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엄마로 사는 이야기/아이들과 책읽기

[윤우책] 나의 사직동 : 사라진 '마을'에 대한 이야기

고래의노래 2012. 2. 25. 02:34
참 색다른 주제의 그림책이다. 아이들에게 이야기해 주기에는 제법 묵직한 주제인 '재개발'을 이야기한 흔치 않은 그림책. '집'을 그리라는 말에 '아파트'를 그리는 요즘 아이들에게 집과 동네, 마을이란 것이 어떤 것인지 그림으로나마 알려주고 싶은 마음이다.

나의 사직동 - 10점
한성옥 그림, 김서정 글/보림


사직동, 찾아보니 광화문에서 경복궁을 바라보았을 때 경복궁 왼편에 있는 동네이다. 결혼기념일에 남편과 거닐었던 효자동의 옆 동네인 것 같다. 경복궁이라는 제일 큰 문화사적과 인왕산, 청와대 부근이라는 점 때문에 주변 지역은 아직도 재개발이 막혀 다행스럽게도(!) 옛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데, 효자동이나 부암동의 모습이 옛 사직동 모습과 비슷하지 않을까 짐작해 본다.
 
이 책을 김서정과 함께 쓰고 그림을 그린 한성옥은 자신의 어린 시절 경험을 토대로 이 책을 지었다고 한다. 실제 경험을 바탕으로 한데다 독특한 화법의 그림까지 더해져서 이 책을 읽다보면 한권의 다큐멘터리 필름을 보는 듯한 느낌이 든다.
 


그림인듯 사진인듯 픽션인듯 논픽션인듯 이야기와 그림이 모두 경계를 넘나든다. 사진을 바탕으로 그림을 그리고 색을 입혔는데 그 독특한 기법이 그림책 내용과 참 잘 어울린다. 기억을 더듬는 옛이야기를 들으면서 빛바랜 사진첩을 들춰보는 기분이 든다.
동네나이만큼이나 나이가 든 할머니와 햇볕 좋은 날에는 온갖 나물을 말린다는 나물 할머니, 동네 아줌마들의 파마를 공짜로 해주시는 파마 아줌마와 팔 하나가 없는 재활용 아저씨, 맛집으로 소문난 골목 안 해장국집까지 동네 안에 피어나는 다채로운 빛깔의 삶과 사람들 이야기가 페이지, 페이지마다 따스하게 그려진다.


이렇듯 정겹던 동네 사람들이 서로 언성을 높이고 시름이 깊어지기 시작하는 건 재개발에 대한 소식이 들리고 어른들이 '무슨 회의'인가로 바빠질 무렵이었다. 동네 모습도 슬금슬금 달라지기 시작한다. 조그마한 가게들이 점점 문을 닫고 부동산으로 변하기 시작한 것이다. 늦가을 어느 날 반장 할아버지 생신날에 마을 사람들이 모두 모여 잔치를 하는 것을 마지막으로 사람들은 뿔뿔이 흩어지게 된다.


아파트에 사는 친구들이 부럽기도 했던 '나'는 아파트가 들어선다는 이야기에 조금은 설레인다. 하지만 우연히 들여다본 공사장 너머에서 자신의 추억이 쇠갈키 손에 모두 사라졌음을 확인하고는 깊은 우울에 빠진다.
새로 아파트가 들어서고 '나'는 내가 살던 바로 그 사직동에 여전히 살고 있지만 '나의 사직동'은 이제 어디에도 없다는 걸 깨닫는다. 

 
누구나 어린 시절 마음 한켠에 고향으로 이름 붙인 지역이 있을 것이다. 나에겐 어린시절의 배경이 두 곳으로 나뉜다. 초등학교 때까지 지내던 청주 봉명동과 중학교, 고등학교 시절을 보낸 청주 개신동. 시간으로는 약 6년씩 거의 비슷하지만 개신동에서의 추억은 거의 없다. 이 때의 추억은 모두 학교에 몰려있기 때문이다.

봉명동은 그 당시 한국주택공사가 대규모로 지은 아파트 단지였다. 딱 아파트 건설붐이 일었던 시절이었던 것 같다. 동네에는 사람들과 아이들이 넘쳐났고 하나 뿐이었던 초등학교는 과밀학급에 허덕대다 오전반, 오후반으로 나뉘어 수업을 할 지경이었다. 아파트의 한 라인에 살고 있는 아이들은 물론 모두 친구였고 이웃들은 서로를 잘 알았다. 매달 아파트 복도 물청소를 하던 주말도 기억난다. 맨 꼭대기 5층에서부터 물이 흘러내려오기 시작하면 모든 집에서 빗자루와 호스 하나씩을 들고 나와 복도를 청소하는 거였다. 지금의 아파트를 생각하면 감히 상상도 할 수 없는 장면이다. 황금같은 주말 아침에 모두 합심하여 빗자루를 들다니! 강제로 시키는 사람이 있었던걸까? 벌금 제도가 있었을까? 있었다면 그 관리는 누가? 생각할수록 궁금해진다. 어쩌면 그 모든 게 새마을 운동 시절이었기에 가능했던 건 아닐지. ^^;; 

그 곳에 내 어린시절을 두고 왔기에 가끔 향수에 젖어 다시 찾고는 했다. 그런데 지난 번 남편과 함께 봉명동을 찾았을 때는 생기를 잃어버린 동네 모습에 많이 놀랐었다. 25년이 넘었지만 모든 것은 옛 모습 그대로였다. 심지어 놀이터의 놀이기구마저 내 어린시절 그대로였다. 하지만 옛 모습은 추억을 되살리는 것이 아니라 슬픔을 일으켰다. '관리'없는 '보존'이었다. 더 이상 애정이 보태지지 않은 공간은 썩어가고 있었다. 마을은 늙고 지친 몸을 아무렇게나 늘어뜨린채 처분만을 바라고 있는 듯 했다. 스산한 폐광촌의 분위기마저 들었다.
나중에 알아보니 이 곳에 재개발이 추진되고 있다고 한다. 마을에 생기가 없는 이유가 이 때문이었다. 이 곳에 애정을 쏟는 사람들이 더 이상 없었던 것이다. 이제 이 곳은 투기관심지역일뿐 거주관심지역이 아니었다. 삶의 공간이 아니라 돈의 대상이 되어버린 마을은 퍼석하게 말라버렸다.  

책 속의 사직동과 달리 이 곳의 재개발이 아쉬운 건 그저 나의 개인적인 감상일 뿐이다. 어짜피 도시화의 단계에 들어서 있던 동네이기에 보존해야할 가치가 있는 지역이라고 보기는 어렵다. 오히려 노후된 아파트를 재건축하는 것이 안전상 더 맞는지도 모르겠다. 다만 내가 뼈저리게 느낀 건 공간이 사람들에게 주는 영향만큼 사람들이 공간에 불어넣는 영향력 또한 대단하다는 사실이었다. 사람의 손길이 닿지 않은 자연은 그 자체로 더욱 아름답지만 사람들이 마땅히 있어야할 공간에 사람들의 손길이 멈추면 그 곳은 빛을 잃어버린다.


이 책에서 윤우가 가장 좋아하는 부분은 "계영이 왔냐아? 뭐 주까아?"라고 말꼬리를 길게 빼며 슈퍼 아저씨가 주인공 아이에게 사탕을 쥐어주는 장면이다. 요즈음 윤우에게 사탕은 진리이다. 그런데 사탕을 공짜로 받는 장면이라니! 이건 하느님에게 은혜를 입는 거나 다름이 없으리라. ㅋㅋ
오며가며 아이 머리 쓰다듬어 주시는 어른들이 있는 마을을 꿈꾸지만 대규모 아파트단지에서는 아직 요원한 꿈이다. 대신 요즈음 윤우는 세차장, 주유소 아저씨들과 친구가 되었다. 작년 봄부터 세차장에 출근도장을 찍었으니 이제 거의 일년이 다 되어간다. 세차장 아저씨는 물론이고 세차장 옆 주유소의 아저씨들도 '우리 주유소의 마스코트'라며 윤우가 가면 음료수를 하나씩 쥐어주신다. 가족이 아닌 어른들로부터 관심과 사랑을 받는 이 느낌을 윤우가 오래 기억했으면 좋겠다.

몇년전부터 나의 관심은 작은 마을 공동체에 쏠려 있다. 작은 도서관과 공동육아, 생협에 대한 관심도 결국은 마을로 향한 길에 있는 가지들이다. 사람들이 모여 공간에 손길을 더하다 보면 그 곳이 어느 새 작고 따뜻한 마을이 되어 있겠지. 마을의 씨앗이 될 따뜻한 한 사람이 되어 보자. 그것이 지금 내가 할 수 있는 마을 만들기의 시작일테니.