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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로 사는 이야기/아이들이 자란다

아들의 첫사랑

고래의노래 2013. 8. 11. 13:18

요즈음에는 워낙 아이들이 빨라서 유치원에 가자마자 좋아하는 여자친구, 남자친구 만들고 서로 결혼하겠다고 약속하고 뽀뽀한다고 할 때, 속으로 내 아들만은 제발 안그러길...기도했다. -_-;; 결혼 후에도 이리저리 아들 일에 간섭하는 시월드 에피소드들을 들으면 분노 폭발하며 아들을 심적으로 독립시키지 못한 못난 시어머니들을 욕하곤 하지만, 아직까지는 내 품 안의 자식이요, 아들 맘 속 1순위를 다른 여자에게 뺏기는 일은 상상조차 하기 싫었던 것이다.

 

다행히 작년에 어린이집에 들어가서 윤우가 보여준 이성에 대한 관심이라고는 "서연 누나가 제일 예뻐." 정도였다. 그녀랑 어찌어찌 잘 지내고 싶다는 욕심도 없고 그저 누가 원에서 제일 예쁘냐고 물으면 머리가 긴 그녀의 이름을 대는 정도.

'결혼'이라는 단어를 쓰기 시작한 것도 자신의 단짝 남자친구랑 항상 같이 놀고 싶다는 의미에서였다. 그래서 굳이 이성끼리 결혼해야 한다고 가르치지도 않았고, 저런 이야기를 했을 때도 "보통은 남자, 여자끼리 결혼을 하는데, 남자들끼리, 여자들끼리 하는 경우도 있지."라고 얘기해주며 가볍게 넘겼다. 윤우에게 결혼은 '곁에 있으면서 계속 친하게 지내자는 약속' 그 자체였으니 말이다.

 

그런데...그러던 아들이 조금 달라졌다. 지난 달에 어린이집에 서원이라는 5살 짜리 여자아이가 새로 들어왔는데, 윤우는 서원이를 보자마자 눈을 떼지 못했다. 새로운 아이를 만나면 항상 경계하며 쉽게 다가서지 않는 윤우가, 얼굴에 미소를 띄며 주변을 맴도는 것이었다. '사랑에 빠지는 장면'을 라이브로 생생하게 보고 있는 느낌이었다.

 

서원이가 등원을 시작하고 며칠 지난 후에 그린 그림. 이렇게나 크게, 이렇게나 세심하게 사람 얼굴을 그린 건 처음이라 신기해하면서 누구냐고 물으니 "서원이야~" 이런다. @0@ "아~ 그렇구나. 눈이 동그란게 정말 예쁘네." 했더니 "아니야, 눈이 이~렇게 옆으로 길어. 그래서 예쁜거야." 란다. -_-;;; 디테일하구만.

 

그리고 또 며칠 뒤에는 이런 그림도 그렸다. "봄날이랑 서원이이야." (봄날은 서원이 엄마로, 윤우의 어린이집에서는 어른들을 모두 별명으로 부른다.) 자동차만 그리는 윤우를 인물화로 세계로 인도한 두 모녀! ㅎㅎㅎ 역시 사랑은 사람을 바꿔놓는다.

 

예쁜 서원이가 어린이집에서 함께 하게 된 이후로 윤우는 이성에게 부쩍 관심이 늘었다. 특히나 '예쁜' 이성을 좋아하는데 예쁘다는 기준이 꽤나 전형적이어서(어른들이 보기에도 고개가 끄덕거려질 만큼) 놀랍다. 역시나 미의 기준이라는 것이 문화와 시대를 뛰어넘어 인류의 무의식에 각인된 부분도 있나보다 싶기도 하고.

 

"나 이층버스가 좋아. 거기에서 부채 나눠주는 누나가 예쁘거든"

"던킨 도너츠에서 도너츠 주는 누나가 예뻐. 그리고 상냥하게 인사도 해줘. '어서오세요~ 던킨도너츠입니다~~~~'하고"

 

예쁘다는 기준에는 긴머리가 꽤 중요한 역할을 하는 것 같다. 예쁘다고 하는 사람들을 보면 항상 머리가 길다. 내가 머리를 묶고 있으면 "머리 풀러. 그게 더 예뻐!"라며 자꾸 머리끈을 잡아뺀다. 남편이 긴머리 청순녀를 좋아하는 스타일도 아니었고 그래서 당연히 나도 그 기준과는 거리가 먼데, 긴머리 그녀들에게 빠지는 아들을 보면 너무 신기하다. ㅎㅎ

 

"얼마만큼 예쁘냐면..엄마만큼 예쁜 것 같아."

아직까지는 이 한마디가 보태져서 그나마 꾸역꾸역 서운함을 달래고 있다. ㅋㅋㅋ

 

"내가 나중에 커서 타고 싶은 차는 이런 차야." 라며 윤우는 뒷부분이 각진 커다란 자동차를 그렸다. 문은 옆으로 스스륵 열리게 되어있고, 사이드 미러에는 멋진 깜빡이등이, 자동차 뒷면 지붕 쪽에는 작은 브레이크 등이 달려 있어야 한단다. 이제까지 다른 자동차들을 관찰하며 멋지다고 생각한 요소요소를 다 가지고 있는 윤우의 'Dream Car' ^^

 

"나중에 같이 사는 사람이랑 함께 타고 다닐꺼야."

- 너 나중에 아빠 죽으면 엄마랑 결혼하다며?

(조금 당황하며 비실비실 웃는다) "응~ 그래도 엄마가 계속 살지는 않잖아. 엄마도 죽고 아빠도 죽게 되면 같이 사는 사람말이야. 그리고 엄마가 먼저 죽을지 아빠가 먼저 죽을지는 모르는거잖아"

 

나보고 엄마도 나중에 죽게 되냐며 죽지 말라고 울부짓던 그 아이가 정녕 네가 맞단 말이냐? ;;;; 심지어 내가 먼저 죽어서 다른 사람과 일찍 맺어질 가능성까지 언급하는구나. ㅠ.ㅜ

 

 

"엄마, 나는 서원이랑 같이 살고 싶어. 서원이랑 쌍둥이가 되고 싶어."

아들의 사랑은 소유가 아니라 '항상 곁에 머물고 싶은 감정'이다. 그렇기에 그 친구가 나에게 큰 관심이 없더라도 서운하거나 슬퍼하지 않는다. 같이 놀면 즐겁고 우리집에 초대하고 싶고, 만나면 너무 반갑고. 오직 그 애를 향한 마음에만 집중하는 순수함이 너무 예뻤다.

(그런데 며칠 전에 아이 아빠들이 서원이를 같이 좋아하는 친구와 윤우에게 '서원이는 한 명인데 어쩌려구?'라는 식으로 아이들에게 농담을 하며 어른들끼리 키득거린 일이 있었다. 친구를 '내 꺼, 니 꺼'로 가를 생각도 없었고 이제까지 그런 구분없이 잘 놀기만 하던 아이들이었는데 말이다. 결국 '누구꺼다'라는 식으로 경쟁하다 한 아이가 울고 말았고, 나중에 이 사실을 안 엄마들은 크게 화가 났다. 아이들의 감정을 어른들의 시선에서 농담꺼리로 만드는 일은 없어야겠다. 이제까지 같은 여자아이를 좋아하면서도 잘 놀던 아이들이었는데 괜히 관계가 이상해질까 걱정이 된다.)

 

이렇게 아이는 점점 부모를 벗어나 또래 속으로 들어가고 있다. 부모와 자식 관계처럼 어쩔 수 없는 인연의 끈 때문이 아니라 '마음'이 이끄는 곳으로 가 손내미는 관계를 시작하는 것이다. 뜨거운 희열과 차가운 상처가 공존하는 사랑과 우정 안으로 들어가는 윤우를 응원한다. 화이팅! 내 아들의 첫 사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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