지만, 마음까지 한순간에 커진 건 아니었다.
하지만 난 항상 남편에게서 큰 어른의 관대함과 포용을 기대한다. 내가 조금 얼렁뚱땅 어긋나는 행동을 하더라도, 사소한 일에 짜증을 내더라도  허허 하고 웃으며 넘어가주길, 그저 부드러운 미소로 감싸주길 바란다. 받지 못한 사랑에 대해 아기새처럼 끊임없이 입을 벌리며 요구를 하는 거다.
하지만 나에게 사랑을 빚진 적 없는 남편에게 이건 그저 '어른스럽지 못한 행동'일 뿐이다. 

이렇게 남편에게는 퍼주기식 사랑을 기대하지만 정작 윤우에게는 옳바른 행동에 대한 보상식 사랑을 줄 뿐이다.

지인들과의 잦은 만남과 약속을 반복하다가 이번 주는 윤우가 아파서 꼼짝없이 둘만 지내게 되었다.
다른 사람과 섞이지 않고 오롯이 서로를 마주 본 자리에서 한동안 잘 감춰져 있던 내 마음 밑바닥의 성질이 다시 드러나, 윤우도 나도 힘든 하루하루를 보내고 있다.

나는 융통성이 없는 사람이다. 원리 원칙을 중요시하고 정도에 어긋나는 사잇길과 일탈에 대해 단호한 편이다. 그 단호함은 겉으로 보기에는 원칙에 대한 당위를 무섭게 지키는 강인함으로 비춰지지만 사실 속을 들여다보면 예측못할 결과에 대한 소심한 두려움이다.
육아에 있어서 원리 원칙은 꽤나 중요하다. 아이에게 세상의 규칙을 가르치는 것은 부모의 주요한 역할 중 하나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 강도를 조절하고 상황에 따라 융통성을 발휘하는 것은 그 보다 더 중요하다.

밥을 먹으며 물을 너무 자주 마시기에 이제 밥을 먹고 난 후에만 물을 주겠노라고 말을 했다. 윤우가 매운 김치를 먹고 물을 달라고 졸랐는데 밥 한 숟갈을 입 앞에 대 주며 밥을 먹으면 나아지니 밥을 먹으라고 실갱이를 했다. 아이는 꽤나 절절하게 물을 요구했는데, 난 냉정한 표정을 지으며 밥 숟갈을 내려놓고 아이를 차갑게 바라보았다.
몇 분이 흐르고, 결국 내가 승리했다.

양치를 한 후 두 번 입 안을 헹구는데, 한 번만 한 후 그만하겠다고 한다. 해라, 안 한다 입씨름을 하다가 싸늘하게 째려본 후 난 화장실에 아이를 혼자 남겨두고 문을 닫아버렸다. 얼마 후 아이가 안에서 소리친다. "이제 할 준비 됐어..."
또 내가 승리했다.

사소한 기싸움과 희열없는 승리의 나열이 요즈음 윤우와 나 사이의 모든 것이다.
내가 가르치고자 하는 원칙이라는 것이 전지전능한 자아를 믿는다는 이 시기의 윤우를 하루에 몇 번씩 꺾으면서까지 지켜내야 하는 것인지 의문이 든다. 이렇게 사소한 일들은 웃으며 넘어가주는 것이 융통성이 있는 걸까.
어떻게 해야 융통성 앞에, 원칙 앞에 '사랑'을 놓을 수 있을까.

참 딱하게도 정작 나는 삐둘은 선을 그려 놓고도 주변 사람들이 '융통성 있게' 웃으며 넘어가 주길 바란다.
그리고 그 주변 사람은 주로 남편일 경우가 많다. 윤우에게는 주지도 못하는 방식의 사랑을 남편에게는 뻔뻔하게 요구하고 있는 것이다. 부모에게 받지 못한 사랑을 배우자에게 요구하고 어린 시절 학습된 방법으로만 아이를 사랑하는, 심리학 책에 나오는 그 뻔한 스토리가 내 생활에서도 펼쳐지고 있다.
이제와서 청주에 계신 부모님께 보험금 타듯 이제껏 제대로 못받은 사랑을 내놓으라고 할 수도 없는데, 경직된 내 마음이 자꾸 남편과 나, 나와 내 아이 사이를 무너뜨린다. 어쩌면 좋단 말인가.

사랑하는 사람들을 제대로, 마음껏 사랑한다는 것이 나에겐 이렇게나 어렵다.
나를 바꿀 수 있는 건 나 밖에 없으니 답은 하나일 수 밖에.
하루에 한 걸음만이라도 달라지고 싶다.


아직도 화 났어? 하니
그렇다고 정직하게도 고개를 끄덕인다.
화 풀어봐. 하니
이것도 끄덕이다.
돌아다니는 내내 얼굴에 미소 한 번 짓지 않는다.
나도 얼굴이 굳어진다.

이런 마음을 가져놓고 내가 북페스티발에서 산 책은 <사랑의 기술> -_-;;
읽은대로 만들어진다는 딱 그 말만큼이라도 되었다면 내가 지금 이렇진 않을텐데...



페스티발을 본 후 광화문 광장에 왔다.
경복궁을 보더니 남편이 하는 말.
저 뒤에 있는 게 지난 번에 불탄 그건가?
아니, 그건 남대문이고...-_-;;;
결국 굳은 얼굴에 웃음이 나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