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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셀프혁명> 나만 바뀌면 다 괜찮을까?

고래의노래 2018. 4. 5. 12:38
셀프 혁명 - 8점
글로리아 스타이넘 지음, 최종희 옮김/국민출판사

2월 한달 동안 여걸모임벗들과 글로리아 스타이넘의 <셀프혁명>을 읽었다. 

저자의 명성에 이끌려 이 책을 모임에 추천했었지만, 페미니즘 서적이라고 하기에는 제목이나 표지 다지인 등이 너무나도 평범한 자기계발서같은 인상인데다가 앞의 몇 장을 읽어보고서는 새롭지 않은 이야기의 나열이라는 생각이 들어서 실망했었다. 

하지만 거부감이 느껴졌던 사례중심의 서술에서 나온 그 사례들에 강한 자극을 받기도 하고, 이미 잘 알고 있다고 생각한 내용들, 어린 시절 부모의 양육태도로부터 받은 영향, 그 영향에서 벗어나기 위해 과거의 아이와 조우하는 방법, 외부의 기준이 아니라 나만의 눈으로 스스로를 바라봐야 한다는 이야기 등을 읽으며 이제까지 쌓아왔던 정보들이 정돈되는 느낌도 들었다. 


사람들은 이야기한다. 세상을 넓게 보고 꿈을 크게 가지라고 자신의 가능성에 한계를 설정하지 말라고. 역경을 딛고 성공한 사람들이 나와서 하는 노하우들도 다 저런 이야기이다. 맞는 말이다. 하지만 그것을 불가능하게 하는 구조가 존재한다면? 성공신화는 분명히 존재한다. 그런데 그 고난과 역경이 성공신화의 조건인 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라는 상황을 뚫고 나아가지 않아도 된다면 어떨까? 


책을 읽는 동안 <네가 행복한 곳으로 가라>는 책을 함께 읽었다. 성공한 사람들은 모두 '지리적 상상력'을 발휘하여 자신과 맞는 장소를 찾아낸다는 이야기를 하며 독자에게 '당신도 스스로를 좁게 가두지 말 것'을 강조한다. 지리교육의 철학에서 현저한 차이가 나는 영국과 미국을 비교하며 두 나라의 문화적, 정치적, 사회적 가치의 지점을 비교하기도 한다. 


하지만 난 읽는 내내 지리적 상상력을 발휘할 수 없는 우리나라의 현실이 더 강하게 다가왔을 뿐이다. 그것은 언어와 지역적인 한계만이 아니라, 이 나라 안에서도 '서울'이 아닌 삶을 상상할 수 없는 많은 사람들의 한계가 있기 때문이다. 정착하지 않을 수 있는 자유는 어디에 가서도 뿌리내릴 수 있다는 자신감에서 나올텐데, 그것은 나라의 기본 복지와 연관이 있다. 대졸, 대기업사원, 결혼으로 이어지는 '정상 범주'가 아니면 철저히 내쳐질 것 같은 불안감이 온 나라를 휘감고 있는데, 어떻게 '다른 삶에 대한 상상'이 가능하단 말인가. 우리나라에서 미혼모가 아이를 키우며 '해리포터'를 쓸 수 있을까.


게다가 대량생산 산업사회에서 개인이 소비자로 철저하게 분류되어있고, 회사 안에서는 소모품화되어 시키는 일만 해야한다. 학교는 줄세우기를 가르치며 하나의 목표만 바라보게 하면서 '정상적인 삶'이란 무엇인지 끊임없이 주입시킨다. 미흡한 복지와 삐뚫어진 사회적 시선이 쓸모있는 인간과 없는 인간을 가른다. 이런 환경에서 어떻게 자긍심을 지킬 것인가. 


한국사회 속 우리는 집단적으로 자긍심 처방을 받아야하는 건지도 모르겠다. 

나만 바뀌는 걸로는 충분하지 않다. 

나의 삶에 보내는 지지는 정서적일 뿐 아니라 제도적일 필요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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자긍심이 전부는 아니지만 그 자긍심이 없이는 전부라는 게 아예 존재하지도 않는다. 

자긍심이란 외부에서 자신에게오는 파괴적 행위에 맞서는 사회적 백신이다. 


자긍심을 재발견하기 위한 여정의 단계

1) 다른 사람이 아닌 자신의 눈으로 보는 경험

2) 수치스럽게 여겼던 비밀을 당당히 말함.

3) 문제와 감정, 상황에 이름을 부여하는 일

4) 비슷한 경험을 가진 사람들과 결속

5) 스스로에게 궈난을 부여하고 자치활동

6) 힘이 분배된 구조 안에서 결속

=> 독립과 상호의존 사이에 균형을 유지하며 참된 자아의 동심원 안에서 자신의 자리를 차지하게 된다. 


마릴린 머피는 자신이 이성애자 페미니스트로서 가장 별 볼 일 없는 여성, 즉 성적이고 싶으면서도 남자에게 으르렁대지 않고 얘기를 할 수 없는 여성이 될 운명이라는 생각을 갖고 있었다. 그런데 그녀는 다른 여성과 사랑에 빠지게 되옸고, 자신이 정당하다는 말로 표현할 수 없을 정도로 자연스럽다는 느낌을 갖기 시작했다. 어떤 것이건 '규칙과 가이드라인 그리고 관습과 정통'이 있던 이성애자 시절과는 너무 달랐다. 레즈비언들은 사회 밖에서 고통받았다. 그러나 그것은 그들이 자신들에게 맞는 자신들의 사회를 만들어 살게 되었음을 뜻했다.

▶ 동성애자가 되어 세상을 색맹의 시각이 아니라 다채로운 빛의 세상으로 인지하게 되었다는 이 여성의 이야기가 매우 강렬하게 다가왔다. 그리고 그녀가 한번도 경험해보지 못했던 '자유'를 경험하게 된 것도. 누구에게도 규정되어 있지 않았던 동성애자들은 삶에 대한 그들만의 기준을 가질 수 있게 된 것이다. 나에 대해 열린 정의를 갖는다는 것은 불안과 두려움 속에서 자유를 얻게하는 것 같다. 나는 미래의 나를 절대적 이성애자로 규정하지 않는다. 그건 우리 아이들에게도 마찬가지이다. 내가 어떠한 사람인가에 대한 정체성은 '어떤 틀로의 규정'의 문제가 아니라 


폭력적인 집안에서 폭력적인 성향으로 자라난 톰, 천문학 연구소에 들어가 교수에게 들은 말

"자네가 두 가지만 명심한다면 잘못되지는 않을 걸세. 첫째는 우주의 모든 잠재적 가능성은 자네 내부에 있다는 것이네. 둘째는 그 모든 가능성이 다른 모두의 내부에도 있다는 걸세."

언젠가는 그의 아버지에게 어린 시절의 그가 달성불가능한 수준에 도달해야 한다는 강박관념으로 얼마나 고통받았는지를 말할 수 있는 날이 오기를 희망한다. 한편, 너무나 수동적인 탓에 어린시절의 그 고통으로부터 자신을 보호해주지 못했던 어머니를 용서했다.


어머니는 자신의 사랑을 얻기 위하여 애쓸 필요는 없다고 기회있을 때마다 입버릇처럼 얘기했다. 

▶ 첫째를 혼낸 후 나는 "윤우야, 엄마가 혼낼 때 혹시 억울하면..꼭 말해줘. 네가 생각하기에 아닌 것 같은데, 엄마가 시킨다고 하지는 마. 엄마한테 사랑받으려고 그럴 필요없어. 넌 그러지 않아도 사랑받을만한 사람이야. 혼날 때 네 생각을 얘기하는 게 힘들겠지만..그래도 용기내줘."

라고 이야기한 후 방으로 돌아와 누웠는데 눈물이 흘렀다. 그건 사실 내 마음 속 어린 나에게 하는 이야기였다. 


과거의 결핍된 어린 아이는 모든 외부 보상이 빨려들어가는 감정의 블랙홀과도 같다. 

성인이 되어서도 여전히 모든 것을 용서하는 '무조건적' 사랑이 필요하다. 


자긍심이라는 뿌리의 힘과 피할 수 없는 폭풍우

'그만하면 충분한 어머니' (심리분석학가 위니코트)


아직까지 상처받은 어린 시절의 기억을 내부에 단단히 껴안고 있는 부모는 어린 시절의 경험 그대로 아이를 대하거나, 반대로 자신이 받지 못했던 것을 아이에게 주고 싶어한다. 이 둘 모두 부모 내부에 가엾은 아이가 오늘의 아이를 지배하고 있는 것이다. 


우리가 가진 진정한 감정을 확인해주고 긍정해주는 사람, 그럼으로써 우리의 진정한 자아가 실제로 존재한다는 사실을 깨달을 수 있게 해주고, 그걸 실제로 남들에게도 보여줄 수 있는 사람이 어린 시절에 최소한 한 사람은 있어야 한다. 지금 우리는 우리 자신이 바로 그 '한 사람'이 될 수 있다. 

▶ 그 무조건적 사랑을 쫓아서 오랫동안 방황했다. 타인에게서 그것을 받는 걸 포기하고 종교로 돌아섰지만 그마저도 아직 잘 모르겠다. 결국 '나 자신으로부터'가 답일 것이고 그 안에 종교과의 연결점이 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나는 요즈음 가끔 아이들에게서 그 사랑을 느낀다. 내가 단지 엄마이기에 퍼부어주는 무한한 사랑. 


자신이 수용되었던 정신병원에 강사가 되어 돌아온 마리 발터의 실제 이야기

https://www.youtube.com/watch?v=6N9Bo2dwA7E


앨리스 밀러는 그녀의 부모가 그들 방식으로는 최선을 다했으며 사랑과 관심으로 자신을 돌보았다는 믿음에 매달리려 했다. 

"나의 어머니는 최선을 다하기 위해 노력하는 좋은 의도를 갖고 있는 사람이었지만, 지나치게 걱정이 많았던 여성이었다. 그리고 아이를 소유물로 인식하는 당대의 철학에 따라 애쓰면 쓸수록 자식의 삶을 침해할 뿐이었다. 그건 단지 그녀 기준의 최선일 뿐이었다."


종족과 계급을 떠나 여성들에게 있어서 교육은 삶과 지식을 분리시켰다.

여성들의 낮은 자존심에 가려진 가치를 알아보는 쉬운 방법이 있다. 객관식 시험에서 '모르겠다'는 선택사항을 없애면 된다. 

두개골학, IQ 테스트 등에서 여성과 남성, 인종을 생물학적으로 우등, 열등으로 구분하려는 시도들이 있었다. 

교육의 내용이 교육 기회의 접근 못지 않게 중대하다. 

한 젊은이 - 1년 동안 아무것도 안 읽고, 무언가 해설하는 것은 무엇이든 끊고 지냈다. 자신만의 답을 찾고 싶어서. 

다시 배우는 법 - 무의식 작업, 창조작업, 지지그룹 만들기, 대비법, 비교법으로 현상 이해, 인식 패러다임의 변혁

▶ 학교는 나에게 어떤 의미였는지 되돌아보게 되었다. 학교는 우리에게 서열화, 계층화의 줄세우기를 반복적으로 가르치는 곳이었다. 모임에서 이여기나누다 보니, 지방국립대라는 열등감과 SKY라는 우월감이 모두 거짓된 자긍심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것은 철저히 바탕의 기준에 의한 것이기 때문이다. 나를 설명하기 위해 SKY라는 이름표가 소용없어진 이후 나는 극심한 공허함과 두려움을 느꼈다. 그리고 나는 '남자는 자기보다 똑똑한 여자, 자기보다 키 큰 여자를 좋아하지 않을 것'이라는 생각에 나를 맞추어 스스로를 낮추고 움츠리며 내 욕구를 무시했던 경험들도 떠올랐다. 

총장의 사퇴를 이끌어낸 이화여대 학생들이 지금 이 사회를 어떻게 뒤틀며 이끌고 있는지 보게되자, '여대'들이 다시 보이기 시작했다. 여중에서의 내 모습과 남녀공학에서의 내 모습이 어떻게 달랐는지도 되돌아보게 되었다. 남녀공학에서는 내가 '나 자신'으로서보다는 '여성'으로서의 역할에 반응해왔다는 걸 말이다. 

마가렛 미드가 자유롭고 통합적이며 존중받는 어린시절을 거쳐 '스스로 서는' 어른으로 성장한 이야기를 읽으며 그녀가 매우 궁금해졌다. 게다가 '여성의 성스러움'이라는 페미니즘 신학 책에서도 남녀의 성역할에 대한 그녀의 연구가 인용이 된 터라 아예 그녀의 자서전을 구입해서 현재 읽고 있다. 

꿈작업, 책모임, 페미니즘을 통해 나도 다시 배우기를 하는 중이다. 


집단 내의 한 사람이 변하면 그 균형을 맞추려고 모든 사람들이 움직이듯, 집단이 변하면 사회 전체가 움직인다. 

▶ 슈타이너가 2차 세계대전 때 밖으로 나아가 집회를 참가하는 대신 오이리트미 춤을 추었다는 게 이러한 맥락이겠지. 그리고 <여성의 몸~>이나 <늑대와 함께~>에서 강조하는 자신의 내면을 먼저 돌보라는 이야기도 여기와 맞닿아 있는 것 같다. 


심리치료 과정에서 그녀는 치료사의 '가상 아버지 친구'와의 상호작용을 통해, 돌봄을 받는다는 것이 어떤 느낌이고 자신의 경험과 생각이 중요하게 받아들여질 때의 기분이 어떤 것인지를 확실하게 배웠다. 


한 가족의 일원으로 우리가 배우는 중요한 것 중 하나는 이해관계가 없는 사람들과도 잘 지내고 그들을 사랑할 수 있는 방법을 배우는 것이고, 또 하나는 다양한 인생의 단계를 대비하는 법을 알게 된다는 것이다. 


가부장적이고 성의 양극화가 극심한 문화일수록, 사람들은 로맨스에 더 중독된다. 

질투는 자신이 부적합하고 불완전하다는 확실한 느낌에서 나온다. 그럴수록 우리는 우리에게 결여된 품성을 투영해온 누군가를 소유하고자 하는 집착이 더욱 강해진다. 

"우리는 우리가 결혼하고 싶어하는 남자가 될 수 있다."

로맨스는 자기완성의 목적으로 가는 수단이지만 사랑은 그 자체가 목적이다. 우리가 만약 누군가를 사랑한다면 우리는 그의 본질을 계속해서 유지하게 되기를 원한다. 그리고 그와 논쟁을 벌일 때 이기려고 하는 것보다 우리 자신을 이해시키려고 노력하게 된다. 

로맨스 중독에 빠져 있다가 10년간 남자를 완전히 끊고 자신의 존재에 대한 확신을 되찾은 여성의 이야기.

▶ 로코 드라마에 빠지고 남자 연예인에 빠져들었던 나를 설명해주는 해석. 

지난 번 김남순 교수님의 두잉 강연에서 한 분이 '전형적 성역할을 재현해보여주는 미디어'가 왜곡되어있다는 걸 알면서도 거기에 감정적으로 빠져드는 자신에 대해서 어찌해야 하나 질문을 한 적이 있다. 나도 매우 궁금했던 부분이라 귀가 쫑긋해졌었는데, 교수님의 대답은 '그래서 우리가 더 깨어서 바라볼 필요가 있다.'는 것이어서 맥이 빠졌었다. 

지금 생각해보니 '감정'이 드는 것 자체에 죄책감을 느낄 필요는 없다는 생각이 든다. 그 감정이 나에게 말하는 바가 무엇인지를 알면 되는 것이다. 그것은 '내가 페미니스트인데 어떻게 저런 걸 좋아할 수가..'가 아니라 페미니스트이기 때문에 더욱더 내 안에 결여되었다 느껴지는 '남성성'에 대해 갈망이 있을 수 있다고 볼 수 있는 것이다. '내가 배척하고 바꿔나가야할 현상에 매료되는 나 자신'에 혼란스러운 그 분에게 교수님의 저 대답은 죄책감을 부채질했을 것 같다. 내가 나 자신의 기준이 된다는 것은 지금의 나를 있는 그대로 바라보는 것에서 시작할 수 있지 않을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