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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페미니즘과 기독교> 언어의 힘을 느끼다

고래의노래 2018. 3. 14. 13:37
페미니즘과 기독교 - 8점
강남순 지음/동녘


 내 종교 안에서 느꼈던 불편함들이 페미니즘을 알고 나서 명확해지자 나는 그 둘이 과연 양립가능한지에 대한 갈등에 휩싸였다. 불행히도 이러한 점을 이야기하고 고민을 나눌 사람이 같은 종교 지인 중에는 없었다. 그래서 온라인 서점에 '페미니즘'과 '기독교'를 키워드로 관련 책들을 뒤지기 시작했다. 처음 이 책이 검색에 잡혔을 때 너무 반가웠고 일단 주문부터 했는데, 이 책의 저자인 강남순 교수님께서 방학 시즌 때마다 한국에 와서 강연을 하신다는 걸 알게되어서 강연을 들으러 가기도 했다. 함께 읽기의 힘을 알기에 혼자 읽기보다는 같은 지점에서 갈등하고 있는 사람들과 같이 읽고 싶었는데, 마침 '치유모임'에서 이 책을 선정하셨다고 해서 반갑게 한 달동안 합류하게 되었다. 


 페미니즘과 기독교 사이에서 내가 가지고 있는 고민은 사실 기독교라는 종교의 근원에 대한 것은 아니었다. '차별없는 사랑'과 '하느님의 모상으로 지어진 인간', ' 하느님 나라는 우리 사이에 있다.'는 가르침은 페미니즘과 전혀 다르지 않았고 오히려 일치했기 때문이다. 기독교 안에 있으면서도 하느님에 대해, 하느님과 나의 관계에 대해서 내가 품고 해석했던 내용은 페미니즘과 전혀 다르지 않았다. 다만 그것이 구현되는 형식 안에서 페미니즘과 상충되는 부분이 너무나도 많았는데 그 부분까지 감수하며 내가 기독교 안에 남아있어야 하는지, 남아있는다면 어떻게 그 불합리한 형식을 수용하고 받아들일 것인지에 대한 고민이었다. 


 이 책은 실제적인 종교생활에서의 이러한 고민에 대해 답을 내려주지 않는다. 형이상학적인 담론적 정의내리기를 목표로 한 책이었던 것이다. 페미니즘 신학을 종류별로 구분하고, 페미니즘 신학이 추구하는 '정의'와 '윤리'의 개념에 대하여 기존의 철학과 대비하며 '한국이라는 상황'에서의 페미니즘 신학이 갖는 조건들을 구체화해보면서 앞으로 나아가야 할 방향에 대해 제시한다. 


 <여성의 성스러움>이라는 책을 함께 읽으며 몇십년 전의 그녀들이 건네는 피끓는 언어에 매료당하고 있던 터라 저자의 건조한 문체가 내내 아쉬웠다. 내가 기대했던 온도가 아니어서. 하지만 그 구분과 정의내리기를 거친 후에 지금의 내 상태와 상황에 대해 명확히 설명할 언어를 얻을 수 있었다. 개인주의의 한계를 지적하는 서구사회의 분위기가 '한번도 제대로 개인인 적이 없었던' 한국사회에서 그대로 수용하는 것은 문제를 낳는 다는 것, 서구의 시각으로 '아시아 페미니즘'을 그룹으로 묶으려는 대상화에 휩쓸려서는 안된다는 것, 급격한 사회변화를 겪고 있는 한국사회에서는 포스트모더니즘 담론이 서구사회에서처럼 적용되거나 논의되어서는 곤란하다는 것 등 내가 살고 있는 한국이라는 특수 상황에서  페미니즘을 바라볼 수 있는 시각을 이 책은 제시하고 있다. 즉 여러가지의 과제를 동시다발적으로 통합해서 해석해내야 하는 상황인 것이다. 주어진 답이 없이 나만의 답을 몸으로 부딪히며 만들어가야 한다. 나도 마찬가지일 것이다. 


 함께 읽기를 마칠 때 즈음에는 내가 페미니즘에서 중요시하는 가치가 무엇인지도 분명해졌다. 그리고 페미니즘을 알아가기를 주저했거나 페미니즘에 관심도 없었던 모임벗들을 통해 페미니즘을 바라보는 다양한 시선과 감정에 대해서도 알 수 있었다. 


 언어는 때로는 피곤한 말장난이고 때로는 뿌옇던 안개 속에서 나를 건져올리는 구원의 그물이다. 언어의 그 두가지 힘을 모두 느낄 수 있었던 책읽기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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첫번째 모임)

나를 이해하게 도왖는, 지금 내 상태를 명징한 언어로 풀어주는 도구가 페미니즘이고 기독교라고 생각한다. 이 둘이 합쳐진 페미니즘 신학이 있다는 걸 알았을 때 내 안의 불덩이가 드디어 방향을 잡고 쏟아질 곳을 찾은 듯 전율이 느껴질 정도였다. 

하지만 이를 진리가 아닌 두구로 여기는 것이 나의 숙제가 아니리까. 언제든 꺾고 휘게 하고 심지어 버릴 수도 있는.

그래도 이것 하나는 붙잡고 싶다. 앞으로 내가 어떠한 모습이 되든 날 품어주고 사랑해주는 존재가 그 분이라는 걸.



두번째 모임)

 종교, 특히나 기독교 안에서 페미니스트로 하느님께 기도드린다는 것은 여전히 나에게 답을 찾는 과정이다. 

하지만 공부를 할수록 내가 종교, 페미니즘에 깊이 몰입하고 있는 이유와 그 둘이 연관성을 알아가게 된다. 

 죽어서 하늘에 가게 되자 들은 단 하나의 질문이 넌 얼마나 착하게 살았느냐가 아니라 '넌 너로 살았느냐'라는 것이었다는 이야기가 있다. 내 삶은 진짜 내가 누구인지 그 근원을 찾아가는 여정인 것 같다. 그 길에서 나의 삶을 이야기하고 다른 사람의 서사를 듣고, 삶의 근원을 만나고자 걸어간다. 

 우리 자신에 관한 것은 무엇이든 신학이 될 수 있다는 말처럼 나를  알아가며 인간의 닮은 모습이라는 그 분께 다가간다. 틸리히는 '의심은 진리에 대한 열정'이라고 했다. 종교 안에서 의심하는 것을 두려워하지 않으리라. 그 분은 분명 믿음이 없다는 단죄의 판단이 아니라 열심히 허우적거리는 나를 더 흐뭇해하시리라 믿으며.



세번째 모임)

 이번주 읽은 글에게 내 마음을 건드린 것은 '문화화된 자포자기의 이데올로기'와 그것을 극복하는 '모험의 윤리'에 대한 이야기였다. 나 하나 바뀐다고 깨지지 않을 것 같은 거대한 바위덩어리 앞에서 무기력해지는 자신을 어떻게 추스리고 힘을 낼 수 있는가의 문제이다. 사회운동을 하는 사람들은 언제나 느끼는 감정일 것 같고 새로운 사회정의의 이데올로기가 내면화되는 단계에 들어서는 사람들에게도 한번씩은 거쳐가는 과정인 것 같다. 


 <여성의 몸, 여성의 지혜>에서는 '나를 치유하는 것이 세상을 치유하는 것이다'라는 말로 먼저 스스로의 내면을 돌보고 단단해지기를 권한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에서는 이러한 상태를 '아니무스의 소진'으로 정의내리고 생각을 덜어내어 단순화시키라고 이야기한다. 그리고 내면의 야성과의 만남을 통해 자신의 에너지를 쌓는 시간을 가지라고 말한다. 번역자가 안타까와 한 것처럼 어찌보면 그것은 후퇴처럼 보이기도 하고 방관자가 되라는 말처럼 들리기도 하지만 사실 중요한 지점을 말하고 있다고 생각한다. 내면의 에너지가 소진되고 자신을 스스로 돌보고 알아가지 않은 채 감정에 휩싸인 상태로 외부와 대면하게 되면 스스로도, 남도 상처입히게 된다. 


 <페미니즘과 기독교>에서 이야기하는 것은 좀 더 개념적인 이야기이다. (이 책의 목적이 그렇듯이.) 좌절감을 극복하고 장기적인 투쟁을 할 수 있는 에너지는 윤리에 대한 개념을 바꿈으로서 가능해진다는 것이다. 이제까지 우리가 일반적으로 갖고 있던 '통제의 윤리' 즉 도덕적 책임의 기준과 그 통제의 힘을 우리 쪽으로 가져올 수 있느냐의 문제가 아닌, 성공 보장은 없어도 나의 가치관대로 행동하고자 하는 결심, '모험의 윤리'안에서 희망을 찾자고 이야기한다. 공평성의 창출을 각 세대의 과제로 받아들이고 도덕적 모험을 감행하며 기쁨을 느끼자는 것이다. 저항과 연대의 공동체 안에서 말이다. 


 우리가 추구하는 가치를 새로운 시각으로 바라보는 것만으로도 희망의 에너지를 가질 수 있다는 것이 어떤 의미인지 알 듯하면서도 아직 모호하다. 좀 더 생각해보아야겠다.


 그리고 '하나의 교회'를 지향하는 '에큐메니컬 운동'에 대한 부분도 매우 의미있게 다가왔다. 다른 부분에서처럼 방법을 제시해주지는 않으나 많은 생각거리를 남겨두었다. '대화상대에 대해 얼마만큼 관용할 것이며 관용을 넘어 일치는 그러면 어떻게 가능할 것인가. 그리고 또 나아가 실천은 또 어떻게 가능한가'의 문제.


 상이한 가치들이 충돌하는 지금 한국사회에서 누구나 답답함을 느낄 것이다. 이것은 개인의 삶 속에서도 사실 항상 계속되어 왔던 것이다. 하나의 가치를 두고 모임 공동체 안에서라면 더욱 더. 우리는 개인적인 '충돌의 경험'을 이야기하였는데, 그 이야기 속에서 또한 내 삶의 경험 속에서 내가 찾아낸 깨달음은 '상대의 감정을 인정할 필요가 있으며 감정에는 옳고 그름이 없다는 것'이었다. 작년에 반 안에서 작은 갈등이 있었을 때 내가 받은 전화에서 그 갈등의 당사자가 하신 말씀이 딱 저것이었다. "제가 이렇게 느끼는 게 잘못된 건가요?" 감정은 모두 진실이다. 그것을 느낀 그 사람의 배경과 상황, 삶의 서사 속에서 말이다. 그렇다면 그것을 서로 인정하면서 이야기를 시작해야 한다. <늑대와 함께 달리는 여인들>에서 저자가 '남자들에게도 친절해야 한다'고 이야기한 부분은 이런 맥락이었을 것이다. 모두 그 나름의 이유가 있다. 먼저 그것을 인정하면서 시작해야 한다. 


 물론 쉬운 일은 아니다. 상대의 감정을 인정하면서 생각의 차이를 좁히는 것은 어려운 과정이다. 때로 그것은 내 감정에 오히려 충실하지 않거나 스스로 위선자가 되버리는 것 같은 좌절감을 느끼게 한다. '위선자가 되지 않으면서 나의 가치관을 유지하는 방법'은 우리 모두가 삶 내내 고민해야 할 주제일 것이다. 

저자는 에큐메니컬 문서 작성은 '무수한 논쟁과 대화의 과정이며, 불일치의 아픔과 이를 극족해나가는 감동의 과정'이라고 이야기한다. 우리가 공동체 안에서 가끔씩 느끼는 희열 또한 저런 것이다. 너와 내가 서로를 극복하며 다가가 손잡았을 때 느끼는 기쁨! 그 기쁨 소에서 느끼는 벅찬 두근거림을 알기에 모두 뼈아픈 대화들을 나누는 것이겠지. 



네번째 모임)

저자는 '보편적 경험'의 가능성에 의문을 제기하면서 지역, 성의 단위로 구분지어지는  정체성을 경계해야한다고 이야기한다. 

'같지만 다르다'는 것은 한 편으로는 배려이고 다른 한 편으로는 억압일 수 있다. 외부의 기준으로 누군가를 판단하여 대한다는 것은 일면 배려의 시도이나 그것이 그 당사자의 욕구에 반함에도 유지될 때는 폭력이 된다. 

내가 누구인지 스스로 알아갈 수 있는 자유!

그리고 그렇게 알아간 나의 욕구대로 삶을 선택할 수 있는 자유!

그 자유를 위해 페미니즘이 있다. 그리고 내 삶의 목적을 알고 스스로를 알아가는 과정에 종교도 있다. 

그래서 둘은 결국 같은 곳을 향하는 게 아닐까. 이 혼란스러움 속에서 자유가 탄생하리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