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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노래의 사는 이야기/하루歌

2017년 5월 月記

고래의노래 2017. 6. 14. 00:22

어이쿠나, 결국 게을러지는구나. 생각도 못했다가 5월이 끝난지 열흘이 지나서야 화들짝 놀라서 5월을 기록한다.

# 어디로...
5월의 황금연휴에 뭐할까 한참 전부터 고민하다가 결정한 곳이 강원도 인제 곰배령이었다. 남편의 휴가 일정을 정확하게 알 수 없어서 적어도 낀 연휴 중 하루는 쉬겠지 하며 경희님께 들었던 곰배령의 '고메똥골'을 예약했다. 곰배령은 예전에 타큐멘터리에서 본 적이 있다. 그야말로 '생'자연에서 살아가는 사람들의 이야기였고, 그 생자연이 얼마나 아름다운지 보여주는 프로그램이었다. 야생화 군락지여서 '천상의 화원'이라고 일컬어지는 곳에서 생명이 푸르게 퍼덕이는 5월의 자연을 누릴 수 있다면 그야말로 천국이 따로 없겠다 싶었다. 게다가 '하루 탐방객수 제한'이 있다하니 더 기대가 되었다.

안 막히면 3시간 반의 거리인지라, 중간에 어딜 들러야 하나 어쩌나 고민만 하고 있었는데, 출발하기로 한 바로 전 날 한국의 미세먼지는 최악이었다. 생명을 위협받는데 내가 정작 할 수 있는 일은 없고, 우울함과 무기력감에 빠져드는데 남편이 말했다. "떠나자, 어디든 여기보다 낫겠지."

그래서 갑작스레 떠나게 된 중간기착지 춘천. 여러 번 춘천을 와봤지만 이번에는 여느 떄와 달리 춘천의 매력이 진하게 느껴졌다.  소양강은 깨끗했고, 자전거길이 잘 조성되어 있었으며, 자연과 도시가 적절히 공존하는 느낌이 들었다. 급하게 잡은 게스트하우스의 이층침대에 첫째는 열광했고 자기가 가 본 숙소 중 최고라며 즐거워했다. 게스트 하우스 앞 산책로를 밤과 아침에 걸으며 계속 생각했다. '여기서 살아보는 건 어떨까?'

곰배령은 아름답고 심지어 제주처럼 이국적이기까지 해서 신비로웠지만 나는 춘천의 잔상을 떨칠 수가 없었다. '어딘가 다른 곳에서 살고 싶다. 내가 원하는 곳에서 여기저기 떠돌며 살고 싶다'는 마음이 커져서 제주도 이주를 다시 심각하게 고민하기도 하고 강릉, 춘천, 가평, 양평... 여러 지역들을 머리 속으로 빙빙 돌려보았던 5월이었다... 어디로...

# 견진교리 시작
작년에 신청했다가 허리 통증으로 중간에 포기했던 견진교리를 다시 듣기로 했다. 천주교 안의 성인식.
세례성사를 받은 후 바로 받는 걸 권유하기도 하던데, 개인적으로는 어느 정도의 신앙생활 후 다시 마음을 다잡는 기회로 삼는 것이 가장 좋다는 생각이다. 하느님에 대한 나의 믿음, 그리고 하느님과 나의 관계는 아직도 뿌연 안개 속이지만, 그리고 견진성사를 받는다고 해서 순식간에 이 안개가 걷히리라고 기대도 하지 않지만, 윤우가 첫영성체를 준비하는 이 때에 엄마가 견진성사를 받는 모습을 보여주는 것이 좋겠다는 생각이다. 모든 것이 명확해지고 단단해진 때에는 그 나름의 기쁨이 있을 것이지만 앞으로의 길이 멀고, 알 수도 없는 지금 이 상태로도 종교생활이 나에게 의미가 있는 것 같다.

# 기다림과 생명
작년에 막둥이 나무가 베어졌을 때 지금 이 모습은 상상도 하지 못했다. 막연히 '진짜 죽은 걸까? 그래도 뿌리는 있으니 살아나지 않을까?' 생각했었는데, 다시 봄이 오고 생명이 약동하는 5월이 되자, 막둥이 나무는 힘차게 다시 싹을 틔우기 시작했다. 놀라운 건 막둥이 나무 뿐 아니라 주변의 아카시아 나무 군락 자리에 새로운 아카시아 싹들이 그야말로 '우우우우우우우우!!!!!!!!!!!!!!!'하는 소리가 들릴 것만 같이 무성하게 자라기 시작했다는 거다.

사막새우가 생각났다. 바짝 마른 호수의 모래바닥에서 알상태로 몇 십년이고 견디다가 한 번 비가 내리고 호수 물이 조금이라도 차오르면 알은 바로 부화한다고 한다. 아카시아 나무가 이제까지 자기 아래 뿌려놓았던 씨앗들이 엄마나무의 그늘 아래에서 깊은 잠을 자고 있다가 찬란한 햇빛을 받고 기지개를 켠 것이다. 아카시아 나무가 베어진 그 곳은 예전보다 더 무성하고 빽빽하게 작은 아기 아카시아들로 가득찼다. 이 곳의 나무를 베어냈던 사람들이 다시 이 아기나무들을 베어갈까 걱정된다. 다음번에 혹시 벌목작업이 이루어진다면 주민센터든 시청이든 전화하리라.

기다림이라는 건 실로 위대한 일이다. 기다림은 포기와 다르다. '희망을 품고 견디는 것'이다. '희망고문'이라는 말이 있는 것처럼 이것은 견디기 어려운 고통이다.
모든 위대한 일은 기다림으로 시작되고 마무리된다.

역사속에서 인류의 진보는 지난한 기다림의 과정이었다. 같은 인간을 노예로 삼고, 여자에게 투표권을 주지도 않던 인류가 여기까지 왔다.
예수님은 '내가 다시 올 때까지 기다리라.'하셨다. 기독교는 희망을 품고 착하게 살고 사랑하며 '기다리는' 종교이다.
부모는 아이의 현재로 아이의 미래를 단정짓지 말아야 한다. 부모는 '기다려주는 사람'이다.

기다림은 결국 찬란하고도 아름다운 순간을 맞이한다. 위대한 기다림, 위대한 생명.. 나는 무엇을 견디고 기다려야 하나. 내가 품은 희망은 무엇일까. 막둥이는 또 나에게 무엇을 가르쳐줄까.

# 연기
주변 사람들에게 공공연하게 이야기하고 다녔었다. "나 연기가 하고 싶어!"
내안에 꿈틀대는 것들을 꺼내고 싶은 욕구가 있었다. 실제로 학교 안의 엄마들 연극모임에 가입가능 여부를 살짜기 알아보기도 하고 연기를 업으로 삼았던 엄마들에게 우리 학년 연극 동아리를 만들자고 여러번 꼬드기기도 했는데, 기회가 영 생기지 않았다.
그런데 이번에 성당 가족 한마당에서 짧은 연극을 위해 자원할 사람을 찾는다기에 두 손 번쩍!!! 주인공의 엄마 역이었고 딱 두번, 1분 도 안되는 시간 나오는 거였지만 조금 후련해졌다. 짧은 경험이었지만 무대에서의 동선, 대사할 때의 시선과 손동작까지 신경써야하니 '연기=감정' 이라고만 생각할 게 아니라는 걸 알게되었네. 아아아아아아, 막 분출하고프다. 또 연기하고 싶다.

# 회복적 써클 모임
회복적 써클이라는 갈등 조정법에 대한 강연 공지가 떴을 때 바로 신청했던 건 강렬한 하나의 목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두 아이의 싸움을 제발 멈추게 하고 싶다!'는 것. 강연을 들었다고 그 지식이 내 삶이 되는 것은 당연히 아니기에 연습모임을 꾸려가기로 결정되었는데, 그 모임지기로 추천된 여러 적임자들이 줄줄이 손사래를 친 덕에 나한테까지 추천이 오게 되었다. 강연 때 의심을 매단 질문들을 가장 많이 하고 삶 속의 갈등조율 실전에서도 엄청 실패를 경험했던 나이지만 '자격'의 문제가 아니라 나에게 온 '기회'라 여기고 흔쾌히 수락했다.

강연 때마다 창문에 붙어있던 문구인 '제 정신이 아니라는 것은 유사한 일을 계속 반복하면서 다른 결과를 기대하는 것이다'라는 문구가 강렬하게 마음 속에 남았다. 가던 방향이 아니라 방향을 틀고 달리는 연습을 해보자! 적극적으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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