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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빨래하는 페미니즘> 좌절하지말지어다!

고래의노래 2017. 1. 2. 10:51
빨래하는 페미니즘 - 10점
스테퍼니 스탈 지음, 고빛샘 옮김, 정희진 서문/민음사

* 대통령이 '여성'이기에 일어난 진짜 문제들

 11월 말과 12월 초를 지나면서 나라에 광풍이 일었고, 이제까지 꾹꾹 눌러져왔던 사회의 썩은 부분들이 한꺼번에 밖으로 터져나왔다. 그 썩은 부분들에는 2016년 한 해동안 계속 이슈가 되어 왔던 '페미니즘'도 있었다.

 논란의 중심에 있는 대통령이 여성이기에 문제가 되는 상황들이 터져나왔다.
대통령의 문제들이 '여성'이라는 카테고리 안에 갇힌 채 좁게 해석되고는 했고, 대통령을 비난하는 말들이 여성혐오욕설과 여성비하용어들 안에서 팝콘튀듯 증폭되었다. 이렇게 페미니스트 단체들이 대통령을 여성이라는 프레임 안에서 탈출시키려할 때 정작 대통령 본인은 '여성의 사생활'이라는 변호인의 말을 통해 그 안으로 도로 들어가버리기도 했다.

 그런데 여성혐오욕이 있다면 남성혐오욕도 존재할까? 갑자기 궁금해졌다. 성적인 구분으로 누군가를 욕한다면 그건 모두 '@성혐오욕'이 아닐까. 사회적으로 여성이 남성과 균등한 선상에 놓여있기 않기에 '성적인 욕'이 자연스레 '여성혐오욕'이 되는 걸까. 아니면 '성적인 욕' 자체가 문제인걸까.


* 니편 내편의 흑백 프레임

 박근혜 퇴진 촛불시위에서는 '수취인분명'이라는 곡을 노래하기로 한 DJ DOC의 공연이 이루어지지 않았다.
노래 가사 중 '미스박'이라는 부분이 여성비하적이라는 지적이 있었기 때문이다.
이에 대한 갑론을박은 정말 뜨거웠다. '미스', '세뇨리따'라는 용어가 여성을 결혼여부에 따라 재단하는 말이어서 여성비하적이라는건데 개인적으로는 공연 중단을 요청할만큼의 수위는 아니라고 본다. 이 용어가 우리사회에서 흔하게 통용되는 용어가 아니기에 사회적 체감도가 낮다고 생각한다. (몇십년 전보다는 훨씬 덜 사용하는 말이라고 본다.)
 DJ DOC가 이 논란 때문에 해당 곡이 아닌 다른 곳으로 노래를 하거나 해당 가사를 빼겠다고 제안했는데도 그들이 무대에 오르는 것을 반대한 것에는 또 여러가지 의견이 있을 수 있다.
하지만 이 요청을 한 단체를 지지한다. 왜냐하면 사회적 의식의 진보는 이렇게 사소한 부분이라도 민감하게 건드려주는 단체들의 힘이라고 생각하기 때문이다. 그래서 그 요청을 받아들인 촛불시위공연의 주체 측의 결정에 감사했다. 주체 측은 시민자유발언 때에도 여성, 장애인 비하에 해당하는 용어 사용에 대해 미리 주지를 시킨다고 한다.

 그런데 이 사실이 기사로 나가자 대통령의 퇴진을 요구하는 사람들 사이에서 격렬한 반응들이 나왔다. 그 페미니즘 단체에 대해 '친박페미'라는 용어를 써가며 바로 우리가 그렇게도 진저리쳤던 '프레임 가두기'에 나선 것이다. 그 흔한 종북 프레임에서 지겹도록 보았던 '온전한 내 편이 아니면 넌 반대편' 논리였다.

 이 책에는 비슷한 내용이 나온다.
 여자들을 '번식 생물학의 압제'로부터 해방시키자며 인공생식론이라는 파격적인 주장을 펼쳤던 급진파 페미니스트 슐라미스 파이어스톤의 경험이다. 
 그녀는 '민주 학생 연합' 소속 메릴린 살즈먼 웹과 워싱턴에서 열린 대통령 취임 반대 및 베트남전 반대 시위에 참가했다. 하지만 이들이 단상에 올라가 '여성의 억압'에 대해 이야기하기 시작하자, 남자들은 온갖 욕설과 협박, 성폭력적인 욕설을 퍼부었다. 체제를 바뀌보자고 함께 싸우던 진보적인 동료들에게 그런 꼴을 당한 것이다.

 현주언니가 이야기했듯이 내가 저 사람을 바라볼 때 불편한 지점이 있다면 분노와 혐오의 틀에 가두기 앞서 '그게 왜 그럴까'에 대한 성찰이 있어야 한다. 우리가 예전에 함께 읽었던 분석심리학에서 이야기한 '투사'의 개념을 굳이 들먹이지 않더라도 그게 나에게 더 생산적인 방향이기 때문이다.

 나 또한 반성해본다. 대통령을 지지하는 사람들에 대해 내가 가진 시선을 다시금 되돌아본다.


* 가사도우미에 대한 페미니즘 해석

 이 책에서 나온 이야기 중 우리의 관심을 끈 또 하나의 주제는 '가사도우미'였다. 

   '육아와 가사노동은 여자들을 연대하게 만들어주는 주제였습니다. 2세대 페미니즘은 그러한 연대의 힘을 바탕으로 탄생했습니다. 하지만 이제 가사노동은 인종과 계급을 나누고 이민자와 비이민자를 가르는 요인으로 작용하고 있습니다.'
  '경제적 능력이 있고 그럴 의향이 있는 사람들은 프리단의 조언에 따라 전통적으로 여자들에게 떠넘겨졌던 가사와 육아를 수행할 다른 여성들을 고용한다. 하지만 그런 방식은 불운한 계층의 여자들에게 의존해야만 한다는 점에서 소수만으로 위한 페미니즘이라는 비판을 받는다.'

 남성들과의 평등을 주장하며 자신의 능력을 사회적으로 발휘할 기회를 얻은 여성들이 가사와 육아일을 경제적으로 낮은 계급의 여성들에게 전가하고 있다는 것이다. 겉으로 보이는 여성들의 지휘향상이 결국은 또다른 여성들의 희생으로 얻어진 것이라는 모순적 상황!

 이 문제가 거론되었을 때 처음 나와 우리 모임벗들이 생각한 것은 하나같이 똑같았다.
 "그럼 어떡해!!!!"

 이 책에서 이야기하는 것처럼 '또다른 계급화'의 문제로 단정하기에는 미국문화와 한국문화의 차이가 존재한다고 생각한다. 이민자들의 나라인 미국에서는 백인중산층과 이민자들의 계급이 명확하지만, 한국에서는 가사도우미로 일하시는 분들이 '경제적으로 낮은 계층'이라고 단정지을 수가 없을 것 같다. 물론 아주 부유하지는 않겠지만 오직 그 일이 생활비의 전부인 경우와 함께 부업인 경우도 상당수 있는 것 같다. 자식들을 어느 정도 키우신 중장년 여성분들이 자식들 학원비, 손자들 용돈에 보태겠다며 나서시는 경우도 많은 듯 하다. 물론 이 경우에도 부업의 선택지가 한정적이었다는 상황 자체는 문제시될 수 있겠다.

 정서적인 면에서 보았을 때도 우리나라와 미국은 다를 것 같은데, 우리나라에서는 (내 경우와 주변의 지인들의 경우) 오히려 가사도우미분께 너무 고마워하는 분위기이다. 내가 할 일을 당신에게 떠넘긴 죄책감마저 느끼며 가사도우미를 고용하고 심지어 한참 윗 나이인 가사도우미, 육아도우미 분께는 나이의 위계질서에 따라 '시어머니'급의 스트레스를 받기도 하는 것 같다. 이렇게 가사도우미를 고용하는 입장의 여성들이 가지는 죄책감 또한 뒤틀린 사회구조와 인식이 부른 병폐라고 생각한다. 


* 모르는 사이에 공범이 되 버린 우리들

 그러면 직장맘이 또다른 사회계급화를 양산하지 않고, 어느 누구에게도 억지 의무를 강요하지 않은 채, 죄책감도 느끼지 않는 방법을 어디서 찾을 수 있을까?
가사와 육아도우미의 역할이 한 쪽 계층으로 몰리게 하지 않으려면 개인의 힘만으로는 불가능하다. 사회인식 뿐 아니라 사회 시스템적인 변화가 필요하다. 한 사람 한 사람이 자신 스스로의 욕구에 정의롭게 부합하며 살아가려면? 이라는 질문을 쫓다보면 결국 사회혁명을 꿈꿨던 마르크스 같은 이상주의자들에게 닿게 되는 것이다.

 우리가 답답한 부분은 딱 이 지점이다. 무언가 배우고 깨달을 때 우리가 알고 싶은 부분은 그게 내 삶에서 어떻게 구현되어야 하는지에 대한 물음이다. 모두에게 온전히 정의롭지 못한 현실에 대해서 알고 있는 것만으로 괜찮은걸까?

 책에는 이런 부분이 나온다.
 추수감사절 연휴에 저자는 가족과 함께 친정 엄마의 집으로 가서 며칠 지내는데, 그 사이 밀린 일들 때문에 연휴를 가족들과 즐기기는 커녕 계속 일만 하게 된다. 이 상황을 지켜 본 친정 엄마는 "실비아(저자의 딸)가 안됐구나. 기껏 가족끼리 연휴를 즐기러 왔는데 엄마는 코빼기도 못 보잖니."라는 말로 저자의 속을 뒤집는다. 그도 그럴것이 친정 엄마는 기독한 일중독이었고 그래서 유년기의 저자를 많이 외롭게 했던 장본인이었기 때문이다.
그런데 아래의 말을 들은 후 뾰족해졌던 저자의 마음이 가라앉는다.

 "실비아가 널 그리워하는 게 느껴지더구나"

 저자는 아래처럼 써놓았다.
  '어머니에게 비수를 꽂을 말을 준비하던 중 갑자기 전투적인 마음이 싹 가셨다. 우리 대화가 사실은 실비아에 대한 것이 아닌 나에 대한 것이라는 사실을 깨달았기 때문이었다. 어머니는 내가 어렸을 때 함께 해주지 못한 시간들을 간접적으로 사과하고 있는 것이었다.'

 와, 진정한 대화의 기술이란 이런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대화내용 이면의 마음을 읽는 것. 마음의 여유가 없다면 힘든 일인데도 저자는 그 어려운 걸 해낸다.


* 좌절하지 말고 지금 이자리에서!

 우린 스스로도 정당하게 대우받고 싶고 다른 누군가 또한 정당하게 대하고 싶다. 악순환의 고리를 만들고 있는 거대한 톱니바퀴에 부지불식간에 기름칠하고 싶지도 않다. 하지만 한 개인이 이룰 수 있는 노력과 그 결과에 한계가 있으며 그것에 좌절해서는 안된다.

 직장맘이든 전업맘이든 육아와 가사를 양 어깨에 짊어지고 허덕거리는 이 땅의 여성들에게 필요한 건 저자가 가진 저 '한뼘의 여유'일 것 같다. 우리 스스로를, 또 다른 누군가를 그리고 우리를 억압하는 그 누군가조차 온전히 존중받을만한 인격체로 받아들이고 현상 이면의 진심과 진실을 보는 힘이 있다면, 그리고 그 힘이 계속 모이고 모이고 쌓이고 쌓인다면 느리지만 사회는 바뀔 것이라는 희망을 품는다.