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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래노래의 사는 이야기/하루歌

2017년 10월의 月記

고래의노래 2017. 11. 11. 09:06

 10월은 폭풍같은 한달이었다. 여기 저기서 계속되는 모임들과 거기에서 부여되는 역할들로 정신없이 바빴다. 사람들을 모으고, 진행하고, 나온 이야기들을 갈무리하고, 이야기 안에서 의미를 찾아내는 일들을 했다. 제대로 쉬지 못하면서 몸의 에너지가 다 빠져나가고 방전된 것 같은 느낌마저 들었는데, 목이 붓다가 목소리가 일주일 넘게 잘 나오지 않았다. 다행히 마음은 충만했다. 그 일들을 즐겼고, 결과에 대한 반응과 평가도 좋았다. 

 다만 내가 주도적으로 상황을 변화시킬 수 없는 유일한 모임그룹이었던 성단 복사자모회에서는 내내 불편함을 느꼈는데, 내 안의 무언가를 깨뜨리고 성장할 수 있는 기회로 삼아보려 한다.



1. 회복적 써클에서 나를 돌아보다


 회복적 써클 심화반 수업이 시작되었다. 지난 기초과정에서 회복적 써클이라는 공동체 대화법을 접했고 알듯말듯 잡힐듯 말듯한 이 방법론에 호감을 갖게 되었다. 사실 심화과정까지 등록하게 된 건 기초과정연습모임에서 맺어진 수연님, 경미님, 우혁애미와의 인연의 힘이 크기도 했다. ^^

 비폭력대화와 방법적인 면에서는 같은 듯하면서도 회복적 써클은 훨씬 영적이라는 느낌이 든다. 방법론보다는 철학, 가치관이라는 생각도 들고. 내 안의 지식과 힘이 아니라 사람들 사이에서 만들어지는 지혜를 믿는 것, 어느 누구도 배제하지 않고 가치있게 대하며 모임 안의 기여자로 받아들이는 것, 표면적인 말 이면에 숨겨진 진심을 바라보는 연습과 말의 힘을 자각해보는 연습을 통해 진정한 대화로 나아가는 것. 나의 삶 안에 녹이고픈 가치들이 참 많다. 


 회복적 써클에서는 말의 힘을 이야기하면서 제대로 질문하는 것과 나-중심이 아니라 모임-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에 대해 강조하는데, 모임 중심으로 이야기하는 것이 무얼 말하는지 사실 와닿지 않았다. 그런데 심화과정 첫 시간에 그것에 대해 배울 기회가 있었다. 모임을 안전하고 편안하게 만들기 위해 우리가 지키면 좋을 약속을 정할 때 나는 '지각하지 않기'를 이야기했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조금 당황하시면서 "모임을 제 시간에 시작했으면 좋겠다는 말씀이신거죠?"라고 바꿔이야기하셨다. 그제서야 나는 차이를 알게 되었다. 같은 의미를 전달하되 아무도 상처입히지 않으면서 이야기하는 방법에 대해 깨닫게 되었고, 내가 평소 말하던 방식에 대해서 되돌아보게 되었다. 


 또 한 번은 선생님께서 연습모둠을 지정해주시지 않고, 마음에 두었던 사람에게 가서 청하라고 하셨는데, 이렇게 하게 되면 선택되지 않는 사람이 있을 수도 있다는 생각이 들어 나의 이런 우려를 말씀드리고 지정해주시지 않는 특별한 이유가 있는지 여쭤보았다. 그러자 선생님께서는 방법은 열어둔 것이니 스스로 원하는 쪽으로 선택하면 된다고 하셨고, 그 말을 듣자 내가 제시된 언어에 갇혀서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부분들에 대해 미처 깨닫지 못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아마도 생활 속에서 많이 이런 식으로 사고하고 있을 것이다. 그래서 작은 것에 분노하는 것일 수도 있고. 

아는 것이 반? ㅎㅎ 나를 성장시키는 경험들이 고맙다. 



2. 모임의 중심이 되는 경험들을 하다.


 어쩌다 보니 모임의 중심이 되는 기회가 잦았다. 둘째의 어린이집에서는 원의 운영방식에 대한 선생님과의 소통 문제가 떠올라 부모들끼리 모여 의논하고 문제해결을 하고자 모이게 되었다. 이 과정에서 문제제기를 한 사람이 내가 아님에도 -ㅂ- 내가 모임날짜와 장소를 정하고 밴드를 따로 만들어 모임 후 이야기 내용을 정리해 올리는 일을 맡게 되었다. 회복적 써클에서는 선생님께서 안계신 한 회에서 내가 진행을 맡았다. 진행하는 내내 굉장히 미숙했지만 여신모임의 경험덕분에 모임을 마무리하면서 의미를 찾고 축하하는 일을 자연스럽게 할 수 있어서 다행히 잘 마칠 수 있었다. 


 경험은 확실히 나를 성장시켰다. 나쁜 일이라도 하라던 니체의 말은 의미가 있다. 여신모임 동안 모임내용을 복기하며 글로 정리하는 작업을 내내했던 덕분에 다른 모임에서도 따로 노트에 일일이 쓰지 않아도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떠올리며 정리하는 것이 어렵지 않고 편안했다. 글로 정리를 하는 것은 게다가 그 모임의 내용과 의미를 온전히 이해하게 하는 힘이 있었다. 글로 내생각을 정리하는 것이 즐겁다. 

 물론 모임에서 나온 이야기들을 과연 내가 객관적으로 기억하고 전하고 있는지에 대해서는 아직 자신이 없긴 하다. 객관적으로 현상을 바라본다는 것이 힘든 만큼 힘든 일일 것이다. 이에 대한 두려움도 모임멤버들에게 오픈하여 나눈다. 그러면서 나와 모임이 함께 크는 것 같다. 



3. 빛나누기 준비로 창의력을 발휘하다


 빛나누기 준비팀을 나눌 때 나는 빛나누기 당일에는 이솔이를 챙겨야 할 것 같아 깊은 생각없이 온라인팀에 손을 들었다. 우리 학년에서 준비하기로 한 라이트하우스와 학교티가 사실 다 내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라면 사지 않을 아이템들이었기 때문이다. 그래서 열정적으로 마음이 내지지 않았지만 온라인팀은 티셔츠부분에만 있었기에 티셔츠팀에 들어가게 되었다. 그래서 온라인 홍보, 주문, 접수를 담당하게 되었는데 그 일을 하면서 기대하지 않았던 뿌듯함을 느꼈다. 일단 나는 온라인 선주문 글을 딱딱하게 쓰고 싶지 않았고, 최대한 가볍고 재밌고 발랄하게 접근하고 싶었다. 학교티셔츠에 대해서 긍정적인 평가를 내리던 때가 아니었는데도 이렇게 작업을 한 것이 지금 생각하니 대견하네..ㅋㅋ 그 글에 대한 반응이 좋아서 2차 후드 선주문글, 이벤트 알림글, 빛나누기 후 이벤트 마무리 보고글까지 재미있게 작업했다. 주문수량 체크하느라 오랫만에 엑셀도 써보았다. 홍보글 쓰다보니 예전에 회사에서 이벤트 페이지 만들던 생각이 났다. 그 때에도 창의적이라고 평가받으며 이벤트 페이지 대부분을 담당하곤 했었는데..


 오랫만에 일 그리고 성과, 결과에 따른 평가라는 과정 안에 있어보았고, 나의 능력에 대해 피드백받고 자존감이 높아지는 경험을 다시 하게 되어 좋았다. 일하는 엄마들이 느끼는 감정이겠지. 앞으로 어떻게 또 이러한 욕구를 채울 수 있을까.



4. 여신모임을 계기로 새로운 만남을 가지다. 


여신모임은 나에게 새로운 경험도 안겨 주었다. 내가 궁금하다며 연락을 하고 냇물아로 나를 만나러 오신 분이 계셨다. 자기가 속한 모임에서도 여신모임같은 모임을 하고 싶다며 내가 이 모임을 꾸리게 된 계기, 현재 모임의 상황, 모임을 꾸리며 겪은 어려움 등 전반적인 이야기를 듣고 싶어하셨고 즐겁게 이야기를 나누었다. 내가 하고 있는 일들로 누군가가 나를 궁금해하고, 그 일들에 의미를 부여해준다는 것이 매우 기분좋았고 뿌듯했다. 뻗어나가는 느낌. 아! 그 만남에서 내 목소리가 좋다는 이야기를 들었다. 내 생애걸쳐 처음 들어보는 이야기! @0@



5. 내 자신의 경제적 가치를 세워가는 과정.


 여신모임으로 작게나마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내가 내 자신의 경제적 가치에 대해 돌아보면서 정의내리고 기준을 세우는 작업이 진행되고 있다. 여신모임을 시작하면서 나는 모임비를 받는 모임지기로서 나의 역할에 대해서 생각해보게 되었다. 전문 경력이나 학력이 없는 나를 믿고 멤버들이 돈을 낸다는 것의 의미가 굉장히 무겁게 다가왔고 이 모임에 대해, 나에 대해 어떤 기대를 가지고 있을까에 대해 끊임없이 생각하게 했다. 


 게다가 내가 이것을 나의 컨텐츠라고 했을 때 그 컨텐츠가 존중받고 보호되어져야 하는 수준은 어느 정도이며, 나는 어떠한 행동을 취해야하는가에 대한 질문이 올라왔는데, 아직까지 명확한 답은 떠오르지 않는다. 보다 많은 사람들에게 도움이 되는, 연결이 되는 방향으로의 전개를 원하면서도 그것이 나의 가치를 훼손하는 않는 수준이라는 건 어느 지점일까? 어쩌면 그건 경험을 쌓을만큼 쌓은 내공자들만이 편안하게 정의내릴 수 있는 경계인 것 같기도 하다. 나의 목표와 나의 욕망들을 좀 더 들여다봐야겠다.



6. 나의 종교가 나를 시험할 때


 윤우가 복사단에 들어간 이후 나는 복사자모회에 속하게 되었고, 그 안에서 예상되었던 혼란을 겪고 있다. 

 나는 하느님의 사랑을 매우 포괄적으로 해석한다. 그것은 모두가 사랑받아야 마땅한 존재라는 것, 그래서 우리가 서로를 판단할 수 없고 다만 서로의 눈물을 닦아주고 안아줄 수 있을 뿐이란 것, 가장 고통받는 사람들 옆에 함께 할 것. 이것이다. 하지만 같은 종교 안에서도 종교교리라는 이름 아래 이를 해석하는 방법들이 가지가지이며, 심지어 성서의 텍스트에 기초하여 매우 좁게 해석하는 사람들도 많다. 나는 기독교가 동성애, 여성, 낙태 등의 문제에 대해 취하고 있는 탄압과 단죄에 반대한다. 그리고 그것이 내 종교에서 신이 원하시는 바가 아니라고 굳게 믿기에 아직 성당에서 기도하는 것이다. 


 복사단 단테카톡방에 '낙태죄 폐지 반대' 온라인 서명에 동참해달라는 톡이 왔다. 아무도 답하진 않았지만, 난 매우 답답했다. 또 신부님 사제 서품 기념식 화동에  '가장 어린 복사 여자아이' 중 누군가가 지원해달라는 톡이 왔다. 화동이 가장 어리고, 게다가 여자아이여야 할 이유가 뭐지? 속에서 욱하고 올라왔다. 

 성당에서 일할 사람이 없다며 봉사를 은연 중에 강요하고, '복사단 조직활동에 불참할 경우 다음달 복사 1회 추가'라는 벌칙을 달아놓고 이걸 벌로 느끼지 말고 은총으로 여겨달라고 한다. 나는 동의할 수 없었다. 엄연히 규칙 속에서 벌이라는 개념으로 집어넣어 놓고 다르게 해석하라니. 소수의 봉사자들이 어렵게 활동을 이어오는 과정에서 지치고 상처받은 마음에 분위기가 경직된 것 같다. 내가 종교모임 안에서 기대했던 따뜻함은 전혀 없었다. 오로지 의무와 책망 뿐. 


 난 세상의 모든 종교가 이야기하는 것은 결국 모두 하나라고 생각한다. 하지만 기독교가 보다 실천의 종교이며 연대의 종교라고 여겼기에 다른 종교가 아닌 기독교를 선택했는데, 마음이 심란하다. 내가 내 종교그룹 안에서 자연스럽게 내 목소리를 낼 수 있으려면 다른 분 말처럼 내가 그분들이 요구하는 의무를 성실히 이행한 이후여야 할까? 경험 속에서 나만의 답이 찾아지겠지.




효우언니는 내가 많은 일들을 한꺼번에 해내는 것이 대단하다면서,  어느 한 쪽 일에서 오는 스트레스나 감정적인 불편함들이 다른 쪽 일에 전혀 영향을 미치지 않게 진행하는 것이 놀랍다고 했다. 그러면서 어쩌면 그것은 지금 이 순간에 집중하는 현존의 능력 아니겠냐고 농반진반으로 이야기했는데, ㅎㅎ 무언가 하나를 할 때 엄청 산만하고 시간 많이 걸리는 걸로 봐서 현존은 아닌 듯 하고, 의무감일까? 아니면 인정받고 싶은 욕구? 그러고 보니 고 3 때 엄청 속상한 일이 있어서 수업시간에도 계속 울 정도의 상태였는데도 시험공부를 했던 기억이 난다. 이쩌면 오히려 순간에 집중하지 못하는 걸지도.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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